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한반도에 있는 송나라 휘종의 유적지
게시물ID : history_218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3
조회수 : 465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7/03 20:39:32
 
중국인들이 중국사에서 치욕스런 순간을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정강의 변.
 
북송이 멸망한 사건으로 유명하지만 이후 끌려간 두 황제의 운명이 더욱 비극적이죠
 
 
금나라가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북송을 멸망시켰을 때
 
송나라 휘종, 흠종 두황제와 휘종의 정황후 , 흠종의 주황후 모두 포로가 되었으며
 
휘종의 자식들 34명의 왕자들과 31명의 공주 중 남송으로 도망간 9황자 조구와 요절한 자식을 빼고
 
모두 포로가 되어 함께 끌려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황족들과 함께 황제의 친인척 왕비 24명 공주 22명 비빈 83명 종희 52명 사대부집 귀부인 3300명 등에
 
여인만 11635명 , 학자, 기술자 예술가 등 4천명이 끌려갔다고 합니다.
 
끌려가는 여정의 비참함이 어느정도 였는지
 
금나라 장군 택리는 흠종의 황후 주씨에게 술시중을 강요하였고
 
고분고분 하지 않다는 이유로 주황후를 폭행하다 이를 말리는 흠종마저 죽일 뻔 했으니
 
나머지 후궁과 비빈들이 어떤 모욕을 당했을지 상상되죠...
 
주황후는 폭행의 후유증, 추위와 배고픔으로 병을 얻어 누웠고
 
흠종이 눈물 흘리며 제발 치료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거절당하고 끝내 숨졌습니다
 
그 후 주황후의 시신은 멍석으로 대충 말아 버려졌습니다.
 
1127년 8월 포로들은 금나라 경사회령부로 옮겨져 금나라 종묘에 포로 봉헌의식에 바쳐졌는데
 
이른바 견양례라는 것으로 황제와 황후 황족들 모두 양가죽을 걸치고 한 발자국에 한번 씩
 
머리를 땅에 굽혀 절을 하며 태조 아골타의 능을 세바퀴 돌았습니다.
 
다음날 금태종은 휘종에게 혼덕공(정신이 혼미한자) 흠종에게 중혼후(정신의 혼미함이 중한자) 라 봉하고
 
휘종과 흠종의 황후 이하 모든 비빈, 공주, 황실의 여인들은 모두
 
상의를 벗기고 양가죽만 걸치게 하여 세의원(기생)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했습니다.
 
휘종과 흠종 그리고 황후 는 오국성으로 최종적으로 이주 시켰는데
 
금나라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1500경의 땅만 주었죠
 
휘종, 흠종은 살아남기 위해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목숨을 연명하였고
 
고된 노동과 추위, 배고품으로 고생하다. 오국성에서 정황후가 먼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어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 휘종은 3년 뒤 실명을 하게 되었고
 
폐인 처럼 살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흠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고국으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장장 21년을 죽어라 고생하며 꿋꿋히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흠종의 간절한 바램과 달리 남쪽에서 건국한 남송의 황제 조구는
 
적자계승 원칙에따라 황위 계승에 혼선이 생길것을 우려하여 흠종을 송환시킬 의지조차 없었죠
 
1156년 금나라가 남송을 재차 정벌한 계획을 세우자
 
금나라 해릉양왕은 병마를 검열한다며 흠종을 불러워 세운 뒤 
 
흠종을 화살 받이 과녁삼아 사격을 해 죽이고
 
그의 시체를 진흙속에 말로 밟아 짖이겨 버립니다.
 
한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명필이자 예술가로 알려진 휘종, 그의 아들 흠종 두 황제는
(참고로 고려에 사신으로 서긍을 보내 유명한 고려도경을 만들게 한 이가 바로 송나라 휘종입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물론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나머지 황족, 후궁, 왕비, 공주들은 더욱 비참했겠죠.
 
 
송나라 최후의 두 황제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장소인 오국성이
 
바로 한반도의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운두산성입니다.
 

* 택리지. (운두산성)


숙종 정유년에 강희 황제(康熙皇帝)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백두산에 올라가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게 했다. 이때 목극등은 두만강을 따라 회령(會寧) 운두산성(雲頭山城)에 왔다가 성 밖의 큰 언덕에 여러 무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어느 황제의 능이라고 했다. 목극등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파 보게 했더니 무덤 곁에서 단갈(短碣)이 나왔다. 비석에 ‘송제지묘(宋帝之墓)’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봉분을 도로 크게 쌓게 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금나라 사람이 말하던 오국성(五國城)이란 것이 곧 운두산성이란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송제(宋帝)라고만 했기 때문에, 이 무덤이 송나라 휘종(徽宗)의 무덤인지 흠종(欽宗)의 무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운두산성은 동해와 거리가 겨우 2백여 리여서 고려하고는 바닷길로 매우 가깝다. 또 고려의 전라도와 중국의 항주(杭州)사이에는 좁은 바다가 있어서 순풍을 만나면 배로 7일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니, 만일 송나라 고종(高宗)이 은밀히 고려를 후하게 대접하고 고려를 시켜 동해에 배를 띄워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운두산성을 습격해서 휘종·흠종과 형후(邢后)를 잡아 바닷길로 고려 땅에 데려왔다가 전라도에서 다시 배에 태워 항주로 갔더라면 천하에 둘도 없는 괴상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고종은 아비를 걱정하기는커녕 서호(西湖)에서 놀기에만 골몰했다. 그 불효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니, 천고에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고종은 죽은 지 백 년이 못 되어 도둑 중에게 무덤이 파헤쳐지는 화를 당했고 휘종은 비록 타향에서 죽어 묻혔건만 지금까지 무덤이 보존되어 있으니, 돌고 도는 하늘의 이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지방 사람들이 언덕 위에서 밭을 갈다가 이따금 옛 제기(祭器)와 술항아리·솥·화로 같은 것들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선화릉(宣化陵)인 것 같고, 그 나머지는 궁인(宮人)과 임금을 모시던 관원들의 무덤인 것 같다. 또 지방민들은 두만강 북쪽 십여 리쯤되는 곳에 황제의 능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흠종의 능 같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
 
  
조선시대 이중환이 회령에서 발견한 송제지묘의 주인은 송나라 황제 휘종의 능으로 이후 휘종의 시신이 남송에 반환되어 능만 전해지게 됩니다.
 
흠종의 능은 택리지에서 말하는 두만강 북쪽 십여리에 있다는 능입니다.  
 
흥미로운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오국성이 고려와 이토록 가까운데(지금은 한반도 내의 우리영토이니.)
 
두 황제가 저토록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남송의 고종은 고려에 단 한번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음을 들어 불효자라 비난하는 대목이 아닌가합니다.
 
산성이_자리잡은_운두산.jpg
동쪽성벽.jpg
 
data2_20130705_171245_3.jpg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