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칸의 죽음몽고군이 다시 들어와 깽판을 치면서 북부지방에서는 피난 행렬이 계속됐습니다. 요행히 피한 이들도 있었고, 산성에 숨어 있다가 진격로 상에 있었다는 이유로 철저히 파괴된 곳도 있었죠. 이는 몽고군이 다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아모간은 어디까지나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었고, 고려 조정에서도 이를 알았든 몰랐든 이들이 다시 올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죠. 이런 가운데서 돋보였던 것이 바로 뒤에까지 중간 보직으로 -_-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김방경입니다. 그는 위도라는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에 백성들을 모은 후 둑을 세웁니다. 이걸로 강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아 농사를 지었고, 섬에 우물이 없어 육지로 물을 구하러 갔던 백성들이 잡히는 일이 생기자 비를 저장하는 못을 만들죠. 처음에는 피난 와서 이런 데 투입돼 괴로워 했던 이들은 가을에 풍년이 들어서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화려한 무공은 아니었지만, 참 볼 만 했던 첫 출현이었죠.그 해 10월, 아모간은 다시 병력을 황해도 일대에 투사합니다. 압록강도 필요 없었습니다. 청천강 북쪽이 전진기지가 됐으니까요. 그 수는 약 40여기, 수달을 잡는다는 핑계를 댔지만 정찰 혹은 무력 시위라는 건 다들 알 수 있었습니다. 최이(최우)는 차례를 정해 개경에 보냈던 양반들을 다시 강화도로 불러들입니다.+) 양반이라고 적은 건 조선의 시각이니 대충 상류층이라 생각하면 될 겁니다. 몽고는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괜히 자기들 힘 뺄 필요 없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만 어느 정도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 행보는 거기서 끊겨 버립니다. 구유크 칸이 죽어 버렸거든요.
칭기즈 칸으로부터 시작된 몽고 제국의 칸들 중에 유독 평가가 나빴던 구유크 칸, 재위기간도 그만큼 짧아서 인지도도 바닥이죠. 이후 칭기즈 칸의 셋쩨 아들 오고타이 칸 계열은 이후 몰락했고,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 계열의 약진이 시작됩니다. 바투도 구유크 칸에 맞서 몽케를 밀었고, 그가 자객을 보내 구유크 칸을 죽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구유크 칸이 살아 있었다면 아모간의 작전은 계속됐을 겁니다. 그 신중함 만큼이나 어떤 성과를 올렸을 수도 있죠. 하지만 해군의 뒷받침이 없는 이상 아무리 잘 한대봐야 결정적인 성과를 세우는 건 무리였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나 마냥 고민만 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죠. 신중함이 아니라 무능함일 수도 있구요.
그 때문인지 구유크 칸이 죽어서 후퇴했다는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원사에서는 이를 "이기지 못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건 이전은 물론 앞으로도 없었던 기록이죠. 물론 그렇다고 졌다고 하진 않았지만요.
아무튼, 고려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아주 약간의 시간을 다시 벌게 됩니다.
2. 최우의 죽음
그 동안에도 사신은 계속 오갔습니다. 고종의 입조를 요구하는 것이었죠. 고려에서는 이번에도 철수하면 입조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모간도 본국의 사정 때문에 믿을 수 없으면서도 이걸로 합의 보고 갔구요.
하지만 구유크 칸이 죽은 걸 알게 된 최이(최우)는 다시 강화를 무시하게 됩니다. 대신 그는 3대 세습을 확실히 하는 데에만 매달렸죠. 자기 몸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최이가 눈여겨보던 이는 환속시킨 최항과 외손자로 역시 죄를 지어 중이 됐다가 다시 환속시킨 김미였습니다. 몽고군이 돌아갔음을 알게 된 최항은 김미를 죽이려 했죠. 이에 김미는 어마어마한 백을 소환하니, 자기 백부였던 귀주성의 영웅 김경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우직한 무자이었을 뿐이었던 것인지, 반대로 정치적인 감각도 뛰어났던 것인지 김경손은 도움을 거부하고 오히려 최이에게 이를 고발합니다. 이에 최이는 김미를 지지했던 장수들을 고문한 후 강에 던져 죽이고, 나머지는 귀양보내거나 내쫓아 버립니다. 그 수가 40여 명이었다고 하죠. 김미 자신도 고란도로 귀양 갑니다.
