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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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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화이트피그
추천 : 0/4
조회수 : 121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7/11 12:32:11
유대자본 역사

유대자본을 두고 순화된 용어로 ‘서방’ 혹은 ‘서방세력’ 또는 ‘서방국가들’라고 칭합니다.
저는 ‘유대자본’이라 부릅니다.
유대자본의 중심에는 유대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란 누구일까요?
유대자본은 또 무엇일까요?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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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팔레스타인(Palestine)과 이스라엘(Israel)은 옛날 카난 땅으로서
현재의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현 유대인의 공격적인 입장에서의 해석으로는 북부 골란 고원과 레바논과 남부의
사나이 반도와 홍해 일대까지 포함합니다.
이 지역의 아주 옛날(BC 1300년 이전) 명칭은 히브리성경(구약성서)에서 언급되고 '카난'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당시 그 곳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카난인이라 부릅니다.
인간은 수십 만년 동안 지구 위 어느 한곳 빈 곳 없이 생존해 왔고
전쟁과 평화, 지배와 예속으로 점철되면서 융화와 배격, 정치와 종교에 의해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카난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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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성경(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BC 1730년경, 갈대아 지방의 우르(현재의 이라크 지역, 쿠웨이트 부근 )에 살던 아브라함은
자기의 신(神) 갓(God)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 그의 자손들을 선택한 민족으로 정하였고
카난을 그들의 영구 소유지로 약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아브라함 일족은 갓(God;神)의 명령에 따라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카난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난에 도착한 아브라함의 자손인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극심한 흉년을 만나
잠시 피할 목적으로 이집트로 이주하여 400년 동안 파라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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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BC 1290년경,
모세가 나타나 또 갓(God)의 계시에 따라 일족을 이끌고 파라오의 땅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데,
일족을 이끈 모세는 40년이나 광야를 방랑한 끝에 카난 땅이 내려다 보이는 느보산에서 죽었고,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일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카난에 최종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이 아브라함족과 그 자손들을 이르러 '헤브루인(히브르인)'이라 하였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헤브루어(히브르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히브리인과 히브리어의 기원으로서 이들은 셈 족의 일파인 아람(Aram)족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성경(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성경 시대(BC 1200~330년)'는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비과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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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성경(구약성서)은 저자가 없는데다가 원본이 존재하자 않고
그 내용이 종족을 미화하는 신화적인 내용인 것에 비추어 종족주의적 요소가 다분합니다.
시련기를 맞은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을 뿐
사료로서의 가치는 희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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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은 예수의 시기를 거치면서 히브리족의 범위를 뛰어넘어
대중적 종교화에 이용되었고, 그것이 성공하여 오늘날 기독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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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250년,
남부 그리스에서 비(非)셈족인 아리안계 블레셋 족의 일파인 필리스틴(Philistine)인이
또 카난 땅으로 이주 해 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발달된 문명에서 비롯된 마차와 철제 무기 기술들을 가지고 들어와 그 영향력이 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필리스틴인은 카난 지역에서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과 아브라함족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만의 정체성을 잃긴 했지만
오늘날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어원이 될 정도로 그 비중은 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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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팔레스타인은 이들 필리스틴인이 살던 땅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민족이란 원주민과 아브라함족 그리고 필리스틴인의 혼혈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는 잡종인 것이지요.
히브리성경(구약성서)에 의하면, BC 1006년,
다윗 왕이 카난 지역의 12종족을 통합하여 헤브라이(히브리) 왕국을 세우게 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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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BC 970년경 즉위한 솔로몬 왕이 첫 성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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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930년경 헤브라이 왕국은 두 나라로 나눠졌습니다.
북쪽 사마리아에 10개 부족이 모여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고,
남쪽 예루살렘에는 2개 부족에 의해 유다 왕국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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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년도 넘기지 못한 BC 721년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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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35년만인 BC 586년에 남쪽의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합니다.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의 첫 성전과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습니다.
히브리민족에게는 유다 왕국이 멸망한 BC 586년이 나라를 잃은 날일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민족은 분파가 됩니다.
