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편에서 본 것처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이하 요리토모)는 다이라씨와의 전쟁을 통해 전국적인 지배 체제를 확립합니다. 그리고 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자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며 막부 정권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성립하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유지하는 큰 원동력은 주종관계였습니다. 막부의 정점이자 모든 사무라이들의 정점에 위치한 쇼군은 고케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이 고케닌들이 쇼군에게 충성하는 제도였습니다. 1185년 요리토모가 다이라씨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을 때 이들 고케닌의 수는 2096명이었습니다.
이 고케닌들은 출신들을 보면 대부분 미나모토씨에게 오랫동안 충성한 일본 동부 지역 무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선조들인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등이 오랫동안 동부 일본에서 무가의 도료(棟梁)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후 그 가문에 충성을 다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미나모토씨가 다이라씨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다이라씨에게 복종하였지만 요리토모의 거병 이후에는 바로 요리토모에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하지만 요리토모는 오랜 유배생활을 했기에 그의 옆에 머물며 오랫동안 충성을 다한 '게닌형(家人型)' 종자들이 없었습니다. 그 휘하에 있던 무사들은 모두 그가 거병을 하자 그의 밑으로 온 자들이었기에 언제든지 그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던 소위 '가례형(家禮型)' 종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협력을 구하던 입장인 요리토모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게닌형 종자로 취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이라씨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고케닌 제도를 정비하면서 이러한 가례형 종자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모든 고케닌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일단 요리토모는 가이(다케다 신겐의 근거지로 유명한 곳이죠)와 시나노, 도토미 등의 분산되어 있던 미나모토 일족들을 규합하였습니다. 같은 일족들의 힘을 강화함으로써 쇼군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일족들도 주종관계에 편입시킬 필요를 느껴 일반 고케닌들에 준하여 일족들을 대우하였습니다.
그리고 막부 창설 이후에도 각 지의 명망 있는 호족들 중 무용이 출중한 자들을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고케닌으로 발탁하고, 기존의 적이었던 다이라씨 소속의 무사들도 받아들여 고케닌으로 편성하였습니다. 이러한 고케닌 제도의 정비를 통해 가마쿠라 막부 체제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무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무인정권을 시작하였지만 일본과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흘러나간 것은 흥미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원래 원래 정식 관료들인 고려의 무인들과 자체적인 무장 세력 등으로 출발한 일본 사무라이의 위치 등이 달랐던 탓이나 고려는 강력한 외세인 몽골의 침략을 받았지만 일본은 여몽원정군의 공격을 제외하면 막부 체제의 근간을 흔들 정도의 대대적인 외세의 침입이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