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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암군에 대한 변명? (진 호해 ,한 영제, 촉 유선, 진 혜제)
게시물ID : history_218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1
조회수 : 177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7/03 01:20:56
 
중국사를 보거나 한국사를 보면
 
역사상 막장의 암군들이 정말 암군이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맘대로 쓴 가상의 견해이지만 혹시 이런게 아니였을까요?
 
 
 
 
* 주의 이어지는 내용은 90% 확률 유사역사입니다. 믿지 마세요 ㅜㅜ
 
 
1. 진나라 2세황제 -호해
 
유사이래 중국전토를 최초로 통일 한 진시황
 
그의 급격한 죽음으로 평범하지만 분수를 알았던 착한 아들 호해가 즉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치세를 옆에서 지켜보고 전국을 유랑할 때 조차 따라다니 던 효자 호해를 두고
 
진시황을 깊이 존경하였고 아들의 효심을 알았던 진시황은
 
멍청하게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그저 후덕하고 덕망있단 식의 아첨을 듣기 좋아했던 불안한 태자가 아닌
 
자신의 제국을 이어나갈 후계자로 호해를 지목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호해는 2세 황제가 되어 선황이 2세 3세 유지를 이어가길 바랬듯
 
그가 한 일은 진시황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 것 뿐입니다
 
자신의 분수를 알았기에 새로운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리한 개혁정책을 진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선황이 진행한 공사만 무사히 마치길 바랬을 뿐이죠
 
자신의 자질이 없음을 알기에 선황의 유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국정 운영 경험이 많았던 조고와 이사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보좌토록했습니다
 
춘추 전국시대를 통털어 군주가 유능한 신하에게 국정을 위임한 경우는 많았습니다
 
전국 4군자의 사례를 보듯 이들은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 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기폭제였죠
 
더불어 재상이 너무 권력이 집중된다 싶으면 상앙처럼 제거함으로써
 
군주의 위엄을 함께 세울수도 있기에 좋은 정치기술이기도 했으니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호해 역시 전례의 교훈을 빌어 최측근인 조고를 통해 재상 이사를 숙청했죠  
 
하지만 그토록 신처럼 믿었던 아버지 진시황의 실책이 있었다면
 
6국을 멸하며 자비를 베풀었기에 6국시절 부와 권력을 누리던 기억을 지닌
 
탐욕스런 왕공귀족들이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고 호해의 치세에도 건제하였고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며 진행하였던 무리한 병농일체의 군국주의 정책을
 
전국적으로 적용하였기에 아직 중앙집권적 통치에 익숙하지 않았던 천하의 백성은
 
이런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연한 이치로 카리스마 넘치는 진시황이 죽자 곧 반란이 일어났을 뿐이죠.
 
정상적인 경우 반란은 금세 진압되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나왔어야 하지만
 
이는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제 도입초기였음으로
 
전국적이고 즉각적인 진압이 불가능 하였고 과거 관중만 방위하던
 
강성한 진나라 병력은 집중되지 못하고 중국 각지에 분산되어 각개격파를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진나라 건국 이래 최초로 관중이 침범될 위기에 처하자 전례가 없던 위기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고 반란군이 관중을 약탈하며 한을 건국 한 이후
 
후대 권력을 잡은 이들이 조고와 호해를 음해하여 역사에 암군과 간신으로 기록하였습니다.
 
 
2. 후한 영제 - 유굉
 
유방이 천하를 통일 한 이래 무제의 치세를 거치며 번국도 폐지하면서
 
한나라는 비로소 중앙집권적인 국가 운영을 시작하였으나
 
농사기법의 발달과 경작지의 확대 그리고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지방의 유력 호족의 성장이라는 또 다른 사회문제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100년의 평화기를 거치며 일부 소수의 계층이 사적 토지소유를 확대하며 장원을 구성하였고
 
이들은 이른바 호족이 되어 지역 토지를 기반으로 권세를 지니게 되었죠
 
황제를 중심으로 균등하게 유지되어야 할 제국은
 
빈부격차와 계층간의 갈등으로 불만이 쌓이며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유능한 행정가였던 신나라 왕망은 이런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자 고민한 끝에
 