먼저 망한 이스라엘 왕국에 살던 히브리 사람들은 점령국 아시리아에 쉽게 동화된 데 반해
그로부터 135년 후에 망한 유다 왕국에 살던 히브리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상대적으로 더 큰 핍박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련에 놓였던 유다 왕국 사람들이 오늘날 유대(Judea)의 기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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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Judea)인은 망국의 유랑민(디아스포라)의 신세로 전락하거나
바빌론으로 끌려가거나 바빌로니아 왕국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 패망의 시기를 유대(Judea)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민족에게서 유대(Judea)족이 떨어져 나가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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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Judea) 지역은 이후 BC 322년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에 이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등 헬레니즘의 세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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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BC 63년 로마에 정복되어 로마의 속주인 유대주가 되었습니다.
이때 로마의 압정에 대항해 두 차례의 유대인 반란이 있었는데,
AC 66~70년 사이에 일어난 첫 번째 반란에서
로마의 티투스 황제는 예루살렘과 사원을 파괴하여 유대인의 도시 재건을 막았습니다.
이어서 AC 142~135년에 일어난 두 번째 반란으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로마 제국의 변방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유럽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반란과 무자비한 진압으로 점철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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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시기에서 조금 앞선 시기에 정치적, 종교적 목적에 의해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이 만들어 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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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성경(구약성서)의 본질은
"히브리인이 갓(God;神)에게 선택된 민족이고 카난은 갓(God;神)과 약속된 히브리인의 땅"이라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종족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종족부흥운동이 효과를 발휘한 시점이 AC 66년과 AC 142년의
두 차례 반란이 있었던 때인데다가 예수가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확인되므로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의 발현 시기는 BC100년~AC10년 사이로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허구적인 내용으로 볼 밖에 없습니다.
AC 135년 유대인의 반란을 제압한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재건했지만
그가 유대인들의 거주는 금지하는 바람에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이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티베리아와 제파트 같은 곳에만 소수가 거주할 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은 2000년 동안 그 곳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유대 지역은 줄곧 팔레스타인(Palestine)으로 불리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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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팔레스타인은 비잔틴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637년 아랍인이 진출하면서 이슬람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히브리 사람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십자군 원정을 통해 기독교 세력의 예루살렘 수복이 몇 차례 있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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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 할 때까지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터키제국의 일부로 아랍인들이 정착해왔고 대부분의 주민은 무슬림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전통적 히브리인은 모두 무슬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은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스라엘 왕국 사람들로서 유대 왕국보다 135년 전에 망했으므로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은 유대 왕국 사람들의 전유물이고
유대인을 제외한 나머지 히브리인에게는 무관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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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등지로 쫓겨난 유대인은 대를 거듭하면서 2000년 동안 현지인들과 혈통을 썩으면서
히브리인 본래의 혈통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의 생김새는 현 팔레스타인에 잔존한 실제 히브리인과는 달리 각양 각색입니다.
혈통적으로는 비(非)히브리인이 되었고 유전적 의미는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즉 유대인이 자칭 히브리인으로 여기지만 혈통적으로 이미 유럽인이고,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을 사실로 여기지 않는 범 히브리인의 생각과 달라 말만 히브리인이지
실제로는 비히브리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설사 히브리성경(구약성서)를 사실로 치더라도 "선택된 민족"이라는 부분에서
이미 혈통의 온전성을 상실했으므로 허무한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오늘날 놀라운 결과에 이르게 합니다.
혈통적으로 비히브리인이 되고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잔존하며 살아온 전통적 히브리인을 히브리인의 이름으로
핍박하고 있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분쟁입니다.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쉽게 예를 들면
2000년 전에 아프리카로 이주한 가문의 어떤 한 할아버지의 후손이 깜둥이가 되어 돌아와서는
자기가 황씨 가문에 후손이라고 자처하며 처음 듣는 가문의 역사를 설명하며
집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일이지요.
혈통적 관계와 무관하게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유대(Judea)라는 이름으로 히브리인이라 자처하며
잔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히브리성경(구약성서)이라는 강력한 매개체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성경(구약성서)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혈통도 무시되고
오로지 이를 믿느냐 마느냐 여부로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유대교'라고 하는데 유대교는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만의 전유물입니다.
예를 들면 딸이 비유대인과 결혼을 했을 때 사위에게 유대인이 될 자격이 부여되고
사위가 유대교를 믿는다면 그는 유대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대를 거듭하면 혈통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로지 유대교 가족만이 존재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한편 카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에 대해서는 같은 갓(God)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우호적입니다.
종교적인 동맹관계가 가능하며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로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영역에서 빼앗고자 하는 목적도 동일합니다.
