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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3부 - 6. 지옥도
게시물ID : history_219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8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11 15: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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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은 섬을 나왔지만
1254년 2월에 있었던 몽고 수군의 침입은 큰 여파가 없이 끝났습니다. 곧바로 전국의 산성과 섬을 살피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들어오진 않았으니까요. 3월이 되면 여유가 생겼는지 최항이 대신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고 격구와 희마(말을 타고 재주 부리는 것)를 구경했다고 합니다. 이 때 재주를 부리던 별초 중에 말의 장니(안장의 부속품)을 황금으로 장식한 이도 있었고 금잎사귀와 비단꽃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한 이도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이런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7월, 죽은 이현이 말한 고려의 가장 취약한 시기, 몽고에서는 사신 다가를 보냅니다. 이를 들은 고종은 급히 바다를 건너 승천부에 갔죠. 그는 "국왕이 비록 이미 육지로 나왔으나, 시중 최항과 상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참으로 항복한 것이냐?"라고 따집니다. 실세가 최항이라는 건 굳이 말 할 필요 없었던 것이죠. 또한 몽고에 항복한 장수와 관리들을 죽인 것에 대해 따지니 급히 귀양 보낸 조방언과 정신단을 불러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끝난 후, 다가는 "내가 돌아가면 대군이 돌아갈 것이다"고 말 한 후 돌아갑니다. 고종은 그에게 호위를 붙여주며 각 고을마다 마찬가지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때의 노략질이 심했다고 합니다. 

왔다가 확실히 돌아갔던 지난 전쟁들에 비해 5차 침공은 완전 철군이라기보다는 임시 휴전에 가까웠습니다. 야굴에서 차라대(자랄타이)로 총대장이 바뀌고 휘하 장수들 역시 바뀌는, 선수 교체에 가까운 것일 뿐이었죠. 그 때문에 고종이 직접 강화도를 벗어나기까지 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돼 있었습니다. 다가가 돌아가는 동안 차라대는 5천의 병력으로 기존의 병력에 합류, 압록강을 건넙니다.

6차 침공의 시작이었습니다.

2. 전쟁은 다시 시작되고
"'네가 비록 왕의 아들은 아니나 본래 왕의 친족이고, 오래 우리나라에 있는 동안 이미 우리 당이 되었으니, 다시 돌아가서 무엇 하겠느냐"

이전 편에 썼던 영녕공 왕준이 고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 이후에도 몽케는 그를 잘 대우해 줍니다. 위와 같이 말 하며 이번 침공에도 딸려 왔다고 하죠. 몽케는 일이 잘 될 경우 고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왕으로 앉히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려 왕족 중에서 친몽고가 있다는 게 나쁘진 않았죠. 아모간이 가진 말 300필을 빼앗아 그에게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로 창칼을 맞댄 지 이십여년, 이쯤 되면 몽고도 고려가 어떤 나라인지 상당 수준 파악했다고 봐야겠죠.

북계도 서해도(황해도)고 이미 무인지경이나 다름 없던 상황, 차라대는 그야말로 화살 같이 남진합니다. 다가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척후병이 경기도 광주에 이를 정도였죠. 그러면서 이용 가치가 떨어진 안경공 왕창을 돌려보냈죠. 몽고 사신들도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황제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 줍니다. 

"황제께서 신 등에게 칙명을 내려 공을 동반해 보호하여 왔는데 만리 풍진에 편안하지 못 할까 두려워하였으나, 오늘 다행히 환국하였으니, 우리들도 매우 기쁩니다."

다시 공격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르기를 시전한 것이죠. 

이 때 왕창과 고종이 보여준 모습은 나름 의기롭게 한 것이겠습니다만, 이런 상황까지 이르니 유치할 뿐이네요. 왕창은 강화도에 도착해서 이렇게 말 합니다.

"신이 오랫동안 몽고의 누리고 비린 냄새에 물들었으니, 하룻밤이 지난 뒤에 들어가겠습니다."

이에 고종은 이렇게 말 했습니다.

"네가 간 뒤로 하늘과 부처에 기도하여 언제나 서로 만날까 하였는데, 이제 다행히 잘 돌아왔으니 어찌 밖에서 자겠느냐? 너의 입은 옷은 모두 불태우고, 옷을 갈아입고 곧 들어오너라"

그 날 밤 둘이 눈물의 재회를 했다는 건 둘째 치고, 그 동안 몽고군은 계속 남진해 왔고, 동계에서는 동진의 병력까지 공격해 들어옵니다. 최항과 고종은 오히려 경상, 전라도에서 야별초 80명을 소환해 강화도를 지키게 했죠.

