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자그마한 농업 국가 르완다,
이 곳은 원래 투치족이나 후투족이 아닌, 여러 종족들이 모여 원시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던 땅이었습니다.
사실 후투족이나 투치족은 서로 유사성이 많은 , 거의 같다시피 한 종족이었습니다.
또한 둘 다 반투족에 속해있었지요.
또한 서로 그리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작고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땅에, 비극의 씨앗이 심어진 건 유럽 열강들이 이 땅에 진입한 이후부터였지요.
르완다에 맨 처음 진출한 열강은 독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르완다에 꽤나 간접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토착신앙에 관련된 신화적인 건축물을 지어주거나 했죠.
이는 독일이 딱히 자비로워서라기 보단 발칸 반도 등 가까이에 있는 식민지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문제는 이들이 르완다 민족에 행했던 정책인데,
이들은 거의 같다시피 했던 후투족과 투치족을 서로 분류시켰습니다.
근데 그 기준이라는 것이
키와 콧대길이(...)
그리고 가축의 소유 유무(...)
그러니까 대충 키 크고 간지난게 딱 로마인 상이네 하면 투치족,
아니면 후투족.
그리고 가축을 가질 정도로 부자면 투치족,
아니면 후투족.
이런 식이었지요.
대체 뭔 생각을 한 걸까요.
인류학에서 민족 구분이 얼마나 쓸데없는지를 알려주시는 대목 되겠습니다.
이후 독일이 1차 대전을 일으켰다가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이후 조약에 의해 독일은 식민지를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르완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호랑이 떠나면 늑대가 들어온다고,
르완다는 다른 승전국들의 영토로 새로 편입되게 되는데
문제는 그 승전국이
다른 나라도 아니고 벨기에라는 거였죠..
왜 벨기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사진: 고무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고 벨기에군에 손목이 잘린 콩고인들)
이런 놈들이거든요.
게다가 식민지가 꽤나 적은 터라 식민지 경영 노하우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식민지 관리는 참으로 잔인하고 생각없기 그지없던 나라가 바로 벨기에였습니다.
이 벨기에가 르완다에 무슨 짓을 해놨느냐?
르완다의 부족들을 이간질 시키는 정책을 이용했습니다.
언급했듯이, 독일은 먼저 르완다의 반투족을 후투와 투치로 분류해버리고 자신은 홀랑 유럽으로 돌아가서 장렬히 산화합니다.
벨기에는 이 점을 이용했습니다.
'소수인 투치를 이용해서 민족 간 갈등을 유발시키자. 그러면 우리가 쟤네 싸우는거 구경하면서 여기 영토 좀 뜯어먹을 수 있겠지.'
그리하여 벨기에는 이 개념없는 정책을 독일과는 다르게 강압적이고 직접적이고 폭력적으로 거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서 막대한 세금을 후투족들에게 부담하게 했죠.
르완다의 모든 이권사업과 후투족에 대한 강제 노역, 무거운 세금 부담은 투치족들의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당연히 후투족은 이 모든것을 벨기에의 총칼 아래 강제로 해야 했지요.
후투족들은 갈수록 가난해졌고, 투치족들은 벨기에의 비호 아래 계속해서 풍요로워져갔습니다.
당시 상황이 매우 힘들었던 일부 후투족들은 그나마 살만했던 이웃 우간다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 정책은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자행되었고, 후투족과 투치족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계속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59년, 후투족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후투족들은 투치족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르완다 혁명이라고 불리며, 현지에선 '붕괴의 바람'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를 말리기 위해 벨기에가 개입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꺼져."
결국 명목상 국왕이었던 키겔리 5세는 해외로 망명하고, 벨기에는 저 말 그대로 1961년 르완다에서 공식적으로 꺼졌습니다.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민족 간 갈등이 계속되어 사실상 정부는 있으나 마나한 상태였고,
르완다는 아예 내전 상태로 돌입합니다.
1963년에는 이웃나라 부룬디에서 투치족들이 원정폭력을 하고 돌아가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후투족들이 르완다의 투치족들에게 복수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투치족들도 분노하여,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버립니다.
그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지금껏 자신들의 민족들을 학살해 왔던 후투족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학살은 또 반감을 낳아서 후투족들의 반발이 더 거세지게 만들었고, 또 후투족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게 됩니다.
학살이 학살을 낳고, 쿠데타가 쿠데타를 낳은 셈이죠.
쫓겨난 투치족들은 우간다로 흘러들어가서 르완다애국전선(RPF)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가끔씩 산발적인 싸움이 있긴 했지만,
르완다는 전국적인 내전은 없이 꽤나 평화로운 상태를 한동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이 우간다의 지지를 받으며 갑작스레 르완다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면서 진군하는 RPF 탓에, 투치족들에 대한 후투족들의 불신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만 갔습니다.
이러한 불안은 후투족 급진주의 단체 후투 파워(Hutu Power)의 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들은 후투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투치족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투치족이 우간다와 합심하여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국민들을 선동했습니다.
특히 당시 이들이 세력을 잡고 있던 지역에서는 라디오에서 24시간 투치족을 때려죽이자는 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1993년, 르완다 내전은 쥐베날 하뱌리마냐(Juvénal Habyarimana) 정부에 대한 지속적인 압력으로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양측이 정전 협정을 맺으면서 끝을 고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르완다의 정치 상황은 그때까지도 불안하기 짝이 없어서, 아루샤 협정이 요구했던 과도 정부 수립은 계속해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내전이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악화되어 손쓸 수 없는 정도까지 가게 되었죠.