혈통 문제를 떠나 유대인은 2000년 동안 유럽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 현지인으로 동화되지 않는 바람에
박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두고 유대인은 나라 없는 설움으로 치부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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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박대를 받았던 가장 큰 원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유럽 각국의 토착 인민들과 융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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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스스로 야곱의 자손으로서 신의 선민이라고 여기는 사상을 갖고
자손대대로 전하면서 자기들끼리의 결집력을 공공연히 나타내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사상은 유대교라는 종교로 공고히 되어 있고
유대교는 유대인이 나라 없이도 사상적인 면에서 다른 민족에 희석되지 않고
20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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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럽 각국의 토착 인민들은 나라 없이 굴러들어온 이들이 자기들에게 융화되지 않고
돌출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 유대인의 신앙과 힘이 땅에 떨어질 때로 떨어진 그때쯤 희망과 도움이 예상치 않았던 곳으로부터 찾아왔다.
그곳은 영국에 있는 개신교인들로부터 이었다.
영국의 개신교화는 유대인들을 향안 태도와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1290년 이후부터 영국에는 유대인들이 없어졌다.
그러나 1500년경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성경의 권위와 성경과의 관계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민족과 그들의 역사적인 조국 땅에 하나님의 계획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1621년에 출판된 헨리 피치경의 저서 '유대인의 회복'은
회복된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묘사하고 있었다.
"모든 이방인들은 그 왕국에 영광을 돌릴 것이며 그 앞에 엎드릴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은
교회와 정부로부터 반대를 불러 일으키고 핍박을 받게 되지만
그러한 주장은 뿌리를 내리고 청교도를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에 계속 퍼져나갔습니다.]
- (Derek Prince, The Last World on the Niddle Eas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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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경, 성경이 영어로 번역된 일은 개신교가 생겨난 발단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카톨릭 중심의 기독교는 개신교로부터 시달려야 했고
기독교는 카톨릭과 개신교라는 2개의 축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로는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있는데
청교도는 이러한 개신교의 일파입니다.
이들 개신교는 유대인에게 한결같이 우호적인 방향이었고 특히 청교도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청교도는 종교개혁의 영향 특히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자들을 일컫는데
종교개혁 사상을 열정적으로 지지한 이들은 인위적인 전통에 반대하며
갓(God)의 말과 성령에 의한 회심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청교도는 잉글랜드 복음주의운동에 영향을 주어 장로교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와
성공회 성직자인 존 찰스 라일 주교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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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청교도를 포함한 개신교의 발달은 유대인의 입지를 넓혀주었고,
동시에 영국 국왕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영국 의회는 왕당파(騎士黨)와 의회파(圓頂黨)로 갈라지지만
점점 왕을 지지한 왕당파는 소수에 불과하였고 의회파는 그 세를 확산하게 됩니다.
의회파는 청교도 의원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세가 가히 왕의 권위를 넘어볼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영국에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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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1649년, 급기야 영국에는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이 일어납니다.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를 상대로
1641년 영국 의회는 3년 회기법, 스트래퍼드백의 사권(私權) 박탈법,
성실재판소 및 고등종무관 재판소의 폐지법, 선박세의 위법성 선언, 직할림 제한법, 기사강제금 금지법 등을
잇따라 가결하면서 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결국 왕은 1642년 의회에서의 5명의 의회파 의원 체포에 실패한 이후 도망을 가는 비참한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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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일어난 초기의 2년간은 국왕군이 우세하였으나,
의회군에 올리버 혁명파 수장 크롬웰이 나타남에 따라
청교도인 자유농민을 중핵으로 하는 기병대를 조직하여,
1644년 국왕군을 마스튼 무어에서 격파하였습니다.
이때 유대인은 크롬웰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크롬웰이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크롬웰은 1645년네이즈비 전투에서 국왕군에 이겨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 왕을 생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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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국왕 재판을 감행하여 왕을 처형하였습니다.
이로써 영국은 군주제와 귀족원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청교도는 공화제, 인민주권, 보통선거, 기본적인권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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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교도혁명의 의의는 처음으로 유대자본이 등장하는 발현점이고
또한 봉건군주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발점이었습니다.
