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관군의 동향에 대한연구를 살펴보면,
개전 초기 조선군의 대응과 동원체제는 적절히 작동하였으나 전술적 취약성으로 인해 패배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개전 초기 경상도 지역에서의 군사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통해 재확인되고 있다.
일본군 주력의 침공 경로로 이용되었던 대구진은 부사를 비롯하여 청도군수와 경산 현령,인동 현감,현풍 현감,영산 현감 등도 일본군의 침입에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 중 현풍 현감은 근왕군으로 종군하다가 병사하였고,영산 현감은 전사하였다.
경상 좌수영의 경우 칠포 만호와 축산포 만호등도 각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경상좌병영의 장수들은 지휘부가 와해되었음에도 각자의 책임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던 반면,
지방관들이 이탈한 지역에서는 전직 군관이나士族 등이 이들을 대신하여 의병을 일으키면서 적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이때 권응수 등이 지휘하였던 의병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농민과 향촌민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달리
주로 낙오된 관군 출신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경상도 지역 전역에는 다수의 낙오된 군병이 거주하는 각 군현 주변의 산간 계곡 사이에 흩어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A 훈련봉사 권응수가 군사를 일으켜 賊(일본군)을 토벌하였는데,그의 관할하에 응모한 자들은 모두 한때 무사들로서 영천에 사는 정대임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니,사로잡거나 참한 자가 자못 많았다.
B 영천군에 가까운 면의 군인 100여명이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모였거늘 같은군에 거주하는 의병장 정대임이 병사를 모아 거듭하여 서로 통하였습니다.
C 영천 복병장 정대임과 하양 신해와 의흥 복병장 홍천뢰와 경주 임내와 자인현 복병장 등이 있는 곳에 군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군졸들이 지휘체계의 붕괴에 따라 흩어져 있었고,이는 의병 부대의 급격한 증강과 관군의 재편을 가능하도록 하는 배경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중 최초로 기병한 경상우도의 곽재우 의병 부대도 전쟁 초기 각지에 방황하고 있었던 捕將,散卒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여 전투 병력화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이처럼 경상좌도 의병 부대는 전쟁 초기 관군 지휘부가 와해되면서 일부 지방관이나 장수들이 도망쳤을 때 정대임·정세아 등 지방 유력 사족 등을 중심으로 한시적으로 흩어져 있던 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군사 지휘경험을 가진 군관 권응수의 지휘하에 연합하여전투를 수행한 변형된 형태의 準官軍的인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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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초기에도 언급되는데 그간 의병중심으로만 연구가 이루어지고, 관군의 활동이나 내역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탓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임란초기 관군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된지는 그리 오래돼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