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부를 땐 상국, 배고플 땐 식당ㅋㅋ
노토 부족에 대한 조선 조정의 증오는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는데요.
아부와 침략을 때에 따라 달리하는 노토 부족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나타납니다.
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무산부(茂山府)를 창설하다 中
신이 고 절도사 이일(李鎰)이 편찬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을 보니,
번호가 두만강 안에 있을 때에 회령 이남 지방이 항상 침략을 받은 것은 모두 노토부락의 소행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 지방은 회령ㆍ부령ㆍ경성(鏡城)의 중간에 있어서 장백산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길이 명천(明川)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 사이로 흩어져 나갔는데,
지세가 여러 고을의 요충지대가 되기 때문에 좌우로 출입하면서 기회를 틈타서 움직이기 쉽습니다.
회령에서 단천에 이르기까지 진보(鎭堡) 수십이 여기저기 벌여 있는 것은 모두 이곳의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토부족이 조선과 인접한 두만강 인근에 뿌리를 내린 것은 140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1일 기사中
회령 부사(會寧府使) 박종남(朴宗男)이 치보하기를,
‘수상 도추장(水上都酋長) 노토(老土)가 그의 휘하인 개락지(介落之)를 시켜 진고(進告)하기를,
「올아적(兀阿赤)이 노토(老土)를 들어오도록 초치하였다.
그러자 노토가 답하기를,
『우리는 조상 이래 대대로 조선을 받들어 오면서 2백여 년 동안 무사히 살아왔다.
그런데 올아적이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곧 성을 쌓아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올아적이 쳐들어 올 경우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가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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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습다! 조선 ㅋㅋ
노토부족은 일전에도 소개해 드렸듯이 임란 초기에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함경도를 점령하고,
두만강을 건너 싸웠던 그 노토부족입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은 노토부족의 역습을 받아 참패를 당하고 퇴각하였지요.
조선왕조실록 1592년 7월1일 기사中
(가등청정이) 그리고는 마침내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깊숙이 노토 부락(老土部落)까지 들어가
성(城)을 공격하니 호인(胡人)이 사방에서 일어나 요격하여 사졸(士卒)들의 사상자가 많았다.
이에 진로를 바꾸어 종성(鍾城)의 문암(門岩)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 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에 차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협로(峽路)를 따라 경성(鏡城)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조선이 전란에 휩쌓여 있는 동안에 노토부족은 조선을 우습게 본 모양입니다.
이는 노토부족 토벌전에 사령관으로 참전한 이수일의 묘비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수일(李守一)의 비명(碑銘) 中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가을에 북도 방어사로 제수되었다가 조금 뒤에 본도(本道) 절도사로 전임되었다.
북방 변수가 난리에 새로 쪼개져 인심이 안으로 흔들렸는데,
공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무마하여 진정시키니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그때 노토 부락(老土部落)에서 우리나라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우리를 경멸하고 있었다.
공이 한번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국위를 펴 보고 싶어하였으나, 조정의 공론이 불화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여 난색을 표명하였다.
공은 순찰사 상국 윤승훈(尹承勳)과 같은 뜻이 있어 누차 조정에 청원하였더니 선조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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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벌하자!!!
북벌의 시작은 1599년 4월23일 선조가 윤승훈(尹承勳)을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면서 부터입니다.
당시 함경도 방어사는 이수일(李守一)이 맡고 있었는데, 이수일은 위의 비명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노토부족을 토벌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지요.
이수일은 1598년 조정에서 능력이 있는 무장을 당상관으로 올리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유성룡에 의해 천거되기도 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다소 무장답게 거침이 없던 인물로 보이는데요, 1599년 1월 명나라 사신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선조가 대노하여
이수일을 잡아들여 문초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헌데, 2주 후에 당시 조선에 와있던 명나라 유격 모국기(茅國器)가 이수일을 변호하며 능력 있는 장수다고 말하자
선조는 모국기의 뜻대로 하겠다며 이수일을 방면하고 본직으로 돌려보내지요.
한편 함경도에 부임한 윤승훈은 먼저 함경도에 병권을 쥔 방어사(防禦使) 이수일와 병사(兵使) 오응태의
교통정리를 조정에 청하여 이해 7월6일 결국 이수일이 함경도 방어사와 병사를 겸임하게끔 하게 하여
이수일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윤4월1일 기사中
함경 감사 윤승훈이 기밀에 대하여 비밀히 아뢰다
신이 듣건대, 이수일(李守一)이 본도의 방어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타도의 감사로 있을 때 보니 병사(兵使)와 방어사가 서로 사이 좋은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군병의 다소를 다투며 서로 지지 않으려 하는가 하면 피차 대립하여 정과 뜻이 어그러지곤 합니다.