청교도 뒤에 유대자본이 배후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자본이 영국에서 국왕을 제압한 힘은 유럽 전역에서 유효하였고,
더구나 당시 개신교의 확산에 힘입어 뿐만 그 세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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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 왕위에 오른 영국왕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로서,
가톨릭교 부활정책과 전제주의를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즉, 종래의 심사율(審査律)을 무시하고 가톨릭교도를 문무(文武)관리로 등용하는가 하면
상비군을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청교도를 전면에 내세운 유대자본에 대한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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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납니다.
왕 제임스 2세가 가톨릭교를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신앙자유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교회의 설교단(說敎壇)에서 낭독하도록 명하자 7명의 주교가 반대청원을 하였습니다.
왕은 그들을 투옥하였습니다.
의회를 중심으로 한 청교도 측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의회는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과 메리 부처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윌리엄과 메리 부처는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국내 귀족과 지방호족들도 잇달아 윌리엄?메리 부처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왕이 파견한 처칠도 왕을 배반하고 윌리엄 진영에 투항하고,
왕의 둘째딸 앤도 윌리엄군(軍)에 가담하였다.
싱겁게 혁명은 끝났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하여 '명예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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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예혁명의 의의는 17세기의 영국에서의 왕권과 의회의 항쟁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의회의 권한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왕위계승까지도 의회가 결정할 수 있게 하여,
영국의 실세는 청교도들이 장악한 의회에 모아지게 하였습니다.
1인의 강한 권력에서 다수의 약한 권력으로 분산시킨다는 것은
곧 권력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이므로 유대자본의 계획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후, 유럽전역은 봉건군주제도가 차츰 무너집니다.
오늘날 봉건군주제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이르게 한 원인은 바로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 시,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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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으로 윌리엄 3세가 왕에 오르자
유대자본은 윌리엄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화폐발행권 이권을 얻어냈고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이후에도 영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쳐
벤저민 디즈레일리나 윌리엄 글래드스턴 같은 유대인들은 직접 수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청교도가 세를 장악하기 이전 유대인에 대한 커다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는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오늘날 30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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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과 유럽대륙의 유대자본의 성장과 별개로
신대륙 아메리카에도 독자적인 유대자본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을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형성한 유대세력을 유대자본이라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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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 영국 청교도들은 결국 영국국교회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던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약 12년 후에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교섭을 통해 영국 청교도들을 체포하려 했고,
청교도 35명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날 결심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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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9월16일 35명의 청교도와, 일확천금을 꿈꾸며 아메리카로 이민 가는 상인 65명,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까지 총101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출항을 합니다.
당시 영국왕정의 핍박을 피해 떠나는 길이고 보면
청교도와 유대인들이 신대륙 북아메리카에 자유와 평등, 박애를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이후 많은 유대인이 속속 신대륙으로 이주하였고
특히 유대인들은 뉴욕에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유대자본의 큰 세력으로 확장되어 나갑니다.
그런데 100여년 후 크게 성장한 북아메리카의 유대자본은 영국 유대자본에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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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1783년,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이 발발했습니다.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동부 해안 13개주가
영국의 조세정책 등에 반발하여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전쟁입니다.
미국은 1776년에 13주가 있는 상태에서 건국했다고 합니다.
영국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부과한 과도한 조세 정책이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걸림돌 없이 급성장한 북아메리카 유대자본이
청교도혁명 이후 역시 급성장한 영국 유대자본에 대한 반항입니다.
북아메리카는 식민지였고 세금을 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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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쟁으로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자 선택한 것인데
이때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미국을 지원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여 직접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는데
영국 유대자본의 독점적인 지위에 대한 내심의 반발심이 표출된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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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은 전쟁이 끝나자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식으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유대자본의 팽창에 힘쓰게 됩니다.
그들 나라의 인민의 혈통과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자본은 어쨌든 같은 핏줄이니까요.
세계의 약소 국가들은 종교와 자본을 동시에 주사하며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유대자본의 독점자본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갖은 착취를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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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독립한 미국은 이번에는 남북전쟁이 일어납니다.
유대인은 북아메리카 북부 쪽에 세를 형성하였고,
늦게 아메리카에 이주해온 봉건적 앵글로색슨족은 북아메리카 남부 쪽에 세를 형성하게 됩니다.
세를 개별적으로 형성한 쪽은 앵글로색슨 가문들이고,
집단적으로 형성한 쪽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을 만큼 강성해진 이들 두 세력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예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의
앵글로색슨과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 유대자본 사이에 일어난 내전인데
1865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부에 대한 군정을 거쳐 유대자본은 북아메리카를 완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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