이러한 개혁은 온건한 개혁으로는 해결이 결코 불가능함을 깨닫고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기로 결심하여 신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이어 새왕조의 개창 이유였던 급격한 개혁을 실시합니다
 
통화의 개혁. 주나라 정전제의 부활과 같은 토지의 개혁 등
 
사실상 호족의 토지를 재분배하여 늘어난 백성들을 부양하고자 한 이러한 개혁은   
 
오늘날 공산주의식 개혁이 큰 반발을 샀던 것과 같은 이치로
 
호족들의 반발을 샀고 보수적인 호족들은 광무제를 추대하여
 
왕망을 몰아냄으로써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건국한 후한은 사실상 과거 황제권의 강력함을 기대할 수 없는
 
유력 호족기반의 위임정치에 불과한 정치만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후한의 황제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력 호족들에게
 
협력을 구하며 통치를 이어나갔습니다.
 
대표적인 정책이 유력 호족 가문을 외척으로 기용해 하는 외척정치죠
 
하지만 호족들은 황제가 정치를 하도록 놔둘수 없기에
 
황제가 장성하기 전 구궁궁궐에서 독살하기 일 수 였고
 
어린황제를 통해 호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 하게되는 시련도 겪습니다
 
겨우 겨우 황제가 장성해 성인이 되게 되었을 때 그가 살아남기위해
 
할수 있는 방편은 견제세력을 만드는 것 뿐이죠. 가장 측근인 환관입니다.  
 
황제는 황후도 외척도 믿을 수 없기에 유일한 근위세력인 환관에게
 
이들을 견제하도록 하여 국정의 균형을 잡았고 이는 장장 100년을
 
후한의 유씨왕조가 버티게 하는 힘이였습니다
 
후한 영제 치세 100년간 그러했듯 환관과 외척의 균형에서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외척을 유력 호족이 아닌 미천한 가문인
 
하씨를 기용하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이는 이미 신나라때 부터 폐단이 나타난 지방의 빈부격차를 해소하지 못한 이유인
 
호족세력의 견제를 시도한 것으로 외척을 통한 호족 견제라는 국정운영이란 첫 개혁 시도였으나
 
이미 오랜시간 쌓인 폐단은 갑작스런 기후이변과 더불어 민중들의 황건적 난으로 촉발되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유력 호족들의 힘이 필요하게 된 황제는
 
눈물을 머금으며 주목이란 직위를 만들어 호족들에게 군권을 위임하며 황건적의 진압을 위임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하진을 중심으로 호족들이 다시 뭉치며 황제권을 위협하게 되는 것은 견제하지 못한채 한스럽게 눈을 감았고
 
하진을 비롯한 호족들은 대표적인 사세삼공 즉 원소같은 세력들이
 
황제의 마지막 근위세력인 환관들을 잔인하게 숙청하며
 
황제권과 위엄을 땅바닦에 떨어뜨리게 합니다
 
결국 군웅할거로 본색을 드러낸 호족들은 스스로 권력자가 되어
 
황제를 허수아비로 가지고 놀다 후한은 멸망하게 됩니다
 
위진 시절을 거치며 호족들은 문벌 귀족이 되었고 스스로 역사를 만들며
 
이들을 환관에 둘러쌓인 암군과 십상시라 기록하였죠
 
 
 
3. 촉한의 후주 - 유선
 
유선은 아버지 유선 처럼 난세 속 종횡 무진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웅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능한 정치가이자 타고난 총명함을 바탕으로
 
촉나라를 운영하여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촉나라에 토속 세력과 아버지 유비가 끌고 온 서주, 형주세력간의 정치 균형을
 
잘 이끌어 나갔고 이런 정치에 적임자인 제갈량을 신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갑작스런 사후 소수파로 전락할 상황인 형주세력
 
장완 비위 동윤 강유 등을 국정에 중심에 세우며 균형을 유지했고
 
타지에서 들어온 형주파가 곧 황제권을 의미하고 촉나라 땅에서
 
유씨 황제권이 유지될 수 있는 뿌리는 곧 한조의 부흥이란 명분에 있음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한시도 북벌을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관도대전 이후 사실상 중원의 국력은 위나라가 패권을 잡았죠
 