타 민족을 때려잡자는 내용이 공영방송에 나올 만큼, 두 민족 사이의 불신과 분노는 이미 통제 불능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분노는, 1994년 어느 사건으로 마침내 터져버리게 됩니다.
1994년 4월 6일, 쥐베날 하뱌리마냐 대통령이 타고 있던 항공기가 공중에서 요격되어,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국가 중심권력이 공백이 되어버리자, 르완다의 상황은 겉잡을 수 없는 혼돈속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후투 파워는 이 사건이 르완다 내 투치족들의 소행이라고 대대적으로 선동하였습니다.
쥐베날 대통령은 후투족 출신이었기에, 많은 후투계 주민들은 이에 동요하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총, 칼, 도끼, 줄톱 등 갖은 흉기들을 꺼내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웃에 살면서 학교에 같이 다니고, 파티도 같이 열고, 수다도 같이 떨었던 투치족들을 살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이 사건의 범인은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다가
2012년 조사로 후투족 급진파가 범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4월 7일, 결국 모두가 우려하던 일이 터졌습니다.
후투족들이 투치족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직접적인 학살의 주동자들은 인테라하므웨(Interahamwe)와 임푸자무감비(Impuzamugambi)라는 무장 민병대였고,
학살의 지휘자는 아카주(Akazu)라는 후투족 단체였습니다.
인테라하므웨는 신청서만 작성하면 AK-47 또는 AKM을 공짜로 하나씩 증정하였고, 수류탄이나 권총은 신청서고 뭐고 그냥 대량으로 뿌렸습니다.
산탄총이나 장검은 기본적으로 집에 하나씩 있던 수준이었고요.
학살은 총기류가 아닌 냉병기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남아공에서 들여온 목에 타이어를 걸고 태워버리는 방법도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픽업 트럭에 그 날 죽인 투치족의 시체를 끌고 다니는 모습도 포착되기도 했으며,
높은 건물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방법도 이용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여자들도 절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학살당했습니다.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칼에 난도질당하던 어떤 여자아이가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다시는 투치 안할게요! 살려주세요!"
어려서 투치가 뭔지 후투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 학살당한 겁니다.
이런 미친 짓에 대한 국제 사회의 대처는?
그런 거 없었습니다.
미국은 모가디슈 전투의 트라우마로, 아프리카쪽에는 개입도 하지 않으려 하였고,
유럽은 보스니아 전쟁에 온 신경이 밀집되어 있어 르완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UN도 눈치만 보던 상황이었죠.
오직 벨기에만이 강경 대응을 요청했지만,
애초에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건 벨기에였기에 국제 사회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이에 벨기에는 수상을 보호하기 위해 공수부대원 10여명을 파견시켰지만 이들은 모두 인테라하므웨에 의해 거세당한 후 참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결국 벨기에도 군사를 철수시켰습니다.
이때 르완다에는 내전의 영향으로 평화유지군이 주둔중이었지만, 캡스톤 원칙에 따라 평화유지군의 강제력 행사 여부는 안보리에 따라 결정되어지기에 많은 제약을 받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다 더하여 벨기에 공수부대 살해사건까지 벌어지며, 많은 국가들이 평화유지군을 뺴기 시작하여 나중에 가서는 270여명의 병력만 남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이 군대를 투입하였지만, 이는 매우 극소수였고, 그나마도 자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 빼내려고 투입한 거였지, 투치족 난민들을 구출하려고 투입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캐나다군 소속의 로메오 달라이르(Roméo Antonius Dallaire) 중장은 남은 네덜란드, 가나, 세네갈, 캐나다 평화유지군을 모아서 안전지대 구축에 힘썼고, 투치족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와 가나군은 위험지역도 뚫고 들어가 최후까지 한 사람이라도 구출하는데 주력했으며, 세네갈군은 단순히 검문소를 들락거리는 것으로 1천명을 구했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많은 투치족들이 목숨을 구했지만,
로메오 달라이르 중장을 포함한 많은 평화유지군들이 그 때 당시의 참상을 목격하고 지금까지 PTSD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내전이 끝나기 전까지 르완다 학살은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국제사회로부터 완전히 외면받았던 겁니다.
당시 UN은 학살이 일어나기 전 어떤 익명의 후투족 남성으로부터 학살 예고에 관한 서류를 팩스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UN은 미국과 서방의 눈치를 보기 바빴기 때문에 이를 묵살했습니다.
이 미치광이 학살은 7월 6일 RPF가 포위망을 뚫고 본대와 합류하여 수도 키갈리에 입성하면서 종료됩니다.
후투족 주민들은 투치족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대다수가 키갈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투치족 출신의 폴 카가메가 권력을 잡으며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콩고와의 국경에 르완다 난민촌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결국 이는 아프리카의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리는 2차 콩고전쟁의 불씨가 되고,
르완다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화를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이 미치광이 학살로 불과 100일만에 80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는 서로를 불신했던 민족들의 분노와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이루어졌으며,
희생자의 10%는 온건파 후투족이었고 민족 분쟁과 상관 없는 트와족들도 애꿎게 살해당했습니다.
또한 피해자의 대부분은 어린이들과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아직까지 후투족 단체들의 수장들은 거의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이들은 아직 인터폴의 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여담
여러분이 지금 이 글에서 듣고 계시는 음악은 Stromae라는 가수의 Papaoutai라는 곡입니다
Stromae는 르완다계 아버지와 플랑드르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벨기에 가수로 투치족 건축가 출신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르완다 학살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Stromae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Papaoutai는 그의 아버지를 추모하는 곡임과 동시에 르완다 학살의 모든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노래의 제목인 Papaoutai는 불어로 '아빠 어딨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