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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3부 - 4. 죽느냐 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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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7
조회수 : 5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08 2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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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침공의 총병력 역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단 야굴이 직접 거느린 병력은 1만이었고, 아모간과 홍복원의 경우 기존의 병력을 이끌고 갔으니 역시 한 일만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만에서 삼만 정도로 추측할 수 있겠네요.

뭐 지금 와서 병력 같은 게 뭔 소용인가 싶네요 -_- 시작해 보죠.

1. 죽느냐 사느냐
야굴은 들어오면서 인질로 잡혀 있던 영녕공 왕준을 시켜 편지를 보내게 합니다. 대략 이렇죠.

- 황제께서 "국왕이 나와서 맞는다면 군사를 후퇴시키겠다"고 하였고, 이를 전하기 위해 내가 왔다. 
- 태자나 안경공 왕창을 보내면 군사를 돌릴 것이다. 내 가문의 목을 걸겠다.

여유가 넘쳐흐르는 편지였죠. 이현 역시 같은 내용의 글을 써 보냅니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태자를 보내야 되겠다고 했지만, 최항이 막죠. 

"봄ㆍ가을로 조공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고, 전에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도 3백 명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형편인데, 지금 만일 나가 맞이하다가, 동궁이나 안경공을 잡아가지고 성 아래에 이르러 항복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최항의 말을 누가 어기겠습니까. 결국 흐지부지됩니다. 이번에도 그저 버티기만 남을 뿐이었죠. 그 동안 몽고군은 쾌속 진군합니다. 동계에서는 고화주(함남 영흥)이 함락됐고, 그 아래에도 딱히 그들을 막을 게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았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항복하면 살려주고 반항하면 죽이겠다는 것이었죠. 

한편 유유자적 서경에 도착한 몽고군 장수 왕영조(1차 때도 왔었죠)는 서경에 관청을 설치하고 근처 1천여리를 통치합니다. 저항하지 않았다 하여 학살은커녕 약탈도 없었고, 이렇게 북계는 완전히 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서경 사람들을 탓 할 순 없는 노릇이죠. 지금까지 살아 있어 준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서해도, 지금의 황해도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아마 고려왕이 항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보기였을 겁니다.

서해도의 양산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만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고 합니다. 잘 하면 여기서 귀주성의 일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이었죠. 문제는 방호별감 권세후였습니다. 그는 성이 험한 것만 믿고 술만 마시고 방비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예요. 강화도에서 잘 살 수 있었을 건데 딱히 병사를 딸려주지도 않고 자기 혼자만 보낸 거였으니까요. 다른 방호별감들이라고 다르진 않았을 겁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나는 살자 이런 거였죠. 최씨 정권이 딱히 뭘 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선택이 그리 틀리진 않았구요.

문제는 몽고군이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이 험하고 뭐고 몽고군은 공격해 왔습니다. 

"성에 임하여, 대포를 설치하여 문을 쳐부수고 화살을 비처럼 쏘았으며 또 석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와서 불화살로 초막을 쏘아 불사르고 갑졸들이 사방으로 들어오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참 간단히 묘사된 이 전투로 권세후는 자살하고 몽고군은 예의 그 학살을 시작합니다. 이 때 성 안에서 죽은 이만 4천 7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1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어린아이는 노예로 삼았죠. 항복하면 잘 해 준다, 하지만 반항하면 죽는다, 철저한 화전양면이 지칠대로 지친 고려인들에게 다가 왔습니다.

아모간과 홍복원, 왕영조 등이 그렇게 황해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동안 야굴은 빠른 속도로 남하합니다. 어느새 척후병 3백기가 경기도 광주를 방화하고 있었죠. 야굴이 이끄는 주력도 동주(현 철원)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이 곳을 지키던 방호별감 백돈명은 쫄아서 산성에서 나가지 못 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추수를 못 했다는 것이죠. 이현의 생각이 정말 맞아 떨어졌던 겁니다.

굶어 죽을 상황이라서 고을 아전은 그에게 "적이 오기 전에 교대로 수확해 오면 안 될까요?"라고 건의했지만 백돈명은 그를 베어 버립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 한 상황에서 공성이 될까요? 몽고군이 성 아래 이르자 백돈명은 6백의 정예병으로 요격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달아나 버립니다. 그 자신은 나름대로 싸워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이래서야 싸움이 될 수가 없죠. 여기서도 학살이 벌어집니다. 

2. 문답무용
무섭게 남하하는 몽고군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죠. -_-; 최항은 낭장 최동식을 야굴에게 보냅니다.

"소방은 상국의 신하로 복종한 이래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두 마음을 갖지 않고 힘을 내어 직책에 이바지하며 비호를 입어서 만세에 근심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천병(天兵)이 갑자기 임하니, 소방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온 나라가 두려워하고 근심스럽습니다. 바라건대, 대왕은 우리의 정성을 양찰하고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어디 한 두번 속았나요. 야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황제께서 국왕이 늙고 병들었다 칭하고 조회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참인가 아닌가를 시험하려 한다. 6일 줄 테니 다시 와서 보고해라."

