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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
게시물ID : history_218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킬라칸
추천 : 1
조회수 : 62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7/03 01: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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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그 지배를 확대하던 시기에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계에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결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계사에 유례가 드문 긴 역사와 개성 있는 문화를 가꾸어 온 민족이었기에, 더구나 그 지배자가 전통시대에 우리가 선진문화를 전해 주곤 했던 일본이기에 모멸감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역사적·문화적 전통의 온축에 기초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일제와 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근대문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 나갔다.
 
 조선사회는 이미 그 후기부터 전근대적 사회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세도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노력이 열매를 거두지 못한 채 개항을 당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강제적으로, 또 그 최하단에 예속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이후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조선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주적으로 근대문명을 섭취하고자 노력했다. 개화파 계열이나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 또는 농민층의 갑오농민저쟁에서 보듯이 조선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전근대적 질서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근대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근대화에 성공하고 서구 열강의 방조를 등에 업은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한국사회는 급속하게 '근대화'되었다. 한반도를 영원히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 당장에는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제가 조선을 자본주의적으로 재편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메이지 유신을 수행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끼게 되었던바, 다시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을 재편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에는 전근대적 제도를 대신하여 근대적인 제도가 자리 잡게 되었다. 관료제는 한층 합리화·체계화되었으며,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도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철도와 도로가 부설되고 통신망이 갖추어져 상품과 정보의 유통은 더 신속하고 원활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과학적 합리성, 효율성이 크게 향상됨으로써 물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근대문명의 한 측면이 자리 잡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제 시기 도입된 이러한 근대적 질서가 현재도 분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문명의 또 하나의 측면인 '인간의 해방'은 내세울 만한 진전이 없었다. 그 자신이 천황제라고 하는 전근대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고, 철저히 민족차별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질의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다만 식민지민에 대한 수탈과 억압의 효율화를 의미할 뿐이었다. "조선 사람은 조선 문명의 종이다"라는 당시 한 신문기사 제목은 식민지 아래 문명화가 한국인에게 무슨 의미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싫든 좋든 일제가 이 땅에 이식한 근대적 질서 속에 살면서 이에 적응하고 이를 통해 근대를 경험하고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제에 저항하든 아니면 그에 순응하면서 살든 마찬가지였다. '일본적 근대'는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마치 공기 같은 것으로서 매일 숨 쉬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이와 같이 일제가 이식한 질서 속에서 근대를 경험했고, 그 근대를 내면화했다. 
 
 일제는 이러한 근대를 앞세워 자신의 지배를 '문명화'로 합리화하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식민지배의 목적에 맞추어 '정리'했지만 오랜 문화적 기반을 가진 한국인들이 이에 설득당하지만은 않았다. 1930년대 우리 것을 우리 힘으로 알자는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 정인보·안재홍 등은 조선학운동을 벌여 조선 후기의 정약용을 재발굴하여 실학의 개혁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는데, 이는 전통을 정당하게 인식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또 한글학회도 일본어를 국어로 삼아 한글을 방언 취급하고, 각 학교에서도 일본어가 주로 교수되는 등 온갖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글을 지키고 체계화하는데 노력했다. 이 밖에 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문체를 개발하여 민족적 감수성을 표현하고 현실을 그려 내는 노력을 통해 근대적 문학을 창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지배 아래 한국인들이 전반적으로 역사적 객체로서, 역사 운영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에서 근대 민족국가를 이루어 그 구성원 간에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대등한 시민으로서 근대적 인간관계를 이루어가는 경험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근대사회를 이루고 꾸려 가는 능력을 키워 나갈 기회를 상실했다고 하겠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나쁜 유산일것이다. 
 
권태억(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인의 대응〉, 《한국사특강》




이게 식근론에 대한 주류학계의 인식인가요??
출처 http://cafe.daum.net/Europa/3L0P/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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