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이일의 건의에 따라 출병 시기를 9월10일에서 10월 중순으로 연기합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정구(李廷龜)가 비밀히 차자를 올리기를,
(중략)
군사는 죽은 자가 태반이고 식량은 공사간에 모두 고갈되었고 기계는 낡고 민심은 흩어졌으니,
이와 같은 형편으로는 자수(自守)하기도 충분치 못한데 어떻게 정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거사를 이런 때에 감행하는 것은 필시 부득이한 사세가 그 속에 있어서일 것입니다.
(중략)
대적(大敵)은 겨우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국내에 가득하며 부역이 번다하여 민생이 곤고하며 상처는 겨우 아물어 가나
흩어진 백성이 아직 모이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또 남을 방어하는 데에도 오히려 힘을 헤아려야 하는데 정벌함에 있어 어찌 허술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중략)
금년에는 절기가 빠르고 북녘 땅은 추위가 일찍 닥치니, 10월이 되면 응당 눈이 많이 쌓일 것입니다.
이 얇은 홑옷을 입은 백성을 몰아 살이 얼어 터지고 손가락이 얼어 떨어지는 추위를 무릅쓰게 하는데,
그 중에 말을 가진 자는 열에 한둘도 안됩니다.
천리 길을 도보로 행군하느라 손발이 얼어 터지게 되면 사기가 먼저 꺾이어 싸움도 하기 전에 흩어질 것을 생각할 것이니,
용감한 무부나 건장한 사내라도 재주를 써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중략)
국운이 아직도 비색하여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불행하게도 왜적이 다시 일어나면 남쪽 변방을 그 누가 방어하고 북쪽의 흔단을 그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대신에게 명하여 이미 결정된 계책을 다시 상의하게 하소서.
(중략)
하니, 차자에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매우 가상하다.
(중략)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 요약 : 지금 전쟁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원정질임? 또 지금은 최악임!!!
한겨울에 출병해서 뭐 어쩌자는 거임?
이로 인해 비변사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고, 출병은 다음 해 봄으로 미뤄지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8월5일 기사中
비변사가 북벌에 관한 이정구의 차자에 동의함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중략)
정예로운 포수(砲手)를 뽑아 들여보내어 첨방(添防)케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더라도 거사에 이르러서는
다시 변신으로 하여금 사세를 헤아리고 시의(時宜)를 살피게 하여
혹 시기를 물려 명년 봄으로 정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으로서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중략)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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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 장난하는 게냐?
계속된 북벌 연기로 인해 이러다 흐지 부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던 차에
선조는 12월 다시 한번 북벌의 의지를 다지며, 풀어진 신하들을 독촉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12월12일 기사中
북벌과 관련해 북도에 내려갔던 장사들이 도로 올라온 이유를 묻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전에 본사(本司)의 계사(啓辭)에 따라 눈이 녹기를 기다려 거사할 일을 본도에 행이하였는데,
요즈음 북도(北道)에 내려갔던 장사(將士)들이 모두 도로 올라오는 것을 보니 거사를 하지 않을 것인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본사는 필시 알 터이니 회계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전관을 보내든지 서신을 보내든지 하여 그 거사 여부를 물어보면 어떻겠는가?
만일 거사를 한다면 모든 일을 미리 준비하여야 하고 장사와 정졸(精卒)도 보내야 된다는 것을 비변사에 말하라.”
조선왕조실록 1600년 1월4일 기사中
비변사에서 오랑캐 토벌을 위해 북도에 포수를 파병하는 문제로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앞서
‘포수(砲手)들을 아울러 들여보내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인가? 이들을 들여보내지 않으면 거사할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금면 봄에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하는 내용으로 전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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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홍립 <반드시 토벌해야>
또한 함경 도사 강홍립이 상소를 올려 북벌의 필요성을 강하게 어필하며
3월 초가 출병으로 적격이며, 행군 루트와 공격 방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아뢰자
드디어 선조는 <거사할 계획이 이미 정해졌다>며 3월 초에 반드시 북벌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12월24일 기사中
정원이 북벌에 관한 함경 도사 강홍립의 계획을 아뢰니, 비변사에 알려 조처케 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북방에 대한 일을 함경 도사 강홍립(姜弘立)에게 물었더니
‘본도(本道)의 변경 사정으로 볼 때, 모두들 이 오랑캐를 만일 대규모로 응징하지 않으면 국경을 침구하는 화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당초 노호(老胡)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보을하(甫乙下)의 모든 부락에 있는 오랑캐들이 모두 동요되어
성패를 보아가며 거취를 정하려고 하였다.
