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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님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 독립운동의 중심지 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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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사울아비
추천 : 4
조회수 : 143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6/16 22: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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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님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 정읍 
 
2015년 06월 07일 (일)  장학수 새정치민주연합 전북도의원  
  
정읍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놀라운 사실들이 많다. 815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 김구선생과 부주석 김규식 선생은 하나 된 조국건설을 위해 혼신을 다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미래보다는 입신양명에 눈 먼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힘을 빌려 각각의 정부를 계획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여 당시 정치인중 처음으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이다.
 
그리고 정읍출신 조계종 탄허스님 증언에 의하면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정읍을 방문해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 고 했다 한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은 어떤 연유로 서울이 아닌 조그마한 도시 정읍에서 중대한 선언을 하였으며 김구주석은 왜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을까?
 
그것은 실효적 지배를 당하기 시작한 1894년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의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면 정읍이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쉽게 알 수 가있다.
 
1894년 정읍에서는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동학혁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전주성을 함락한 농민군은 무능한 정부대신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해 이쪽고장을 직접 다스렸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정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이후,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조선의 내정간섭을 하자 해산한 동학혁명군이 재집결하여 척양척왜를 외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우금치에서 대패하며 전봉준장군을 비롯한 동학의 접주(지도자)들이 처형되고 만다. 한마디로 근대사의 최초 항일운동인 셈이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읍의 역사이며 조명된 동학혁명운동의 역사이다.
 
주요 동학 지도자들이 처형당했지만 그러나 잔여 동학교도들의 항일운동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호남의 동학세력은 일제 핍박을 피해 증산교, 보천교(보화교, 훔치교, 선도교, 태을교), 황극교, 선교, 미륵불교등 다양한 민족종교들이 정읍을 거점으로 만들어지며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많은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동학의 정읍접주 차치구의 아들 차경석은 정읍시 입암면에 보천교를 설립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에게 엄청난 독립자금을 지원하였고, 정읍출신 독립운동가 라용균을 통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거금 5만원을 전달하는등 ‘조선건국단’과 ‘신인동맹’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보천교도들이 왕성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하였다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국가보훈처참조).
 
정읍출신 독립운동가로 백정기, 박준승, 김현곤, 이익겸, 박환규, 권승욱, 이동환, 김홍규, 배상일 등이 있지만 현재 보천교도들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독립유공자가 100여명에 가깝다.

일부 역사학자와 보천교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일제시대의 법원, 검찰, 경찰서의 각종 속기록과 당시 신문보도문 등의 자료들을 통해 조명되지 않은 정읍의 독립운동의 역사들이 하나씩 둘씩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라북도와 정읍시는 이런 엄청난 독립운동사의 숨겨진 역사들을 밝혀낼 자료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방치하고만 있다.
 
행정에서 주도적인 자료연구와 조사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과 역사라는 구슬들을 실로 꿰어 보물로 만들어야 함에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필자가 정읍시 시의원 시절인 2007년부터 보천교의 독립운동 역사를 각종 근거자료들의 번역을 통한 자료집발간을 주장하고 있으나 행정에서는 종교적 문제라고 폄훼하며 지금까지도 손을 놓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동학운동은 종교적 문제가 아닌가? 이는 종교적 색체로 볼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하에서 종교를 구심점으로 교도들이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들을 발굴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라도 전라북도와 정읍시는 적극적인 자세로 당시의 신문보도와 법원, 검찰, 경찰서의 조사 속기록 등을 전문 연구기관을 통해 번역해서 자료집을 만들어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 자료집을 토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러면 많은 논문들이 발표될 것이고 독립운동의 국내 거점지역이었던 정읍출신의 독립유공자도 지금보다 더욱 늘어날 것이며 발간된 논문들을 토대로 학술대회를 통해 검증하여 새로운 사실들이 교과서에 수록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성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지로서도 발돋움 할것이고 이후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서울시 종로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활용중인 십일전을 비롯한 많은 목조건축 문화유산들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도 하고 독립운동의 성지로도 분명 자리매김해야 한다.
김구와 이승만이라는 독립운동의 두 거두가 광복직후 왜 정읍에 찾아와 중대한 선언과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 는 말을 하였는지를 곱씹어보며 적극적인 자세로 숨겨진 정읍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해야 한다.
 
출처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9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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