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걸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이 그리 많은지가 오히려 이해가 안 되네요.
저술 시기가 BCE 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록물이면 그 내용이랑 상관 없이 역사적 가치가 굉장히 높습니다.
하다못해 그 내용이 난잡한 야설일지라도 그게 고대의 기록물이기만 하면 그 역사적 가치는 엄청납니다.
내용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게 저술된 연대가 고대라는게 중요하죠.
학문으로서의 "역사"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비록 100%의 객관성이라는건 허상일지언정 어쨌든 객관성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서들이 존재하는 오늘날에야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객관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제대로 된 역사서들을 제쳐두고
굳이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찬 환단고기 같은 책을 참고할 이유가 하등 없겠지만
고대라는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내용을 막론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자체가 몹시 희소합니다.
그렇잖아도 매우 적은 숫자로, 게다가 대부분 그저 파편으로만 전해지는 고대의 문헌들 가운데에서
객관성이 의심되는 문헌들을 다 배재해 버린다면 고대라는 시대 자체는 연구 불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전해지는 문헌의 파편들을 어떻게든 교차 검증하여 그 안에서 역사를 찾아내는 수 밖에 없는거죠.
적어도 고대사에 있어서는, 객관성이 결여된 모든 문헌을 배재하고 연구하라는 말은 그냥 연구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고대사에 있어서 종교의 경전이라는 특수성 덕에 거의 완전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대의 문서가 있다?
이건 고대사 연구가들에게는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탈출기를 사료로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한다고 말은,
그게 모세가 수십만명의 히브리인들을 인도하여 온갖 재앙을 내리고 바다를 가르는 등의 기적을 일으키며
이집트를 탈출하였다는 성경의 주장을 그 자체로 역사적 사실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탈출기를 사료로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한다고 함은,
최소한 탈출기의 저술 연대로 추정되는 BCE 6세기 전후에 이미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자신들의 종교적/국가적 시조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및 야훼와의 계약이라는 공통의 종교적 체험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며,
이를 바빌론 유배를 겪으며 이방 종교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흔들리고 혼합주의적 성향이 팽배해지면서
결과적으로 종교적 정체성으로 묶여있던 히브리 민족이 민족적 정체성이 와해되어가던 당대의 시대상과 종합해 볼 때
BCE 6세기 전후 바빌론 유배를 겪던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를
전설적 인물인 모세와 그 모세의 업적을 통해 드러난 야훼의 위대함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인 야훼 유일신앙으로 회귀하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탈출기의 내용은 허구일지라도, BCE 6세기 경 히브리인들이 어떤 목적에 의해 그런 허구를 지어냈다는 사실은 허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허구가 아닌 부분이 역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죠.
고대사 연구라는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객관성을 추구한 더 훌륭한 사료들이 쎄고쎘으며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정립된 20세기 이후에 저술되었기에
근현대 한국 종교사 연구 같은 특수한 분야가 아닌 이상 굳이 사료로 택할 이유가 없는 환단고기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문헌 자체가 극소수에 그들 중 객관성을 확보한 문헌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그 대부분이 파편으로만 전해지는 가운데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몇 안 되는 고대의 문헌 중 하나인 성경이
어떻게 역사 연구에 있어서 동급으로 취급될 수 있겠습니까?
뭐, 환단고기도 만약 모종의 분서갱유와 같은 사건으로 제대로 된 사료가 전부 증발해버린 상태에서 1000년쯤 지나서
1000년 뒤의 역사학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20세기 한국의 유일한 문헌이 환단고기인 상황이 온다면,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