한의 9개 주 중에 6개 주를 석권한 위나라에 비해
 
1개 주의 촉나라 2개 주의 오나라는 이미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초기 전란의 시기 인구가 촉땅, 형주, 강남으로 피난을 하며
 
잠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1세대가 지나며 다시 국가를 정비하고 호구를 증가 시킨
 
대국인 위나라의 공세에 물리적인 국력차로 결국 약소국인 촉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총기를 잃지 않았던 유선은 한나라가 망한 지금
 
400년을 황족으로 이어왔던 유씨 일족이 자신으로 인해 멸족을 당하게 되면 안됨 알았기에
 
국가는 잃었지만 가문을 지키고자 꾀를 내었고
 
의심 많고 잔인한 사마소 앞에서 이런 메소드 연기도 해냅니다
 
사마소 : 당신은 촉의 황제요. 촉을 세운 유비(劉備)의 아들이니라, 그런데 촉이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슬프지 아니합니까?
유선 : 즐기느라 촉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樂不思蜀)
사마소 : (웃으며)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로 촉이 그립지 않습니까?
유선 : (그제서야 장소의 간언을 들으며) 그립습니다. 선주의 무덤이 있는 서쪽만 봐도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사마소 : (신하의 간언을 듣고 말한 후주를 눈치채고) 누가 이야기 해주었소?
유선 : 신하가 얘기 해주었습니다.
 
마치 사마소의 아버지 사마의가 치매를 연기하여 조상의 의심에서 벗어난 고사처럼
 
유선도 바보 연기를 하여 사마소의 의심에서 벗어났고
 
유씨 가문을 보전하여 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잃고 그럼에도 유씨의 제사를 이어가고자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내 할 수 밖게 없었던
 
너무 싫지만 그럼에도 눈물 속에 살아남아야만 했던 비운의 군주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렇게 단순히 유선이 멍청한 군주였다고
 
유선 그가 원한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4.  진나라 혜제 - 사마충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태생 자체가 문벌귀족인 사마씨가 건국하였고
 
문벌 귀족들이 위나라의 멸망 처럼 황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창건한 왕조였습니다.
 
총명한 황제 사마염은 그의 사후에 혹시 있을지 모를 제 2의 조씨, 사마씨 같은 재상을
 
견제하고자 사마씨들을 번국의 왕으로 세워 황실을 돕게하였죠
 
전국을 통일한 영민한 군주 사마염은 더불어 중앙에서 양씨, 가씨, 왕씨와 같은
 
문벌 귀족이 황권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걱정에
 
유력 가문인 가씨의 가남풍과 태자를 혼인시켰고 가씨 일가의 충성심에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태자를 시험 시킨다며 문제를 냈을 때 가남풍이 답안을 유출해 태자를 돕는 충심을 확인하고
 
태자에게 보위를 이어가게 허락합니다.
 
사실 사마충은 평범한 태자였지만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으로 대표되는
 
사마씨의 영민함을 조금은 이어 받았기에 이런 고사를 남기기도 합니다.
 
 
황제는 화림원에 있었을 때, 청개구리가 울자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 이놈들은 공적으로 우는 것이냐, 사적으로 우는 것이냐? (此鳴者,爲官乎?爲私乎?) ”

어떤 이가 대답했다.
“ 국유지에 있는 것들은 공적으로 울고, 사유지에 있는 것들은 사적으로 웁니다. ”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탐하여 공적인 행위와 사적인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치와 방종 속에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지켜본 혜제는
 
"개구리 조차 공과 사를 구분 할 줄 아는데 국가의 녹을 먹는 신하들은 이를 왜 구분 못하는가?"
 
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신하들이 깨우길 바랬습니다   
 
 
이는 이런 경고를 문벌귀족들에게 할 정도로 패기를 보였음이 증명합니다.
 

또 천하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으니, 황제가 말하였다.
“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 (何不食肉糜?)
 
 
삼국통일 후 진나라 시절은 문벌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하던 상황으로
 
승상 하증은 밥 한끼에 1만전을 사용하였으며
 
양씨 일족인 양수는 술항아리를 데울 때 사람의 품으로 데우게 하였고
 
왕씨 일족인 왕개가 돼지를 사람 젖을 먹여 키워 잡아 먹는 등
 
석숭 왕개와 같이 극단적인 사치를 부리는 문벌귀족들의 행태가
 
민중들의 불만을 야기 시키며 폐단으로 나타나던 시절입니다.  
 