그 다툼이 처음엔 공적인 일로 시작되지만 마침내는 개인적인 틈이 벌어져 협력해서 함께 성사시키는 뜻이 조금도 없게 됩니다.
게다가 주객의 형세가 달라 각기 호령을 발하니, 수령과 진장(鎭將)들로서는 누구를 중심으로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사세가 긴급할 경우 변란이 순식간에 일어나 성패가 당장 결판날 것이니 이는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본도는 군병도 적고 땅도 좁다고 하니 남북에 각각 병사(兵使)가 있는 이상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장수가 많아 군병이 나눠지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걱정입니다.
신이 이수일과 오응태(吳應台)의 우열은 모르지만 만약 수일을 북방에 꼭 써야 한다면 이 사람을 병사로 삼고,
그렇지 아니하면 수령으로 차임해 보내 뒷날의 쓰임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이즈음에 윤승훈과 이수일은 의기투합하여 노토부족 토벌을 결의하였나 봅니다.
윤승훈은 이후 노토부족을 제외한 두만강 인근의 여진족을 모조리 불러 대규모 연회를 베풀어
노토부족의 영향력을 탐문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윤승훈이 아직 병사직에 있던 오응태와 국경의 연회장에 도착하였을 때 이때 모인 여진족이 무려 7000 명이었습니다.
이때 노토부족을 제외한 두만강 인근의 여진족 7000 명이 연회장에 와서 무릎을 꿇고 한양으로의 입조를 청합니다.
윤승훈은 이 여진족들이 노토부족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보고서와
노토부족 토벌에 관한 비밀 보고서를 동시에 선조에게 올리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6월29일 기사中
함경 감사 윤승훈이 육진의 번호들에 관해 아뢰다
함경 감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북병사(北兵使) 오응태(吳應台)를 대동하고 육진(六鎭)에 도착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번호(番號)의 수가 무려 7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계미년 간에 이탕개(尼湯介)가 침략해 왔을 때 번호 등은 전혀 와서 참여하지 않았다 하는데,
이제 보건대 육진의 번호들이 노토(老土)와 통모(通謀)하지 않은 것은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온성(穩城)에서 연회를 베풀던 날에 추장 등이 모두 무릎을 꿇고 진정하기를
‘몇년 동안 서울에 조회를 못했으니 올해는 허락해 달라.’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중국군 10만 명이 왜적을 정벌하러 나와 왜적을 모두 섬멸하고 현재 나라 안에 있다.
회군하여 돌아간 뒤에는 즉시 너희들이 서울로 조회 오는 것을 허락할 것이니, 우선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더니, 추장 등이 다시 호소하기를
‘사세가 과연 그렇다면 서울에 조회할 수는 없겠지만 의립(衣笠)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원컨대 진상(進上)하여 상을 받게 해 달라.’ 하므로,
신이 이 한 가지 일을 마땅히 조정에 품신하여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사신은 말한다. 오랑캐는 마음이 흉칙하고 교활하여 언제 변란을 일으키고 속일지 알 수 없으니,
비록 연향에 참가했다고 한들 어떻게 그들이 노토(老土)와 통모(通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의심할 것 없다고 한 윤승훈이야말로 오활하다 하겠다.
수신(帥臣)이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천박하니, 뒷날 변경에 환란이 생길까 우려된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5일 기사中
생일을 맞은 경리 만세덕을 접견하기로 하고, 북벌 계책을 논하게 하다
(중략)
정원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승훈(尹承勳)이 올려보낸 별록(別錄)의 사항은 군사 기밀상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근일 비변사에는 이미 의정 대신(議政大臣)이 없고 유사 당상(有司堂上) 또한 유고(有故) 중이니
관례대로 비변사에 내리면 필시 회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일 비변사 당상 및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명초(命招)하여 회의하도록 해서 속히 회하(回下)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때 윤승훈이 노토(老土)를 정벌할 계책을 가지고 글을 올려 조목별로 진술하였다.】
윤승훈이 올린 북벌의 15가지 조항의 보고서에 군무의 최고 총괄 부서인 비변사도 이에 동조하고 나서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7일 기사中
비변사가 윤승훈의 계책으로 북벌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북도 순찰사(北道巡察使) 윤승훈(尹承勳)이 나라의 중임을 받고 몸소 친히 경험하고서 이 15조항을 아뢰었으니,
이는 모두 하나씩 시행할 만한 것입니다.
