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은 워커 중장이 낙동강 방어선을 견고하게 방어하여 풍전등화에 놓였던 부산을 성공적으로 지켜준것에 감사하며 국군이 북진할 때 1950년 10월 22일 평안북도 영변군 용산면 신흥동에서 국군 제6사단 2연대가 노획한 김일성의 소련제 승용차를 1951년 6월에 (워커 장군의) 미망인에게 선물하였고,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공예품을 보내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김일성의 승용차는 소련의 스탈린 그라드 공장에서 제작한 8기통 ZIS 리무진 승용차로서 소련수상이던 스탈린이 북한의 김일성과 중공의 모택동에게 한대씩 선물한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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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우,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일본 해상자위대를 재건하는데 큰 도움을 준 미국 해군의 버크대장에게 감사의 표시로 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그가 살아있는 동안 생일이면 주미 일본 대사관 무관을 통해 그의 공로를 기억한다며 선물과 함께 감사의 표시를 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도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정례적으로 그의 가족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며 감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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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버크 대장이 일본에 기여한 공보다 워커 대장(전사 뒤 승진)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대한민국 멸망 직전에 워커라인 설정하고 지킨것부터가 큰 공이다 - 글쓴이 주) 그러나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 회장인 지갑종씨의 글(<월간조선> 2000년 8월호) 에 따르면, 1971년 지갑종 회장이 김일성 승용차의 환수를 위해 미국에 있는 워커 대장의 집을 방문했을 때 워커 장군 미망인은 '(워커)장군이 전사한 뒤 21년 만에 당신이 처음 찾아온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지회장의 노력으로 김일성 승용차는 1982년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고 현재 경남 사천의 항공우주 및 호국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망인에 따르면 남편의 전사 뒤 그때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워커 대장의 집에 사람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