지금 토벌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불어나고 커져서 제압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까 염려되니,
속히 문죄(問罪)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본도의 병력이 적고 약하므로 경포수(京砲手) 7백, 8백 명으로 본도 포수와 함께 각 진지에 나누어 배치하여 선봉을 삼고,
또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형세를 과시하면 적은 모두 질서가 없는 오합지졸이므로 싸우기도 전에 먼저 무너질 형편이다.
감사와 병사의 뜻도 이 오랑캐는 불가불 토벌해야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봄에 군사를 움직이게 되면 농사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절기가 이르면 얼음이나 눈이 다 녹지 않을 것이고 절기가 늦어지면 장마가 질 염려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3월 초에 군사를 소집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진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행군 시에는 부령(富寧)의 갈림길을 경유하여야 되는데 본부(本府)의 군량이 매우 모자라 감사가
지금 청암창(靑巖倉)에 있는 곡식과 남방(南方)으로 운반해 갔던 곡식을 실어 와서 군량을 이어 줄 계획을 하고 있다.
거사를 하게 될 경우 노토부락(老土部落)이 모든 부락 중에서 제일 멀리 있어 보을하(甫乙下)의 길을 따라가게 되면
도로가 우회하여 멀 뿐만 아니라, 왕주(王主) 등 5, 6개의 부락을 통과하게 되니 행군하는 데에 맞지 않다.
그래서 변경에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병사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풍산 차유령(豊山車踰嶺)을 지나서 바로 노토 부락으로 진격하게 되면
거리가 대략 70, 80리쯤 되니, 차유령 위에서 병사를 주둔시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행군하면 정오쯤에
노토 부락에 도착할 수 있다. 노토 부락에 도착하기 전 20리쯤에 명가노(明家奴) 제추(諸酋)의 후면 공격을 방비하기
위하여 병사를 갈라 배치할 곳이 있다. 그러니 이쪽 길로 가는 병사는 적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길은 다른 길에 비하여 가장 평탄하다고 한다. 또 한 갈래는 무산(茂山)에서 출발하여 무산 차유령(茂山車踰嶺)을
경유하여 명가노 부락을 진공하는 길로 거리가 약 60, 70리가 된다.
적은 이 길에 목성(木城)을 많이 설치하여 행군하는 길을 막아 두었다.
그러나 적이 우리 국경에 와서 도둑질할 때 모두 이 길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목성 곁으로 인마(人馬)가 통행할 만한 길이
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두만강이 노토 부락 밖에 있고, 큰 냇물이 장백산(長白山)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서 노토 등의
제호(諸胡)가 그 물줄기를 끼고 사는데 그 물은 많이 불을 때가 아니면 어디든지 모두 건너 다닐 수가 있다고 한다.
노토 등 오랑캐들은 한 개의 시벌(時伐)을 노토 부락 서쪽 약 5, 6리쯤에 설치하고 나무와 돌로 튼튼히 쌓았는데
그리 높지는 않으며 모든 적들이 함께 들어가서 지킬 계획이라고 한다. 또 시벌 곁에 높은 산이 있는데
아군이 만일 이 산을 점령한다면 화살과 탄환이 미칠 만한 곳이다.
또 그 가운데는 전부 모옥(茅屋)이므로 화공(火功)도 할 만하다.」 하였다.
진군할 도로와 적중 형편은 노토를 탐지한 사람들의 말이 서로 엇갈리는 점은 있으나 대강 이러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거사할 계획을 이미 결정한 것 같으니 비변사에 알려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하니 곧장 비변사에서는 출병 시기를 3월 중순으로 확정하고
황해/강원/경기의 무사 5백, 한양/황해/평안의 총포수 8백을 함경도로 보내겠다고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12월28일 기사中
비변사가 북벌과 관련해 출병 시기·군사 선정·무기 마련 등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북도의 거사에 눈이 녹고 길이 마른 때를 택하자면 3월 보름께로 시기를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사와 포수(砲手) 및 무기 등을 선전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보내려고 하면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황해·강원·경기의 무사 도합 5백 명과 경포수(京砲手) 1백 명, 황해도 포수 1백 명, 평안도 포수 6백 명을
병조와 훈련 도감 및 각도 감사로 하여금 미리 정선(精選)하여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가 제때에 보내도록 하고,
화약·화포·궁전(弓箭)도 군기시로 하여금 수효를 헤아려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러한 뜻을 비밀히 각도와 함경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하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충분히 잘 살펴 정선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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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일 <제게 좋은 계략이 있습니다만...>
한편 이일도 나름 계책을 내고 선조에게 아뢰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1월26일 기사中
지중추부사 이일이 북쪽 오랑캐에 대한 대책과 의병의 포상·진관법 등에 관해 아뢰다
마땅히 제부(諸部)의 추장들을 모집하여
‘노토(老土)와 명간로(明看老)를 체포하여 항복해 오는 자가 있으면 이 보을하보(甫乙下堡)의 납관(納款)을 허락하고
관시를 통행시키겠다.’고 하소서.
