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 만행도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외국 같았으면 수도의 중심부에서 그런 대학살이 있었음에도 국민들이 추모비 하나 달랑 세워놓은 것 말고는 다 잊고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은 붕괴된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그 길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서 중앙청으로 향했다.
본대와 갈라져 나온 200 여 명의 한 북한군 지대는 아침 9시 조금 지나 서울대 병원을 공격하였다. 서울대 병원은 사흘간의 서울 북부 전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무턱대고 실려 온 국군 부상환자로 만원 상태였다.
서울대 병원의 환자들은 전선이 무너진 상황에 모두 후방으로 긴급 후송이 되었어야 했는데, 후송 대신 1개 소대가 경비 병력으로 파견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밀려오는 대군의 적 앞에 1개 소대를 던지듯이 놔두고 남으로 도주한 것은 6.25전 초기 국군 수뇌부가 많이 저지른 생각 없었던 행태 중의 하나다.
경비 소대는 용감히 싸웠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소대장 남 소위와 선임하사 민 중사를 포함,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저항 병력을 일소하고 서울대 병원에 난입한 북한군은 외곽은 물론 각 빌딩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당시 서울대 병원은 현재 대 본관이 있는 자리에 1, 2, 3, 5 동의 병동이 있었으며, 침대 수는 800 석이었다.
북한군이 학살을 자행한 네 개의 병동은 지금은 다 없어지고 현재는 대형 병원 빌딩이 들어서 있다.
각 병실마다 갑자기 밀려 들어온 국군 부상자와 민간인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이었으며, 침대가 부족하여 국군 환자들은 입원실 바닥이나 복도에까지 누워서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6명이 입원하는 병실의 바닥에는 피 묻은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국군 환자가 30 여 명이나 누워서 신음하기도 했다.
학살은 바로 시작되었다. 총 지휘는 북한군 중좌 놈이 했다.
어떻게 보아도 이 학살은 전투 중에 발생했던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어떤 무자비한 인간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기획 학살이었다.
월북했던 의사가 북한군 군의관이 되어 따발총을 매고 나타난 자를 비롯해서 서울대 병원에 잠복해 있던 너덧 명의 좌익 부역자들이 학살에 나선 북한군을 따라 다니며 학살할 대상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고자질했다.
병동의 출입구를 모두 봉쇄한 북한군은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따발총을 난사해서 국군 환자들을 학살했다.
국군 부상병과 구분이 안가는 일반 환자들도 같이 학살했다.
환자 중에 권총을 가진 간부급들은 병실에 난입한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기도 하고 자결하기도 했었다.
1950년 7월 28알 낙동강전선에서 중상을 입은 국군 부상병.
이렇게 운신을 못하는 항거불능의 환자에게 총창(총검의 북한군 용어) 짓을 한 북한군의 악마적 심사가 불가사의하다.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던 이들은 곧 더 생산적인 살인 방법을 동원했다.
침대마다 찾아다니는 대신 환자들을 입원실 구석에 몰아넣고 사살해 버렸다. 더 쉽고 빠르게 살해 할 수가 있었다.
따발총 부대 살인조에는 긴 총창(총검의 북한군 용어)이 달린 모시 나간트 소총을 가진 놈이 한 명씩 있어서 총을 맞고 아직 죽지 않은 국군들의 가슴이나 목을 찔러서 확인 살인을 했다.
국군 부상병들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서울대 병원에는 정신 병동이 있었다. 이들은 정신 분열증의 중증 환자가 아니라 강박증이나 환청 등 가벼운 심리 장애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북한군은 이들도 그대로 놔두지 않았는데, 이곳의 살해는 특히 잔인했다. 모두 총창으로 살해해버린 것이다. 도주 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숨어 보려고 했지만 북한군은 이들을 총창으로 내리찍어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다른 병실에서 총성이 들리고 학살이 시작된 것을 알아챈 국군 부상병들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병동의 앞을 지키는 북한군에게 모두 사살 당했다.
그래도 요행히 병동을 탈출한 국군은 병원을 벗어나고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북한군이 그 뒤를 쫓으며 총을 쏘거나 총창을 휘둘러 죽이는 행위가 병원 뜰에서 피비린내 나게 발생했다.
중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국군 장병 중에는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 세 시간 동안 광란의 살인극이 펼쳐졌는데도 아직 죽이지 못한 국군 환자들이 많다고 생각한 북한군은 다시 살상 극을 펼쳤다.
오후에는 각 병실과 건물을 다시 뒤져 아직도 생존한 국군들을 찾아내서 치과 대학 앞에 집합시켰다.
집합한 국군환자들에게 따발총의 엄청난 화력이 퍼부어졌고 다 쓰러진 시체 더미를 헤치며 숨이 붙은 환자들에게 총창의 세례가 가해졌다. 이 때도 국군으로 의심되는 환자나 방문 가족까지 생죽음을 당했다.
국군 부상병들을 모아놓고 집단으로 학살한 구 치과 대학 앞.
그렇게 죽이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 북한군은 오후 늦게 또 다시 정밀 수색으로 거동 수상자를 색출해내서 병원 보일러 실 석탄 더미에 이들을 생매장했다.
천인공노할 살인 행위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살인의 붉은 피가 청소되기도 전에 북한군 환자들이 소 달구지와 민간차량 등에 운반되어 들어와 국군이 누웠던 침대에 누웠고 강제 동원했거나 부역하는 좌익 의사들이 근무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는 북한군에 부역하는 좌익 병원 근무자들이 시체들을 치울 생각은 안하고 병원 본관 앞에서 으쌰으쌰하면서 단합대회를 하기도 하였다.
좌익 병원 근무자들이 단합 모임을 했을 구 병원 본관 앞.
[ 학살 당한 국군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100명 설에서 1,000명 설까지 있는데 병동마다 국군 부상병들로 콩나물 시루 같이 넘쳐 흘렀다는 설로 보아 전자보다 후자쪽에 더 가깝
지 않나 싶다.
그리고 1970년대에 아직 기억이 생생했던 여러 관계자들을 만나 인터뷰했던 송효순 선생이 1,000명 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서울대학 병원 뜰 여기저기에 널 부러진 시체들은 팽개쳐 둔 채였다. 더운 여름 날씨에 사체들은 곧 부패하기 시작했다.
근처 거주 주민들은 더운 여름 날씨에도 문을 닫고 살아야 했다. 병원 앞을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숨이 막히는 공포의 냄새에 코를 막고 뛰어서 지나가야 했다.
시체들을 20 여 일 동안 방치하던 북한군은 자기들도 버티기가 힘들었던지 사체들을 모두 끌어 모아 하필이면 병원 앞 대로 창경원 앞과 원남동 로타리에서 시체들을 화장했다.
국군 사체의 타는 냄새가 부패한 냄새를 대신해서 주민들을 소름 끼치는 공포로 몰아넣었다.
서울대에서의 북한군의 만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9.28 수복 전 자신들에게 비협조했거나 불순분자로 분류된 100명을 또 대학병원 구내에서 학살했다.
한국의 대표적 병원인 서울대 병원은 사람의 양식으로 상상조차 할 수없는 잔악한 학살의 도살장으로 돌변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