노호(老胡)의 흉역행위가 있은 이후부터 변방의 방비가 더욱 긴급한 상황이니,
지금의 사세로 보아 일대 거사를 하지 않으면 징계할 수가 없는데 변방의 백성들이 쉴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승훈이 제장(諸將)과 더불어 이와 같은 약속을 하였으니,
이른바 중협(中協)·좌협(左協)·우협(右協)의 분군(分軍) 및 진병(進兵)하는 길을 한결같이
장계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아군의 병력을 헤아리지 않고 망령되이 남의 나라를 도모하였을 경우, 예부터 성공한 자가 적었다.
승훈이 사세를 그릇 판단하고 잔약한 군사로 멀리 강대한 오랑캐를 토벌하려 하니,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반드시 패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대로 따라 저지하는 자가 없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이번에도 사관은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라며 거침없이 이 북벌론 자체를 비판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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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능한가?
이에 고심하던 선조는 이일(李鎰)[요즘 사극 징비록에 좌절이 나를 키운다를 보이고 계신 그 이일장군^^;]에게
북벌에 대해서 자문을 구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27일 기사中
비밀 비망기로 북벌 출병의 일을 물으니, 이일이 답하다
비밀 비망기(秘密備忘記)로 이일(李鎰)에게 하문하기를,
“첫째, 노토(老土)의 소굴이 험조(險阻)하다고 하는데, 알 수 없거니와 성을 쌓았는가, 산세를 의지하였는가?
성을 쌓았다면 석성(石城)을 쌓았는가, 토성(土成)을 쌓았는가, 아니면 나무로 목책을 만들었는가?
호인(胡人)의 병기는 궁시(弓失)에 불과할 뿐인데 일찍이 그 궁시를 보건대 활은 조잡하고 화살은 강하지 못했는데
그에 비교하면 우리 나라 궁시가 10배나 나았다. 그들은 도대체 궁시 외에도 다른 기술을 갖고 있는가?
아군이 만약 대갑(帶甲)으로 일제히 진격하고 총포(銃砲)로 공격하면 적의 궁시도 소용없게 될 것이고,
철마(鐵馬)가 아무리 날래어도 아군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면 도망치고 말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꺼릴 것이 있겠는가.
둘째, 진격하는 길이 좁다고 하는데, 만약 적이 먼저 기미를 알아채고 참호를 파 구덩이를 은폐하거나
큰 나무를 베어 길을 가로막거나 복병으로 기습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째, 가장 염려되는 것은, 둔병(屯兵)하고 경숙(經宿)할 때에 적이 야습해 오면 아군이 저절로 궤멸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밤에는 많이 북을 치고 불을 밝힌다.’고 하였는데,
이는 장수가 그 상황에 맞춰 어떻게 용지(用智)하느냐에 달려 있다.
멀리 척후(斥候)를 보내기도 하고 북병(伏兵)도 설치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서도(西道)에 있을 때 경(卿)이 바친 거마목(拒馬木)이 매우 편리했는데,
군중(軍中)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씩 가지고 머무는 곳에 별도로 성책을 만들게 하고 그 외부에는 품방(品防)을 파게 한다면
바로 방어할 수 있을테니 제 아무리 오랑캐의 돌기(突騎)라 한들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것이다.
네째, 알 수 없거니와 북도의 군량은 여유가 있는가?
다섯째, 보잘것없는 이 소추(小醜)가 우리의 성보(城堡)를 공격하고 우리의 변민(邊民)을 노략질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우리라고 가만히 움츠리고 엎드려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거사는 부득이한 것으로서 이른바 응병(應兵)이라는 것이니, 반드시 승리하는 이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의롭지 못하면서도 강한 경우가 옛날에도 있었다. 경은 일이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섯째, 만약 좋은 계책이 있거든 다시 하나하나 숨김없이 개진하라.”
하니, 이일이 회계하기를,
“첫째, 노토의 소굴이 험조한데 그 부락에서 8, 9리 떨어진 곳에 높고 험준한 곳을 골라 큰 돌과 큰 나무를 섞어 높이
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휘어 그 위에 돌을 얹어 놓았는데 인마(人馬)가 그 길로 들어올 때 그것을 발사하면
형편상 인마가 전진하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적의 궁시(弓失)는 조잡해서 우리의 궁시에 댈 바가 못되고
다른 병기(兵器)도 없습니다만 환도(環刀)를 잘 쓰고 갑주(甲胄)와 전마(戰馬)만은 몹시 좋습니다.