그러면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리들이어서 은밀히 도모할 리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성문(聲聞)이 한번 전파되면 틀림없이 서로 의심을 일으키게 되어 크게는 괴수(魁首)를 잡아 전형(典刑)을 보일 수가 있고
작게는 부종(部種)들을 이탈시킴으로써 도적질을 멈추게 할 수가 있습니다.
→ 요약 : 여진족들아~ 노토를 잡아오면 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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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토의 선공
헌데 이일의 나름 내분을 일으키려 한 이 계책이 노토를 자극하였는지,
노토를 비롯한 두만강 인근의 여진족이 대거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이때가 1600년 3월25일 경이었는데 이미 이달 중순에 행해졌어야 할 북벌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4월7일 기사中
비변사에서 회령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랑캐에 대한 대책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회령(會寧)과 종성(鍾城)의 번호(藩胡)들이 한꺼번에 모두 반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적호(賊胡)들이 이를 빙자하여 사람을 능멸하고 더욱 독기를 부리는 바람에
변장(邊將)이 화살에 맞아 거의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4월8일 기사中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이수일이 오랑캐와 전투한 결과를 아뢰다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이수일이 치계(馳啓)하였다.
“3월 25일 적호(賊胡)가 부령(富寧) 땅 차동(遮洞)을 침범하였는데 그 무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습니다.
부사(府使) 이간(李侃)이 군사들을 정돈하여 교전하였는데,
이간은 몸에 10 여 군데 부상을 입었고, 편장·비장 등 5∼6인이 전사하였습니다.
힘껏 싸워 오후 3∼4시 경 되자 드디어 적들이 패주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 4월1일 기사中
호인 노토 등이 부령을 침략해왔으나 우리 군사의 전진으로 물러가다
호인(胡人) 노토(老土) 등이 부령(富寧)을 침략해왔다.
부사(府使) 이간(李侃)이 처음 그들과 싸울 때 전세가 불리하여 편장(偏將)과 비장(裨將)들이 많이 죽고
그도 10여 곳이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계속 전진하여 싸우니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 노토의 선공으로 장수급이 5~6명이나 전사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과 인내는 필요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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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북벌 결행!!!
노토가 먼저 선공을 가해오자, 드디어 조선군이 북진하기 시작합니다.
때는 1600년 4월14일.
조선군의 규모는 일전의 실록의 기록을 참고하면
한양/황해/평안의 총포수 8백, 황해/강원/경기의 무사 5백 총합해서 외지에서 함경도에 먼저 들어간 병사가 1300.
여기에 함경도의 기병과 궁수 3000여 명이 동원되어 총포수를 주력으로 하는 총 4천여 명의 조선 병사가
3로로 나뉘어 북진을 개시합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이수일 中
그때 노토 부락(老土部落)에서 우리나라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우리를 경멸하고 있었다.
공이 한번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국위를 펴 보고 싶어하였으나, 조정의 공론이 불화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여 난색을 표명하였다.
공은 순찰사 상국 윤승훈(尹承勳)과 같은 뜻이 있어 누차 조정에 청원하였더니 선조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이 정예 기마 4천을 선발하여 강을 건너 멀리 습격하여 정화려(丁火廬)를 무찔러 죽이고 전군이 돌아오니,
오랑캐 종족(種族)의 부락 사람들이 비로소 명성과 위엄을 두려워하여 서로 이끌고 귀화(歸化)하였다.
4월12일 가장 거리가 먼 좌군이 어유간에서 출진하였습니다.
4월13일 우군이 풍산에서 출진하였습니다.
4월14일 초저녁에 이수일이 이끄는 중군이 무산에서 출진하였습니다.