국가의 국정을 운영하는 신하들이 죄다 극에 달하는 사치를 일삼으며 부패한 조정에서
 
그들 문벌귀족인 사치스런 신하가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라고 지쩔였을 때
 
태자는 단호하게 "백성들은 왜? 너희들 처럼 고기죽을 먹지 못하는것이냐!!" 
 
질문자의 양심을 찌르는 호통을 칩니다.
 
 
사마충은 비교적 평범한 군주로 정략에는 서툴렀지만 가남풍은 영민한 황후로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문벌귀족의 견제가 필요함을 절감하였고
 
문벌 귀족들에 대한 견제는 충실한 부인 가남풍의 내조로
 
진혜제가 즉위하였을 때 시작하게 됩니다.
 
황제권을 우습게 알며 전횡을 일삼는 양씨 일가를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다시 황권을 위협한 여남왕 사마량을 초왕 사마위로 제거하고
 
사마위 또한 제거하는 정략으로 황제권을 강화하고 수호하고자 했습니다.
 
진나라 사마염 조차 하지 못한
 
문벌귀족의 견제와 황권 강화를 사마충이 가남풍의 도움으로 달성 하는가 했지만
 
비극적으로 조왕 사마륜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마충의 충직한 부인
 
황후 가남풍을 살해 함으로써 사마충의 국정개혁은 물거품이 되게 됩니다.
 
이어 황후 가남풍의 견제로 숨죽이던 각지의 사마씨 왕들은 이후 각지에서
 
봉기하여 상호간 전쟁을 일삼았고 진나라는 내란이 발생합니다.  
 
 
팔왕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역으로 충직한 황후가 시해 당하며
 
권력을 탐하는 왕들이 황제를 좌지우지 하던 비극속에서
 
사마충은 이러 일화를 남기죠
 
황제를 보호하려던 혜소가 죽으며 황제의 옷에 그의 피가 뭍습니다
 
이후 황제를 끌고가며 피 뭍은 옷을 씻기려하자
 
" 옷의 피를 닦지 마라 혜시중의 피다. " 충신의 죽음에 눈물 겨운 한마디를 남깁니다
 
 
이후 황제권을 수호할 황후도 충신도 모두 죽고 개혁이 무산된 안타까움에 괴로워 하다
 
황제 사마충의 능력을 이미 알고 그가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동해왕 사마월에게 독살을 당하며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였고
 
사마충은 한나라 경제의 전례를 따라 중앙의 문벌귀족과 지방의 번왕들을 견제하고 숙청하여
 
황제권을 한나라 무제 시절의 수준으로 다시 강화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개혁의 동반자인 황후의 죽음과 사마씨 번왕들에게 황제는 패배하여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진나라도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한나라 시절 오초 7국의 난 때 한 경제는 이를 진압하였고 그의 아들 한 무제는
 
북방의 흉노를 정벌하여 통일제국의 위세를 주변에 알렸으나
 
진나라 시절 팔왕의 난은 혜제가 진압에 실패 하였고
 
황제권 강화에 실패한 진나라는 북방의 이민족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한나라 경제가 오초 7국의 난 때 실패하였다면 문경의 치지가 아니라
 
망국의 군주이자 멍청한 황제로 남았을 듯이
 
진나라 혜제도 8왕의 난에 실패 함으로써
 
망국의 군주이자 멍청한 왕으로 후대 역사가들이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
 
진혜제 이후 남북조 시절에 기록상으로만 보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진성 막장 황제들이 즉위하게 되는데
 
사실 그 시절의 황제들이야 말로 중국역사상 황제권이 가장 미약한 시절의 황제들 입니다.
 
가장 황권이 미약한 시기에 가장 막장인 황제들이 즉위한다는 아이러니죠
 
 
쓰다 보니 엄청 길어지네요 걍 잡설이고
 
중국왕조의 역대 사서는 후대에 작성이 되고 또한 신하들이 쓴다는 것을 전제로
 
상상력을 가미한 근거가 없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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