이렇게 최이의 후계는 최항 독주 체제가 되었죠. 아직 몽고에서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칸의 부재가 몽고에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 최이와 최항의 권력 승계는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됐죠. 가을에 동주(강원도 철원)에 여진병이 들어오자 해당 방면의 병력들이 격퇴한 일도 있습니다.
+) 몽고와 싸우다 보니 여진은 이제 껌으로 보인 듯 -_-;
그 해 11월, 최이는 죽습니다. 몽고의 1차부터 4차까지의 침공을 모두 (겉으로는) 막아 냈던 그, 구국의 영웅이라 칭송받아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만 그 공은 절대로 그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강화도로 들어간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하더라도 그 전후의 모습은 그 선조조차도 명군으로 보이게 할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그나마 그가 있어 고려가 돌아갔습니다. 그의 후계는 그보다도 정통성과 경험이 없었죠. 선조에 이어 인조가 명군으로 보일 상황이 닥쳐 옵니다. 이러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국부로 보일 지경입니다.
최이가 죽자 도방의 모든 관리와 장수, 병력들은 최항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동서북면 병마사를 모두 겸하며 나라의 모든 권리를 휘어잡았죠.
최이가 죽은 지 2일 후, 최항은 상복을 벗습니다. 그가 달려간 곳은 최이의 애첩들이 있던 곳, 그의 치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3. 대 세습은 피와 함께
이렇게 정권을 이어 받은 최항은 곧바로 숙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이 없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가 첫 타겟으로 삼은 이는 김경손과 민희였습니다.
김경손은 단 열두기로 몽고군을 무찔렀고, 반란군조차도 그를 존경했으며, 최우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 했던 살아 있는 전설이었습니다. 한편 민희는 전공은 그리 크지 않지만 화친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맡았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북계에 파견돼서 복구를 담당했던 이였죠. 이유야 단 하나였죠. 워낙에 잘났으니까요. 이 때 김경손은 백령도로 귀양 갔고, 민희는 이후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외에 자기 자리를 위협할 만한 이들은 모두 숙청했는데 최우의 양자 최환부터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 등 3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고종은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오히려 그를 정승의 반열에 올리며 권리만 굳건히 해 줬죠.
그 다음에는 좀 볼만한 일들을 벌입니다. 여러 세금을 면제하고, 자기 쌀을 베풀어 줬죠. 나름대로 인심을 수습하려 한 것입니다. 최충헌도, 최우도 했던 방법이었죠. 그리고 그들이 그랬듯, 본색도 곧바로 드러납니다.
"최항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거느리고 장봉택으로부터 말을 달려 견자산의 진양부로 가는데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편의 작은 지게문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사람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최충헌과 최우에게는 그래도 사람을 부리는 재주는 있었습니다. 최충헌은 문신들과도 손을 잡으며 상황을 그나마 정상으로 되돌렸고, 최우도 반란은 다 때려잡으면서 큰 숙청은 하지 않았죠. 하지만 최항에게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최충헌은 자기 힘으로 그 자리에 올랐고, 최우는 최충헌이 죽기 전에 이미 요직에 올라와 있었죠. 반면 최항은 뜬금 없이 나타났고, 능력도 확실하지 않았으며, 지지층은 얇디 얇았습니다. 그리고 대를 이어갈수록 정통성은 줄어만 갔죠. 이는 아무리 최충헌, 최항 대의 측근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제거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낙하산의 한계였죠.