4월15일 새벽녘에 3군이 모두 노토의 부락에 도착하여
먼저 좌군이 처음 만난 여진 부락의 뒷면에 매복하여 퇴로를 막았고,
중군과 우군이 정면으로 일제히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조선군은 노토부족의 근거지를 포함한 주변 40리(약 13km) 마을 7곳을 초토화시켰는데
총 1000여 채의 가옥을 모조리 불태우고, 불태우고 남은 집은 다시 도끼로 모조리 부숴버렸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곡식을 창고에 보관하지 않고 땅에 묻어 보관하였는데,
조선군은 땅에 숨겨놓은 곡식도 모조리 파내어 불태워 버렸고,
밭에 심은 곡식도 모조리 짓밟아 버렸습니다.
또한 설치된 모든 성채도 다 불태워버렸지요.
새벽녘부터 시작된 조선군의 학살과 약탈 및 방화는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조선 장수는 초토화된 노토부족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하다!!!>
4월15일 해 질 무렵에 조선군은 회군을 개시하였습니다.
회군 과정에서 소규모 여진 기병이 추격하여 밤새도록 조선군의 후미를 계속 공격하여
조선군의 회군 속도는 느려졌는데, 16일 오후 5~7시에 풍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5월8일 기사中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이 오랑캐를 토벌한 시말과 전과를 보고하다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하였다.
“호적(胡賊)을 분탕한 과정을 군관 이희길(李希吉) 등이 싸움터에서 돌아왔기에 신이 상세하게 물어보고 또 들은 것을
참고하니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유간(魚游澗)에서 가는 길은 적지가 가장 멀기 때문에 좌위병(左衛兵)이 적지까지 들어가는 데 이틀이 걸렸고
풍산(豊山)에서 가는 길은 왼쪽 길보다 조금 가까운 까닭에 우위병(右衛兵)이 적지에 들어가는데 하루가 걸렸으며,
무산(茂山)에서 가는 길은 다른 길보다 더욱 가까우므로 중위병(中衛兵)은 이달【4월이다.】 14일 초저녁에 출동하였습니다.
15일 평명(平明/새벽녘)에 세 갈래로 간 군사가 일시에 나아가 약속대로 좌우병은 초면(初面) 부락 뒷산에 매복하여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중위병과 우위병은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도 역시 중위병(中衛兵) 속에 있었습니다.
앞뒤에서 합세하여 적들이 일망타진될 듯하였는데 차유령(車踰嶺) 아래와 기우동(祈雨洞) 어귀에 호적(胡賊)이 보낸
복병(伏兵) 4∼5명이 있다가 우리의 척후병을 보자마자 즉시 달아났습니다.
이는 평소에 우리들이 공격해 올까 두려워서 의례적으로 매복한 것으로,
이번에 우리들의 출동 시기를 미리 알아서 매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복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군사 행동이 누설되어 각 부락의 적들은 일시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세간살이와 가축 및 잡물 등은 미처 갖고 가지 못했습니다.
당초에 신이 각 진영에 영(令)을 전하여 군중에서 노획한 잡물 등은 노획한 자에게 각각 나누어 주고
장관(將官)이 갖지 말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장관들은 하나같이 약속대로 하였습니다.
그 밖의 잡곡이나 각종 기구들은 불을 놓아 태우도록 하였는데 호적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하여
지붕에 이는 개초(蓋草)는 다 타도 사방 벽은 불에 타지 않았으므로
영을 내려 군졸 가운데 도끼를 가진 자가 때려 부수고 다시 태워 한 칸도 남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사기는 배가되었습니다.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남녀 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움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이미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습니다.
이 호적(胡賊)은 강성(强盛)하여 장주 부락으로부터 마을외 부락까지 40여 리에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그 안은 아주 넓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즐비하고 살림의 넉넉함은 물 아래 있는 다른 호적들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했습니다.
분탕을 끝내고 군사들을 거두어 진을 치니 해가 이미 저물었습니다.
적중(賊中)에서 밤을 지내다가는 뜻밖의 변이 있을까 염려되어 삼위(三衛)를 잇달아 회군하도록 하여
곧장 풍산(豊山)으로 향해 회군하는데 10 여 리를 오니 해가 지고 달도 없어 캄캄한데
호적의 기병(騎兵)이 벌써 우리 뒤를 바짝 따라왔습니다.
경포수(京砲手)와 정예(精銳)한 토병(土兵)을 뒤로 돌려 그들과 싸우면서 행군하다 보니
회군의 속도가 빠르지 못하여 밤새도록 계속 행군하였습니다.
