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중국인들의 주장이 아니다. 고려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고려사>>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지식인들이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한 장치로써 없는 이야기를 지어 냈을까? 그것도 아니다. 당대의 고려인들이, 고려의 왕씨 왕조가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서 찾은 것이다.
<<고려사>>는 김관의의 <<편년통록>>을 인용하여, 왕건의 세계를 밝혀 놓았다. 그에 따르면, 성골장군 호경6이 송악에 내려와 자리를 잡으면서 상사찬 강충5을 낳고, 강충은 신분이 불분명한-도인 혹은 승려, 보육4을 낳고, 보육의 딸 진의3는 당 숙종3과의 사이에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2을 낳는다. 그리고 작제건의 아들이 바로 왕건의 아버지인 사찬 왕륭1이다.
성골장군 호경은 백두산에서 거주하다가 송악 지역으로 내려온 인물로 이야기 된다. 그는 왕건의 선대로 송악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최초의 인물로 그려진다. 출신이 백두산 지역이므로 그의 출신은 아무래도 고구려계로 생각된다. 물론, 그것이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세를 대략 30년으로 본다면, 180년, 877년 생인 왕건을 고려하면, 대략 700년 경이 사건이다. 700년 경 백두산 근방에서는 발해가 건국되었지만, 발해가 어느 정도 세력을 갖기 이전이기도 하므로 고구려유민들이 살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성골장군 호경은 왕건의 전대에 고구려라는 멸망한 고대 국가의 요소를 포함시키는 '장치'로 삽입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성골장군이라는 명칭이다. 현존하는 기록상 성골이라는 골품 부여는 신라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며, 성골장군은 그러한 사고의 흔적으로 보인다.
호경의 아들인 강충 대부터는 송악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 감지된다. 그가 정말 왕건의 선대였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상사찬이라는 관명은 신라 관품인 '사찬'의 변형 형태로 보이며, 중위제가 적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관직명으로 보인다.
사찬은 지방의 호족 세력이나 촌주급의 인물에 주로 내렸던 관위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상사찬'과 같은 중위제가 적용된 모습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각종 금석문 자료에서 이러한 중위제의 흔적은 대부분 신라 하대, 그것도 멸망기에 가까운 시기에서 고려 초기 정도로 한정된다.
따라서 이 역시 고려 건국 초기, 혹은 고려 전기에 역대 왕계를 정리하는 과정 정도에 삽입된 흔적이 어느 정도는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보육과 진의로 가면 이 문제는 더 복잡해 진다. 강충에게는 두 아들, 즉 이제건과 보육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건의 딸이 보육과 혼인하고 그 딸이 진의이다.
삼촌과 조카의 혼인은 범상치 않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 전기의 예를 보면 그것이 일정 부분 관습화 되어 용인되거나 왕가와 같은 특정 가문에 있어서는 오히려 권장된 측면도 있다. 보육이 조카의 몸에서 딸을 얻는데 이가 곧 진의이다. 그리고 진의가 당나라의 숙종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작제건, 즉 왕건의 조부가 된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설화소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탄생 설화로 활용된 "보희가 서형산 꼭대기에서 누운 오줌이 온 나라를 덮"었다는 이야기이다. 보희와 문희는 이 이야기에서 '이제건과 보육', 보육의 '큰딸과 둘째딸 진의'로 재해석 되어 나타난다. 이는 왕가 계보의 신성화를 높이는 작용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건의 선대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왕건의 선대를 당 숙종이라고 본다면, 왕건의 세계는 호경이나 강충에서 시작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장황하게 이어진 지금까지의 설명은 곧 그의 증조모, 진의의 가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을 호경의 후손 왕건으로 보면, 문제는 오히려 간단해진다.
물론, 작제건의 생물학적 아버지로 설정된 당 숙종은 어느 날 배를 타고 신라에 왔다가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기 때문에 그의 성장은 외가에서 이루어지며, 그 때문에 그 역할 역시 작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증조부의 가계가 아닌 증조모의 가계가 그의 선대를 설명하는 데에 효과적인 장치는 결코 아닌 것이다.
당 숙종은 711년 생으로 762년 사망한다. 그러나 그는 이른 시기부터 당 중앙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무엇보다 형이 폐위된 이후 줄곧 태자의 지위를 지켰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당 천자의 기운을 가진 인물로 고려에 방문?하여 진의와 로맨스를 벌일만한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고려 왕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두고 두고 고려 왕조의 고민꺼리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당 숙종'의 등장은 중국 지식인들의 비웃음을 샀고, 당 왕조의 어느 누군가, 황제가 아닌 누군가 등등으로 얼버무리기 일 수였다. 송과 원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동안 고려인들은 고려 전기의 당 숙종 설을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에 따라 그 대타로서 민지와 같은 인물은 '당 선종'을 거론하기도 했다.
애초에 서출로 출생하여, 정치 중심에서 멀어진 상황에서 기이한 행동을 일삼으며 중국을 주유했던 인물이 당 선종이다. 이 부분을 파락호 시절의 대원군의 행동 따위로 확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그가 어느 시점에는 고려 땅에도 가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이 그를 선정하게 된 주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기 응변이든 평소의 고민이든 민지는 <<편년강목>>의 찬자이기도 했으므로 그의 설명은 아마도 가장 그럴싸한 대상 인물을 선정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려말 이제현에 의해서 극복된다. 그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하여 고려 왕조는 국조 때부터 왕씨 성이었다는 것으로 이 문제를 수습한다.
이제현이 활동하던 시점에는 각종 사서의 편찬 등으로 인하여 고려인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기존의 왕실 세계에 대한 비판과 고민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제현은 고려 왕조는 '왕씨' 왕조임을 강조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는 합리적 설명이다. 하지만 이 경우 왕실의 세계는 오직 작제건까지만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이제현 시기의 왕계 문제는 그 이전 시기의 것과 조금 다른 정치적 배경 속에 있다. 그의 고민은 왕실의 세계가 '왕씨'에서 시작하는가 아니면 '이씨'에서 시작하는 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숙종설'과 '선종설' 모두를 부인하고 왕씨의 세계는 오직 왕씨에서 시작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태조 당시의 5묘 설정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낳는다. 실제로 태조 당시에는 3대조까지만 추존되었으며, 국가적 제사의 대상 역시 이들 뿐이었다.
왕건의 선대에 대한 이러한 고민들은 결국, 조부인 작제건 이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작제건의 선대를 설명해야 하는 중압감 속에서 선택한 것이 당 숙종인데, 이는 철저하게 고려 내부에서나 통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송이나 원과 교류하는 상황에서는 조롱꺼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고려의 왕실이 저런 정도였는데, 여타 뿌리 깊은 가문들의 현실은 훨씬 더 고민스러운 정도였을 것이다. 한국 대부분의 성씨들은 고려시대부터 그 연원이 추적되어 진다. 물론 연원 추적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전하는 기록에 없는 어느 왕자, 왕족, 귀인, 중국의 누군가 등등이 그것이다. 때로 동성의 역사적 인물이 시조로 설정되고, 고려시대에 언급되는 동성이 중시조나 파조 등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고려의 묘지명에도 고려 이전의 가문의 연원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거나 기록을 회피하는 성향이 있다.
족보와 세계는 믿음과 신앙의 영역이다. 그러니 해주 최씨로 갔던 탐진 최씨가 경주 최씨로 갔다가 다시 탐진 최씨가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 조상을 바꿔 탈 수 있는 게 족보라면, 그 족보는 이미 신뢰성을 잃은 것이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은 신앙과 믿음의 영역이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출처 | 마이 브레인... ㅎ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