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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번(藩)’자를 쓰는 ‘번국’은 ‘번부(藩部)’와 같은 말로, 중국 외곽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을 가리킨다. 지금 중국은 변방에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등을 두고 있는데 이것이 ‘번부’나 ‘번국’이었다. 중국은 외곽의 이민족을 복속시켜 1차로는 중국을 지키게 하는 울타리로 삼고, 2차로는 중국 정치 영역에 붙잡아둠으로써 중국 영토를 넓히는 전략을 구사했다....
..... ‘명사’는 조선전을 따로 만들어놓고도 조선전에서 ‘조선을 번부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했다. 체재만 외국으로 분류했지만 내용은 중국의 일부로 본 것이다. 청나라가 이런 내용의 ‘명사’를 출간할 때 조선은 힘이 없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명사’가 조선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의 지나친 사대(事大)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인 듯하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황실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기에 외국에서 무역을 하자며 선물을 보낸 것도 ‘조공’으로 표기했다. 그러니 조공을 했다고 해서 외국이 중국을 사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도 이를 잘 아는지라 조공만으로는 속국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봉은 다르다. 책봉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고려는 요(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이는 외교상 의례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한 조선의 책봉은 그 내용이 심각했다.
조선은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와 더불어 새 임금이 들어서면 무조건 중국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명이 책봉을 해줄 때까지 왕이란 칭호를 못 쓰고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유구는 한술 더 떴다. 유구의 어느 왕은 명이 혼란에 빠져 책봉해줄 사신을 못 보내자 평생 세자 신분으로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일본 왕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기에 중국은 일본을 속국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중국은 대만을 빼고는 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았다(조선, 베트남, 유구는 제외).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족은 만주족에 단단히 신세를 진 셈이 된다. 중국의 엘리트들이 이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중국 지배층은 만주족이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을 다스리면서 번영된 강건성세를 이룬 것에 주목했다.
1999~2003년 중국 CCTV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를 연속으로 제작해 방영했다. 이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게 아니라, 위대한 중국을 만든 시기’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 무렵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전 중국인을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만든 조어가 ‘중화민족’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모두를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며,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합치는 역사 공작을 시작했다.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고, 중국 영토 안에 조선족의 선조가 만든 고구려가 있었으니,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을 본격화했다. 만주족도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니 만주족 선조가 만든 금(金)과 청도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는 것 또한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였다. 중국은 번국인 위구르족 역사를 통합하기 위해 서북(西北)공정, 티베트족 역사를 흡수하기 위해 서남(西南)공정을 펼쳤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262&aid=0000006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