16일 유시(酉時)에야 비로소 풍산보(豊山堡)에 도착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적병은 돌아가지 않았으며
이날도 두세 차례 접전(接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적병은 애당초 추격하기 위해 모아진 군사가 아니고 우리가 소탕할 때 산속에 숨어 있던 여러 종족들이
우리들이 회군하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서 나와 우리의 뒤를 쫓는 자들로,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군이 포를 쏘고 싸우려고 하면 물러나고 우리가 군대를 거두어서 행군하면
즉시 뒤쫓아 올 뿐 별로 큰 교전이 없었기에 사상자가 많이 나지 않았는데, 출신(出身) 3인과 포수 4명이 전사했습니다.
대체로 이번 싸움은 포수가 아니었다면 전승(全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 공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은 사수(射手)입니다.
어유간에서 마을외까지와 마을외에서 풍산까지의 3 백여 리를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횡행(橫行)했으며
각 부락의 종족들은 넋을 잃고 멀리 도망쳤을 뿐 아니라
이웃 부락의 적들과 이미 배반했던 회령 번추(會寧藩酋)까지도 요즈음 와서 모두 항복하려고 하니,
이는 실로 도(道) 전체의 행운입니다.
참괵(斬馘)한 수를 말씀드리면,
창황중에 베어 형제가 분명치 않은 것을 제외하고 좌위(左衛)가 59괵(馘)이고 중위(中衛)가 18괵과 생포가 1명이며,
우위가 33괵이고 병사(兵使) 관하(管下)가 5 괵인데, 병사가 이미 올려보냈습니다.
각 위(衛)의 군공(軍功)은 곧 뒤따라 마련해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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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만명이 학살당한 노토군의 피해
조선왕조실록 1600년 6월14일 기사中
평안도 관찰사 서성이 북방 오랑캐 문제로 치계하다
평안도 관찰사 서성(徐渻)이 치계하였다.
“만포 첨사(滿浦僉使) 김종득(金宗得)의 첩정(牒呈)에
‘금년 5월 12일 이파(梨坡)에 사는 동평고(童坪古)가 와서 고하기를
「수상(水上)에 사는 호인(胡人)에게서 들으니,
지난 4월 조선의 군마(軍馬)가 북도(北道)의 노토 부락(老土部落)에 돌입하여 분탕질을 했다고 하는데
훈도(訓導)도 알고 있었는가?」
하자 훈도 방응두(方應斗)와 통사(通事) 하세국(河世國) 등이
「노토(老土)는 본시 심처호인(深處好人)이어서 우리 나라의 병위(兵威)를 모르고 몰래 우리 국경에 들어와
우리의 산보(山堡)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초한 환란으로서 사리에 당연한 것이다.
호인들은 얼마나 죽었고 노토와 다른 추장은 몇 명이나 죽었는가?」 하니,
평고가
「노토는 이런 환란이 있을까 두려워 평소부터 깊은 산에 피할 계획을 하였으므로 그 자신은 겨우 환란을 면했으나
노토에 소속된 부락 7개처가 남김없이 분탕되어 죽은 사람의 수가 거의 1만여 명에 이른다.」 했다.’
하였습니다.”
노토군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윤승훈의 보고서 : 가옥 1천 채 파괴, 양식과 작물 모조리 없앰.
목을 베어 들고 온 것 : 115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은 제외)
생포 : 1
여진족 동평고 등이 아뢴 피해 상황 : 노토 소속 7개 부락 초토화. 죽은 사람 1만여 명
반면 조선군의 피해 상황은 전사 7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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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근거지를 잃은 노토 인근 부족을 약탈하다
가옥 1천 채에, 1만 명이 죽은 노토 부족은 전에만 하더라도 누르하치와 혼인동맹을 맺고
부잔타이에 맞설 정도로 어느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조선의 북벌 이후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본거지를 잃어버린 노토부족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인근 부족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6월22일 기사中
병조가 아뢰기를,
“전교에 ‘함경도의 서장(書狀)을 보건대 노토(老土)가 번호(藩胡)의 부락을 공격했다고 하니, 병조는 힘껏 조치하라.’고 하셨습니다.
(중략)
“노토가 이미 우리 군대의 토벌을 받아 그들의 소굴이 전복당하고 간신히 목숨만 살아 도망쳤으니,
아직은 숨을 죽이고 깊숙이 엎드려 있을 때이다.
그런데 넘어졌다가 다시 분연히 일어나 무리들을 끌어모아 번호(藩胡)를 공격함으로써 먼저 번호를 쳐부수어 흉모를 부렸으니
준동하는 이 오랑캐가 뒷날 큰 골칫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듣건대 혜산(惠山)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7월4일 기사中
또 평안 병사(平安兵使)의 서장(書狀)을 보니, 노토(老土)의 무리가 삼수(三水) 지경 근처에 이입(移入)한다는 설은
전일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서장과 서로 부합되니, 그들이 이입한다는 말은 일이 허언이 아닌 것 같다.