3. 육지는 지옥으로
육지에서의 저항이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괴주(충북 괴산)에 이른 몽고군을 산원 장자방이 별초를 거느리고 기습했죠. 이게 해당 지역의 병력인지 강화도의 야별초를 말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그래봐야 가벼운 타격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몽고군의 남진은 계속됐죠.

고종은 대장군 이장을 보내 차라대와 그 부하들에게 금은 술그릇과 가죽 폐백 등을 주면서 돌아가길 요구했지만 차라대는 이렇게 거부합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육지로 나오거든 모두 머리를 깎으라. 그렇지 않으면 왕을 붙들어서 돌아가겠다. 만일 하나라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군사가 돌아갈 기약이 없을 것이다."

단지 고려를 항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려인들 모두를 몽고풍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죠. 그에 대해 조정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하늘에 비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고려사에서는 이 긴 내용을 다 적고 있는데 (고려사절요에서도 그렇구요) 동사강목에서는 짜증났던 건지 빼 버립니다.

그러는 동안 충주는 다시 공격을 받게 됩니다. 5차 침공 때 김윤후의 지휘 아래 열심히 싸웠던 충주는 당시 싸운 노비와 천민들이 면천됐을 뿐만 아니라 충주 자신도 국원경으로 승격됐었습니다. 김윤후가 떠났지만 그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죠. 그래도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기에 차라대는 충주성을 포위하게 했지만, 성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성에서 나와 몽고군에 돌격하니 오히려 호되게 당해 후퇴해야 했죠. 

차라대는 결국 성 함락을 포기하고 우회합니다. 어떻게든 경상도에 진입하겠다는 의지였죠. 하지만 이번엔 상주에서 막힙니다. 10월, 상주산성을 공격하던 몽고군에게 일격을 가한 이가 있었으니, 황령사의 승려 홍지였습니다. 그가 적장을 쏘아 죽이고 반격하여 몽고군의 피해가 절반이 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고 하죠. 김윤후에 비등할 공이긴 했지만 총대장이 아니라서 임팩트가 없었던 것인지 잘 알려지진 않습니다. 이렇게 상주 동쪽은 몽고의 말발굽을 피할 수 있었죠.

대신 차라대는 남쪽으로 향합니다. 고종이 급히 최린을 보냈는데, 차라대가 있던 곳은 단계,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이었습니다. 최항이 봉해진 진양(진주)에서도 코 앞이었던 것이죠. 설마 그것 때문에 사신을 보낸 건 아니었으면 합니다 -_-a 아무튼 차라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최항이 왕을 모시고 육지로 나오면 군사를 파하겠다"

대체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적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려 했는데, 보시다시피 약간 달라졌습니다. 그는 최항을 직접 타겟으로 잡은 것이죠. 최항을 잡지 않으면 고려왕이 나와도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뻗댄 것 치곤 차라대는 곧바로 군사를 물려 버립니다. 몽케의 명령이었죠. 괜히 더 밀고 들어가서 피해를 볼 바에야 전열을 재정비해서 다시 들이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을 겁니다. 북계와 동계에서 그랬듯 서해도와 현 경기도 지역을 확실히 몽고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 더 유리했을 테니까요. 거기다 이미 피해는 줄 대로 준 상황이었습니다.

기록에는 다른 침공에 비해 패전이나 함락 소식이 없다시피합니다. 대신 맨 마지막에 이 작은 말로 대체할 뿐이죠.

"이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굳이 가려 적을 필요도 없이 충주와 상주를 제외하고 그들이 지나 온 지역은 초토화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죠. 차라대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반년만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효율적으로, 정말 엄청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해야겠죠. 뭐... 저 역시 저 말에서 더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이 6차 침공은 보통 1254년 한 해만을 일컫습니다. 하지만 차라대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뭐...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서 몇 차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웃기긴 하네요. 이는 다음 편에 자세히 얘기해 보죠.

참고로 이 때 목조, 이안사가 삼척에서 북쪽으로 가서 몽고에 귀순합니다. 그는 곧 다루가치가 되어 동북면의 실력자로 떠오르죠. 조선 왕조의 씨앗이 싹 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몽항쟁 기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전주에서 삼척, 동북면으로 간 이유는 역시 방호 별감들과의 갈등으로 보이는군요. 당시까진 가장 피해가 없었던 전라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럼에도 몽고 밑에 있는 게 오히려 살기가 좀 나았던 것일까요? 뭐 삼척으로 간 이유는 이안사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_-; 그를 따라 간 사람도 많았으니까요.

어찌됐든, 드디어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출처 pgr21 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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