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바쿠후와 이후 일본 바쿠후 정권의 문을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이하 요리토모)는 다이라씨를 상대로 거병을 시작한 1180년에 미나모토씨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던 사무라이들을 통솔하기 위하여 '사무라이도코로(侍所)'라는 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이라씨와 전쟁을 벌이면서 착실하게 지배권을 넓히기 시작하였습니다. 1183년에는 고시라카와 법황과 교섭하여 일본 동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였으며, 1184년에는 행정기관인 '구몬조(公文所)'와 재판과 소송을 담당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법부의 역할인 '몬추조(問注所)'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러한 기관들을 착실히 만들어나가면서 요리토모는 바쿠후 정권을 열 기반을 닦아나갔습니다.
한편 고시라카와 법황은 이렇게 세력을 넓혀나가는 요리토모에 불안감을 느끼고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지금도 일본에서 비극적인 영웅의 대명사로 유명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움직여 요리토모를 제거하려 들었습니다. 요시쓰네의 본심이 어땠던 간에 요리토모는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1185년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시라카와 법황을 협박하여 요시쓰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의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 경작지 1반(反) 당 5되의 군량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습니다. 이로써 요리토모는 전국 각지의 치안권과 토지 관리권을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요리토모는 전국 각지에 슈고를 두었습니다. 이 슈고들은 관할 지역의 '고케닌(御家人)'을 통솔하면서 요리토모의 명령에 따라 군사권과 치안권을 장악하고, 반역자와 살인자를 단속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였습니다. 슈고는 각 지역마다 한 명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주로 요리토모의 근거지인 동부 일본의 고케닌들이 슈고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위는 세습되었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교토의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고쿠시(國司)'가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는데 비록 중앙에서 파견한 고쿠시가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라고는 하나 실제 지방행정의 업무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슈고들은 이러한 지방행정 실무자인 호족들에게 명령권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바쿠후 지배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슈고와 지토의 지방 지배력이 강화됨은 바쿠후 정권이 일본 전지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