심지어 노토는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의 원래 부족인 오도리 부족도 공격합니다.
먼터무 사후 범찰과 동산(누르하치의 5대조, 충산)이 건주위로 옮겨 간 후에,
오도리 부족은 먼터무의 이복동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조선에 입조하며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회령 인근에 살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오도리 부족의 마적합/마적개이 노토와 동성이다고 한 것으로 미루워,
노토도 오도리 부족의 일족으로 생각되네요.
조선왕조실록 1600년 7월17일 기사中
또 노토(老土)가 공격한 번호(藩胡) 마적합(馬赤哈)은 본래 노토와 동성(同姓)입니다.
호인(胡人)들의 풍속에 동성이라 하면 매우 친밀하여 매사를 협력합니다.
유독 마적합은 성품이 자못 공순하고 이해(利害)에 대해 아는 자이므로 노토가 횡포를 부린 후로 겉으로는 은근함을 보였으나
내심으로는 실지 귀부하지 않았습니다. 노토가 하는 모든 일에 절대 동모하지 않고
그들의 소식을 즉시 우리에게 알려 옴으로써 끝내 노토에게 미움을 사 침략을 받고 서로 싸워 그 부락이 소실되고
자신이 도륙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정상을 추구해 보면 극히 가련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은휼(恩恤)을 베풀고 잡물을 넉넉히 준비하여 처자와 남아 있는 유족들을 방문하여 직접 위로하고
부의를 내려 주게 함으로써 모든 오랑캐들이 이 소문을 듣고 감격하도록 하면
변방을 안정시키는 방법에 또한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7월28일 기사中
지금 노토(老土)가 마적개(馬赤介)를 공격하였는데, 마적개는 곧 이른바 오도리이니
구황(具滉)이 달려가 구원한 것이 기의(機宜)에 무슨 잘못이랴.
이렇게 노토가 세력이 약해졌음에도 조선에 호의적인 부족들을 공격하고 다니자 1601년 관찰사 신잡은
다시 한번 출병하여 노토의 잔당을 섬멸해 버리자고 청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601년 6월29일 기사中
함경도 관찰사 신잡이 군사를 출동하여 노토의 잔당을 섬멸하자고 청하다
이에 앞서 북도의 변장은 누차 부적임자를 거쳤으므로 그곳에 있는 번호(藩胡)들이 대부분 배반하여
부령(富寧)·경성(鏡城) 사이에서 수시로 도발하므로 진쉬(鎭倅)와 보장(堡將)이 이따금 전사했었다.
함경도 관찰사 신잡(申磼)이 강원·황해도의 군사를 더 들여보내어 오랑캐를 방어하고
8월 전에 군사를 출동하여 노토(老土)의 잔당을 섬멸하고자 청하였다.
【신잡은 자질이 아둔하고 모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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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노토 조선에 항복을 청하다. (사관의 선조 디스)
이러다 결국 세력이 급속히 약해진 노토는 조선에 항복을 청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602년 6월16일 기사中
여진족 추장 노토의 항복을 받아줄지에 대해 선전관이 처리토록 하다
비변사가 회계(回啓)하기를,
“노토(老土)의 죄악은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워서 전일에도 여러 번 계획을 세워 정형(正刑)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항복을 애걸하는 것은 비록 그들의 형세가 궁핍해서이기는 하지만 하늘이 벌을 줄 기회를 준 것입니다.
가령 그 정성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어찌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1602년 7월6일 기사中
지금 한효순의 장계를 보건대, 노토(老土)의 정상이 지극히 흉악하고 간사하다.
전일 항복을 청한 것도 마음을 고쳐 진정을 토로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부하들이 흩어져서 형세가 궁해졌기 때문에 투항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우리가 어떻게 처치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한 정상이 이미 분명히 드러났다.
(중략)
노토는 이미 여러 번호(蕃胡)와 원한을 맺고 있는 사이이므로 그들 무리를 유혹해 불러들여 두 마음을 품게 하여
계책을 꾸미게 한다면 필시 쓸 만한 계책이 있을 것이니,
그곳의 변방 장수가 기계(奇計)를 내어 잘 조처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토가 그 계책을 믿고 나와 항복한다면,
전일에 회계(回啓)한 제1조의 논의대로 체포하여 죄를 따져 처치해야 할 것이고,
그 부하들은 엄하게 타일러 옛 터전으로 도로 보내 살게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사신은 다음과 같이 선조를 디스하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중략)
지금 오랑캐가 실로 흉악하고 교활한데 어찌 우리의 술수에 넘어가겠는가.
