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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을 보고 적습니다.(병자호란 관련)
게시물ID : history_213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name238
추천 : 4
조회수 : 152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6/15 03:16:59
으으으 아래글 보고 선조실록 뒤지다 왔습니다;; 피곤해서 승정원꺼는 못찾아봤는데

선조는 면천을 무효로 돌린 적이 없습니다.
노비들이 재산을 바치거나 공을 세워서 면천하는 일이 많아 노비주들의 반발이 심해서, 면천노비가 많은 노비주에게는 따로 보상안까지 만들라고 합니다.
그 외에 면천이나 면역된 사람들 중에 공을 위조하는 경우가 있어 잡아내라 한 거 정도?

면천 무효는 인조때 있었고요,
광해군 때 궁궐 공사 한다고 돈 걷어가며 면천 시켜줬던 노비가 많은데, 돈 돌려주고 그냥 환천시키려니 돈이 너무 들어서 일정 기간 의무 면제를 시켜주는 대신 환천시켰습니다. 면천 기간동안 낳은 자식은 양민으로 취급했구요.


지난번 베오베 글에서도 나온 이야기인데, 반란죄를 물어 쳐형된 의병장은 둘 뿐입니다. 송유진의 난 때 이산겸, 이몽학의 난 때 김덕령.
정황을 보면 이 두사람은 반란과 무관할 가능성이 높지만, 조사 과정에서 너무 이름이 많이 나온데다 결정적으로 조정에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산겸은 상당히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도 왜적과 싸운 적이 없고, 김덕령은 당대에 전설이 생길 정도로 명성이 높았지만 숟가락 얹은 것 외에는 정작 이렇다할 전공이 없었습니다.(못 믿겠으면 찾아보세요. 어떠어떠한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거기서 뭔가 공을 세웠다든가 단독 전공이 있다든가 하는 공식 기록이 없습니다-_-)
선조가 잘한 건 아닌데, 의심병 도질만한 상황이긴 했다는 거죠.


그리고 병자호란때는 의병이 없었지만, 정묘호란때는 있었습니다. 전쟁이 워낙 빨리 끝나서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청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지방까지 전파되고 거병을 결의하고 사람과 병장기를 모으고 거병한 다음 적을 찾아 이동을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싸울만한 적도 없었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상륙했고, 4월 22일(아마도) 곽재우가 거병합니다. 한양만 보고 달리던 왜군이 처음으로 경상우도에 진입한 게 4월 27일, 군량과 병장기를 모으던 곽재우가 처음으로 왜군과 교전한 게 5월 4일입니다. 개전부터 의병 활동을 실질적으로 시작하기까지 대충 20일 정도 걸렸고, 첫 활동 지역은 본거지인 경상 우도였습니다.

이대로 병자호란에 대입해 볼까요?
왜란때 한달 가까이 버텼던 한양이 개전 1주일만에 함락됩니다. 이괄의 난으로 서북면 정예병이 날아간데다, 2만 병력을 거느린 김자점이 태업을 벌입니다. 무능한 걸 수도 있는데 이후 행각을 보면 청나라와 교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원래는 이 병력으로 시간을 끌어줘야 하는데...
선조와 달리 인조는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선택합니다. 세자 등은 강화도로 보내고요. 문제는 남한산성 군량 창고가 성 밖에 있었다는 점(한국군의 유서깊은 군납비리 의혹이 있습니다. 산성까지 군량 운반이 귀찮다나...), 왕실이 피신한 강화도 수비를 아버지 잘 둬 공신자리에 오른 악성트롤 김경징이 맡았다는 점. 강화도 함락 후에 45일간 농성전을 벌이던 인조는 결국 사기와 군량 문제로 항복합니다. 그 50일 남짓한 기간은 의병을 조직하고 성과를 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라는 거죠.
게다가 초반 일방적인 패전으로 병력 동원 체계가 마비되어 '알아서' 저항해야 했던 임진왜란에 비해 병자호란은 그정도까지는 안갔고, 속오군을 비롯한 근왕군이 각 지역에서 조직되어 남한산성 구원에 나섭니다. 의병활동 가능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군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대한민국에 전쟁나서 예비군 소집명령 떨어지는데 의병활동하겠다고 불응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분할된 지휘체계, 지휘관의 무능, 낮은 훈련도와 사기때문에 붙는 족족 패배... 임진왜란때 활발하게 일어났던 근거지 위주 의병활동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청군은 왜군처럼 이곳저곳 병력을 뿌리면서 점령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만주에 기근이 들고 명과의 교역도 불가능한대다 조선과의 무역도 시원찮자 조선을 털어먹겠다는 필사의 각오로 보급선 유지까지 포기하고 한양만 보고 달렸죠. 이래망하나 저래망하나 싶은 심정이었던게 아닐까 합니다.
강화도가 함락되지 않고(아니면 저 멀리 삼남지방으로 내려가거나), 남한산성에 군량이 충분했다면 보급도 포기하고 왔는데 공성은 제대로 못하던 청군이 서서히 약해지는 틈을 타 의병+관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 거라 감히 예상해 봅니다.


이건 학술적인 근거가 없는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혹독한 겨울이었다는 점도 의병활동이 저조했던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정여립이 대동계라는 사설 군사조직 만들었다고 역적으로 몰려 자결했던 시기로부터 몇년 지나지도 않아 의병이 전국적으로 들끓었던 조선입니다. 의병 활동의 저조함은 정치적인 요소가 아닌 전쟁의 특이성으로 해석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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