이에 최동식은 이렇게 둘러댑니다.

"군사가 서로 교전하는 중에 우리 왕께서 어떻게 빨리 올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죠.

"너는 어떻게 왔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_-;

철원이 깨지고 몽고의 척후병이 경기도와 충청도를 넘어 전주까지 이른 상황에서도 방법은 없었습니다. 또 사신을 보내죠. 이번에 선택된 건 대장군 고열이었습니다.

"승천부에 궁궐 다시 지었는데, 동북계에 수달 잡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살지 못 했습니다 ㅠㅠ 불쌍히 여겨서 군사 물려주시면 나갈게요"

야굴은 고열과 최동식을 억류한 후 나오라고 닥달합니다. 하지만 절대 안 나온다고 하면서 협상은 계속 결렬됐고, 그 동안에도 몽고군은 계속 남진했죠. 서쪽에서는 이미 강화도를 마주보는 갑곶진(제물포)에 이르렀고, 동쪽에서는 춘주성, 현 강원도 춘천에 이릅니다. 여기서 또 참혹한 학살이 예정돼 있었죠.

3. 부모는 간 데 없고...
춘주성은 문학 조효립과 안찰사 박천기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험한 산성이라서 어떻게 지켜볼 만 했던 모양이고, 몽고군의 공격에 어느 정도 버티기는 했죠. 하지만 곧 한계에 도달합니다. 몽고군은 춘주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고, 곧 우물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의 피를 잡아 마실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양식도 다 떨어졌겠죠.

조효립은 아내와 더불어 자살했고, 박천기는 성 내의 돈과 곡식을 불태운 후 결사대를 조직해 돌격합니다. 목책을 부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참호에 막혔고, 전멸했죠. 

이 춘주성 전투에 대해 슬픈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당시 박항이라는 사람이 강화도에 있었는데, 부모가 춘주성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몽고군이 철수한 후 춘주성으로 달려갔지만 보이는 건 시체의 산 뿐, 거기다 모두 참혹하게 훼손돼 있어서 누가 부모인지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죠.

이에 그는 얼굴이라도 비슷한 시체를 찾아 모두 합장합니다.

그 수가 300여구나 되었다고 합니다. 뭐 어쩌면... 그걸 핑계로 땅에 묻히지도 못 한 이들을 같이 묻어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후에 그의 모친이 몽고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나 가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찾지 못 했따고 합니다.

몽고군의 진격은 계속됩니다. 후방에서는 아직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현 함남 안변, 영흥 등지의 등주와 금양성이 포위됐다거나 공격받았다는 말은 있지만 함락되거나 항복했다는 말은 없거든요. 최전방에서 끝까지 버텼을 그들의 이름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아마 제대로 된 장수 없이 백성들이 맞서 싸운 모양입니다. 아니면 명시돼 있지 않을 뿐 항복했거나요.

몽고에 항복한 이현은 여기서 최고의 활약을 펼칩니다. 충주의 천룡산성이나 원주 등 여러 성이 이현의 항복권고를 듣고 항복합니다. 어쩌면 홍복원보다 더 이뻐 보였을지도요.

그 동안에도 조정에서는 어찌 할까 고민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 하나 더 있네요. 이 때 야별초들이 해전을 연습합니다. -_- 이 무렵 야별초는 규모도 커지고 몽고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받아 신의군이라 불리는 별초를 하나 더 만듭니다. 기존의 야별초를 둘로 나누어 좌별초 우별초라 칭하니 이후에 삼별초라 불린 게 이들이죠.

4. 적은 충주로
이렇게 북쪽부터 충청도에 이르기까지, 성들이 하나하나 함락되거나 항복합니다. 공성이고 뭐고 가리지를 않고 마구 공격한 것이었죠. 어느새 10월, 겨울이 시작됐죠. 이 때 그나마 버티고 강화도 조정과 연락이 됐던 성은 남경(서울), 광주(경기도 광주), 수주(인천) 정도였습니다. 동쪽에서도 강원도 양양이 함락되면서 경상도로 내려갈 발판이 생겼고, 적이 충주에 이르자 경상도 성주에서도 항복해 올 정도였습니다.

아직 전라도에는 적이 많이 이르지 않았습니다. 척후병이 약탈하고 갔긴 했지만 몽고군은 3차 때처럼 경상도,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치기보다는 하나하나 지근지근 밟으면서 장기전을 생각했죠. 

이런 가운데서 목표가 된 것이 충청도 충주였습니다.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뜨려야 할 성이었죠. 이번에도 이현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럼 죽어야죠.

충주에서도 방호별감이 파견돼 있었고, 성 내에서는 일반 백성보다 천민의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차 침공 때의 영웅적인 항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그들을 학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를 위해 싸우겠느냐 하면 절대 그럴 생각이 없을 이들이었죠.

하지만 충주의 방호별감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 했죠.

다운로드.jpg

처인성 전투로 환속한 후 방호별감으로 활약했던 김윤후는 각오를 다지며 적을 맞습니다. 딱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몽항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고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충주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죠.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이미지가 복구가 잘 안돼서 화질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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