우리의 계책대로 된다해도 항복한 자를 또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얕은 꾀와 비열한 논의에서 세태의 변천을 볼 수 있으니, 슬프다.
→ 선조는 노토가 진짜로 항복하여 오면, 곧장 잡아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관은 그런 어설픈 계책이 통할리가 만무하고, 만약 진짜로 노토가 왔다 해도 항복한 오랑캐를 잡아 죽이는 것은
너무 비열하다고 감히 선조를 까고 있습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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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노토 세력이 급속히 약해지고 고립되다.
세력이 약해진 노토는 주변 약소부족들을 약탈하였고, 이에 또 다른 복수전이 감행됨으로 고토부족은 점점 고립되어 갔습니다.
주변 부족과의 불화로 고립된 노토 조선과의 화친과 무역을 간절히 바랬지요.
조선왕조실록 1603년 6월4일 기사中
노토가 회령의 번호(藩胡)와 원한을 맺고 있으므로, 비록 본부에 성의를 바치고 싶지만 저들의 화를 입게 될까 두려워서
왕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산(茂山)으로 와서 정성을 다하여 귀순하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사세로 보면 진정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무산보 같은 데에다 개시를 허락하여, 허수라(虛水羅)의 여러 부락 오랑캐들이 풍문을 듣고 몰려와서
마음대로 물건을 매매한다면, 노토 부자도 반드시 나와서 성의를 바치게 될 것이다.
(중략)
부령 부사 김여율(金汝嵂)은 부임한 초기에 노토가 와서 뵙고, 그의 아들과 사위 등이
무산에 와서 성의를 바치기를 청했었는데 덮어두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매우 미편한 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603년 7월1일 기사中
요즈음 본도(本道)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이 편의 번호(藩胡)와 노토(老兎) 부락이 서로 약탈하면서 잇따라 보복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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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토 누르하치에게 병력을 구걸하다.
조선과의 화친 협상도 물 건너간 데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결국 노토는 한때 혼인동맹까지 한 사이였던 누르하치의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노토의 아들이자 누르하치의 사위인 아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조선에 투항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에 노토는 아로를 참수하여 보내라고 조선에 요청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605년 5월4일 기사中
아로가 아비를 배반하고 투항해 오자 심극명이 경솔히 그를 받아들여 후환이 생김을 아뢴 비변사의 계사
아로(阿老)가 그 아비를 배반하고 투항해 왔습니다.
당초 변신(邊臣)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터인데
회령 부사(會寧府使) 심극명(沈克明)이 경솔하게 성중에 머무르도록 허용하여 아무 탈없을 일을 탈냈으니,
대단히 잘못되었습니다.
하간 부락(下間部落)을 약탈하여 우리의 변경을 위협하는 것은,
필시 노토(老土)가 이로 인해 원망을 품고 흔단을 일으킨 것입니다.
전일 서성의 계사(啓辭)에 대해 신들이 생각하기를,
아로가 아비를 배반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간의 정상은 알기가 어렵고
더구나 그는 노을가적(老乙可赤)의 사위이기도 하니, 경솔하게 죽일 경우에는 후환이 있을까 염려된다고 하여,
그 때문에 결박하여 건네주어서 그네들 임의대로 처치하도록 하자는 내용으로 복계(覆啓)하여 하유(下諭)를 받았습니다.
지금 서성과 김종득의 장계를 보건대 ‘지금 그들의 공갈 협박 때문에 갑자기 결박하여 건네준다면
저들은 필시 아비를 죽인 악한은 천하가 함께 미워해야 하는 바인데,
우리를 두려워하여 부득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요청대로 참수(斬首)하여 건네준다면 지난날의 분풀이도 충분하고 뒷날의 근심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채로 그들에게 돌려주었다가 저들이 혹 어버이의 사랑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 죽이지 않고 꾀를 바꾸기라도 한다면 아로가 죽을 때까지 원망할 것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대의 아들이 그대를 배반하고 온 줄을 전연 모르고서 우선 머물러 있도록 허락했었다가 그대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아비를 배반한 자식은 사람이면 모두가 베여야 하는 것이니 우리가 어찌 털끝만큼인들 아낄 리가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와서 알현한다면 그대가 보는 앞에서 바로 참수하여 그대에게 주겠다…….’
즉 <노토 네가 직접 오면 네말대로 아들을 네가 보는 앞에서 참수해서 주겠다> 고 조정에서 결론이 났는데
헌데 병사 김종득이 곧바로 아로를 참수해 버립니다.