그러나 총포와 궁시를 겸용하여 부대행동을 하면서 선봉(先鋒)이 방포하여 그 소굴을 소탕한 뒤에 그 선봉으로 하여금
후미를 막게 하면 적이 내침하지 못할 것이고 또 침범해 온다 하더라도 힘을 합쳐 섬멸하면 자연히 대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진격로(進擊路)를 적이 먼저 알아채고 장애물을 설치할까 염려되니, 동병(動兵)하는 시기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켜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설혹 장애물을 설치하고 군사를 매복시킨다 하더라도 옛날 사람처럼 척후(斥候)를
멀리 보내어 먼저 적의 동정을 탐지한 뒤 은폐해 놓은 구덩이가 있으면 메우고 전진하며, 나무를 베어 가로막았더라도 선봉이
미리 부군(斧軍)을 예비하여 진격하다가 부군으로 하여금 그 나무를 베어 치워버리고 나가게 하면
거침없이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째, 경숙(經宿)하는 곳에는 지략이 있는 사람을 장수로 정하여 그 진영에 머물러 성책을 설치하게 하고 적의 야습이
우려되는 길목 곳곳마다 군사를 매복시켜야 하겠습니다. 신이 북도에 있을 때 각도의 진보(鎭堡)로 하여금
거마창(拒馬槍)을 다수 분정하여 제작하게 하였는데, 경숙군(經宿軍)으로 하여금 각각 한 개씩 지니게 하여 대군이
경숙하는 5, 6리 거리에 복병으로 깔아 놓은 뒤 적이 침범할 경우 이 복병이 돌기(突起)하여 섬멸케 한다면
적이 침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주둔한 영문 밖 1백 보 지점쯤에 모닥불을 피워 놓아 적으로 하여금 형체를 숨기지 못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네째, 신이 북도에 있을 때 길주(吉州) 이북 아홉 고을의 창고에 피잡곡(皮雜穀)을 제외하고 현존 미두(米豆)가
2만여 석이었는데, 경성(鏡城)·길주(吉州)·명천(明川)의 미두를 경상도로 운반하기 때문에 군량이 떨어질 걱정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현재 유치된 미두 및 민간에 분정한 쌀은 금후 경상도로 운반하지 말고 본도에 유치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유를 이미 장계(狀啓)하였거니와 군량의 족하고 족하지 못한 것은
감사(監司)가 제대로 잘 조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니, 본도에 하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섯째, 소추(小醜)가 날뛰어 변방 백성들이 그 해를 입고 있으니 문죄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의 소굴이 멀고 험란하니 우리 나라의 병력을 10배로 하여 출병에 만전을 기한 연후에야 성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의 일에 대해서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니 성사의 여부는 본도의 감사(監司)나 병사(兵使)에게
하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섯째,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문죄(問罪)한 뒤에 저들이 꼭 앙갚음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무산(茂山)·양영(梁永) 이남의 산보(山堡)에 대한 방비를 더욱 각별히 하여 변고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무산과 양영을 지키지 못할 경우 육진(六鎭) 역시 제대로 보전할 수 없는 형세가 될 것입니다.
망령된 생각을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 사극 징비록의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의 이일의 어리버리한 모습이 아니네요.^^;
북벌이 끝난 후의 일까지 미리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선조는 드디어 북벌을 결심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26일 기사中
북벌 출병에 따른 경중 포수와 외방 무사의 출발 시기를 조정하다
병조에 전교하기를,
“출병(出兵)할 시기가 9월 10일경에 있을 듯한데, 경중(京中)의 포수(砲手)를 8월 보름께 보낸다면 늦지 않겠는가. 외방 무사(武士)를 출발해 보내는 날도 더욱 더디게 되어 그 기한에 대지 못하게 되면 떠나 보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내지 않음으로써 폐단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니, 다시 참작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본조(本曹)에서는 나름대로 당초에 출병 시기가 9월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일(李鎰)의【임진년에 왜적이 상주(尙州)를 침범하였을 때, 이일이 순찰사(巡察使)로 북천(北川)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과 박호(朴箎)는 죽고 혼자만 간신히 빠져나왔다.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 미쳤을 때 이일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채 미리 겁을 집어 먹고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는데 전후 군대를 무너뜨린 것이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 죄를 묻지는 않고 도리어 위급할 때 의지할 만하다고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계사(啓辭)를 보니 출병 시기를 10월 보름께로 물리고자 했으므로 외방에서 뽑아 보내고 왕래하는 기간을 헤아려 그 기일을 조금 물려 잡았던 것인데 지금 성교(聖敎)를 받드니 과연 지완(遲緩)되었다 하겠습니다. 포수는 8월 5일에, 경기(京畿)의 무사는 8월 10일에, 강원(江原)·충청(忠淸)·황해(黃海)는 8월 20일에 출발시키는 한편 각도의 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함경도 초입의 고을에 교부(交付)하도록 화급히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선조는 북벌 시기를 9월10일에 생각하였고, 병조는 이일의 계책대로 10월 중순으로 늦추고,
병력은 한양의 총포수는 8월5일, 경기도의 병사는 8월10일, 강원/충청/황해는 8월20일에 함경도로 출발시키자고 건의합니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사관의 이일 디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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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란 끝난지 얼마 됐다고 북벌이라뇨!!!