이런 점에서 이 친구랑 참 닮았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뭔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1250년 3월, 그는 전 추밀원 부사 주숙을 물에 던져 죽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욕을 가득 차 있었지만 적어도 최우의 심복임은 분명했죠. 그의 잘못은 단 하나, 최우에 가장 가까운 축에 있었으면서도 남들이 다 최항 편을 들자 그제야 자기에게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자기의 계모 대씨를 내쫓고 재산을 몰수합니다. 자기 대신 김미의 편을 들었따는 죄였죠. 이어 대씨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장군 오승적을 바다에 던집니다.+) 최씨는 참 물에 빠뜨려 죽이길 좋아합니다이어 최우에게 자기를 참소했던 박훤도 바다에 던집니다. 애초에 그 죄로 귀양가긴 했지만 최우가 참 아끼던 심복으로 죽기 전에 국사를 의논하기 위해 불렀는데 오기도 전에 최우가 죽어버린 상황이었죠. 최항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죽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벌어진 최항의 새장가는 참 볼 만 했습니다."왕이 견룡군(왕 친위대)과 중금도지순검 백갑내시다방에 명하여 호위하여 보내게 하고, 또 어좌견여를 주었다. 등촉과 의물의 성대함이 견줄 데가 없었으며, 또 황금으로 만든 경렴과 장구를 특별히 하사하고, 여러 왕씨와 재ㆍ추 는 금과 비단으로 축하하였다."급기야 강화도 내에서는 "사람 50명을 천구성에 재물로 바쳐라"는 유언비어가 나돕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공포에 떨었고, 이 틈을 타 강간이나 도둑질을 저지른 자가 많았다고 하죠. 뭐 이걸 유언비어라고 봐야 될까요 -_-;그 해 말에는 서북면 지병마사 송국첨이 죽습니다. 박훤과 마찬가지로 최항이 싫어했던 이였습니다만,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죽어 지냈고 최항도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죠. 송국첨은 자기가 쓰이지 않는 것을 분해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한편 1차 침공 당시 자주를 지킨 영웅 최춘명도 이 때 죽습니다. 뭔가 너무 많이 죽죠? 다 최항이 죽인 건 아니었습니다만.이게 끝이냐면 또 아닙니다. 이번엔 또 해가 흘러 1251년이었죠. 이 때 어이 없는 사실이 알려지니, 바다에 던진 오승적이 마침 썰물이라서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밤을 틈타 도망친 그는 금강산으로 가서 대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하필 대씨의 종이 밀양에서 그 사실을 누설한 것이었죠. 최항은 급히 그를 다시 강에 던지고, 대씨를 독약으로 죽이는 한편 그 주변인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립니다. 죽이거나 귀양 보낸 것이 70여 명이나 되었고, 귀양 간 사람들 중에서도 물에 던진 게 절반이 넘었다고 하죠. 그런데...그 중에 포함된 사람이 김경손이었습니다. "경손은 평장사 태서의 아들인데, 어머니 꿈에 오색 구름 사이에서 푸른색 옷을 입은 한 동자를 여러 사람이 옹위하여 품안으로 떨어뜨려 보냈다. 드디어 태기가 있어 낳았기 때문에 처음 이름을 운래(雲來)라 하였다. 머리 위에는 용의 발톱같이 생긴 뼈가 있었고, 성이 나면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일어섰다. 성품이 씩씩하고 중후하고 화평하며 여유가 있었고, 지혜와 용맹이 출중하였다. 귀주를 지키고 나주를 평정하여 그 공이 비교할 데가 없었는데, 간적(姦賊)에게 해를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아깝게 여겼다."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이순신은 노량에서 장수된 자로 죽고 불멸의 성웅이 됐습니다. 반면 디미트리 페트렌코는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을 꽂고 영웅이 됐지만 같은 러시아인에게 비참하게 죽었죠. 김경손 역시 귀주성에서 전사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개드립이 보인다구요? 이해해 주세요. 더 이상 쓰기 싫네요. 이걸로 끊겠습니다. 그 동안에도 몽고와 사신을 보내 투닥투닥했는데 다음 편에 같이 적는 게 낫겠네요.저 이 시리즈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요?
옮긴이 주 > 사진은 마지막 사진을 제외한 일체의 복구가 안되서 글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다 생각되는 수준 내에서 검색 후 첨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