김종득은 일전에도 조정에 보고도 안하고 군사 3천을 동원해 여진족을 토벌하다 크게 패한 건퇴전투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노토는 조선이 진짜로 아로를 죽여버리자, 누르하치에게 원수를 갚겠다며 병사 4백 명을 빌려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위가 죽든 말든 누르하치는 쿨하게 무시해 버리지요.
조선왕조실록 1605년 7월4일 기사中
김종득이 경솔히 아로를 죽여 북변에 오랑캐의 근심을 열어 놓았다고 이시발이 치계하다
(중략)
노토(老土)가 아로(阿老)가 참급(斬級)당한 혐의 때문에
노을가적(老乙可赤)에게 4백 명의 정병(精兵)을 빌려 달라고 청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는데,
노을가적이
『아로는 죄를 범하여 참형을 당했는데 이런 조그만 일로 군대를 청해 서로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자, 다시 추호 왕기로(王其老) 등을 시켜 군대를 청해 복수하려고 한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아로가 항복해 온 일이 결국 후일의 화근이 되리라고 사람들이 다 염려하고 있었는데,
병사(兵使) 김종득(金宗得)은 망령되이 자기 소견대로 성급하게 참살한 뒤 뒤끝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첨사 현즙(玄楫)에게 허물을 돌려 장계를 올려서 죄주도록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중략)
노토는 이미 아로를 죽게 만들었으므로 무단히 노추(老酋)에게 고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
그가 군대를 요청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말한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 사위가 죽은 일을 "이런 조그만 일로" 취급해 버리는 누르하치...
게다가 병력을 구걸하는 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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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노토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동해여진을 공략하기 시작하는 년도는 1607년입니다.
1607년 동해여진을 패권을 두고 부잔타이와 처음으로 격돌한 누르하치는
이후 10여 차례 이상 동해여진의 각 부족을 갈고리로 쓸어 담듯
한번 출병할 때마다 수천 명씩 포로를 건주위로 잡아갑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마지막으로 노토의 기록이 보이는 년도가 바로 1607년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607년 9월19일 기사中
노적과 회파의 정세에 대해 선전관 김협이 보고하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선전관 김협에게 물으니, 그가 이달 10일 행영(行營)에 달려가서 북병사 유형(柳珩)에게 물었는데 유형이
‘노적(老賊)의 대군이 8월 보름 사이에 본소(本巢)로부터 출발하여 곧바로 회파에 도착, 싸워서 크게 이겼다.
이른바 회파는 노굴(老窟)과 홀소(忽巢)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노굴과의 거리는 7, 8일 일정이고
홀소와의 거리는 4, 5일 일정이다.
노군(老軍)이 회파채(回波砦)에 둔거하면서 한편으로 하추(何酋)에게 사람을 보내어 항복해 오도록 효유하니
하추가 그 말을 따르려고 했다 한다. 이 말은 노토(老土)에서 나온 것이다.’ 했다 합니다.
즉 누르하치가 서해여진 호이파를 정벌하기 시작했다는 첩보를 노토가 조선에 전달해 준 것입니다.
이후 조선의 사서에 노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사라지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613년. 광해군 5년 2월30일 기사中
함경북도 병사 이시언이 여진족 노추가 홀자온을 함락한 일을 아뢰다
함경북도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이 장계하기를,
“호인(胡人)이 와서 고하기를 ‘노추(奴酋)가 군병을 거느리고 홀자온(忽刺溫)의 부성(部城)을 포위한
다음 운제(雲梯)를 사용해 함락시키자 홀추(忽酋)가 탈출하여 북쪽으로 도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홀자온과 노토는 모두 두만강 밖의 여진(女眞)이다. 두 부가 여러 부를 병합하여 육진(六鎭)의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노추가 건주(建州)에서 일어나 두 부를 병합하고 군사와 무기를 거두어들임으로써 비로소 강대해져
요동(遼東) 서쪽을 넘볼 뜻을 품었다.】
→ 1613년 드디어 누르하치가 부잔타이를 공격하여 울아(홀온, 호륜, 홀자온)를 멸망시킨 내용입니다.
사관은 울아의 멸망을 기록하면서 또다른 강적이었던 노토가 누르하치에게 병합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끝-
-길공구-
p.s) 아참 이 북벌 말고도 선조대에는 수천의 병력을 동원하여 여진족을 토벌한 경우가 몇 차례 더 있긴 합니다.
승전한 경우도 있고, 패전한 경우도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