이에 당연하게도 병조와 비변사와는 달리 문관들이 주를 이루는 사헌부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22일 기사中
사헌부가 북벌의 중지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24일 기사中
사헌부가 북벌의 중지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25일 기사中
사헌부가 북벌의 중지와 영의정 윤두수의 체차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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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이 우습냐???
그러나 선조는 모든 논의를 중지시키고 북벌을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지요.
조선왕조실록 1599년 7월27일 기사中
비밀 비망기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에게 전교하였다.
“지금 노토(老土)의 부락을 정벌하는 문제와 관련, 나는 본도의 존망이 이 한번의 거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 그 죄를 성토하고 정벌하여 일거에 위엄을 보일 수만 있으면, 그 미개한 야만인들에 대해 집을 불사르고 그 족속들을
사로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우리 나라의 기개를 펴고 저들의 마음을 두려워 떨게 할 것이니,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여 변방 백성이 이로부터 안도감을 갖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차질이 생길 경우, 밖으로는 국위를 손상하고 안으로는 민심을 잃게 되어 도처에서
능모(凌侮)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잡호(雜胡)들이 잇따라 선동하여 누루하치(老乙可赤) 같은 자가 듣는다 하더라도
장차 출병할 마음을 일으킬 것이니, 어떻게 지탱해 내겠는가. 이는 반드시 망하는 길이다.
우리 나라의 형세로 말하면 본도가 불행하게 될 경우 배후에 믿을 곳이 없는데 앞으로 강한 적과 대치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이는 그 형세를 크게 잃는 것이 된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이 거사야말로 중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본도의 방백과 곤수(閫帥)가 필시 형세를 헤아리고 천시(天時)·지리(地利)·인사(人事)를 참작하여 거사하려 하니,
여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의도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정토(征討) 두 글자를 가지고 정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개 싸움에 앞서 조정의 계산에 승산이 있는 일에는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지만,
싸움에 앞서 조정의 계산에 승산이 없는 경우에는 승리를 거두는 예가 적다.
우리 나라 사람은 병기(兵機)를 알지 못하고 본디 지략이 없어 일에 임하면 갈팡질팡하는데 이러고서야 성사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 점을 염려하여 이일에게 물어본 결과 그 말이 이와 같으니 경은 보도록 하라.
논자(論者)들은 또 거사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근사하기는 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만약 토벌하지 않는다면 적은 더욱 능모하는 마음이 생겨 ‘조선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군대를 나눠
번갈아 침입해 도처에서 노략질을 자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장은 조정의 명령을 따르기에 바빠 지쳐버리고 백성은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제풀에 지쳐 망하는 길을 택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의 사세로 볼 때 그만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서 토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듣건대 그 부락의 세력이 강성하고 지세 또한 험준하다고 하니 이 점이 걱정스럽다.
경의 소견이 있거든 하나하나 진술하라. 이일은 북도의 일에 노련한 사람이니 필시 그 형세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일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아 경중(京中) 및 근도(近道)의 군사를 거느리도록 하고
또 싸움에 익숙하고 무용이 있는 군사를 스스로 선택해 데리고 가게 하여 병사(兵使)와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로
진격하도록 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경은 이일을 불러 계책을 묻기도 하면서 충분히 참작, 규획하여 아뢰도록 하고,
정사(呈辭)하였다고 해서 혐의를 두지 말도록 하라.”
선조 : 조선이 우습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