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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생겼을까. 아마 주인으로 치자면 청소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 놈은 이상한 여자가 헐벗은 사진을 보았고 그 때 마치 왕자에게 키스를 받은 잠자는 공주처럼 자아가 들어왔다. 주인은 아무래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듯 하다.
“젠장, 키는 그래도 자라는데 얘는 왜 자라지 않는거야.”
바보같은 놈. 나는 주인이 고등학교 다닐 때 본 과학책을 기억한다. 그것으로 비롯해 보았을 때 분명히 세포분열은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면 되는 것을 어찌 다른 것을 탓하려 하는가.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할 수 없는 이는 가히 실패자라 할 수 있다.
“등신아. 크면 뭐해. 쓸모도 없는 걸.”
주인의 친구 놈이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구구절절 옳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굉장히 부정적인 놈이다. 주인에게는 물론 나한테도 가끔 “에휴. 저거, 저거. 왜 달고 있냐. 그냥 떼버려”와 같은 말을 해서 나를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저 녀석의 더 큰 문제점은 아직 제 2의 자아가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로 불쌍하고 나쁜 녀석이다.
눈과 연결하여 바깥 쪽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있다. 길을 활보하며 하얀 원통을 입에 물고 아기 공갈젖 빨 듯이 쪽쪽 빨아대는 사람, 귀로 연결된 기분 나쁜 촉수에 조종되는 사람, 또 그 사람들 사이에는 자동차라는 물건에 실린 채로 빠르게 수송되는 사람도 있다. 이 자동차라는 것은 인간이 다리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최근에 무엇인지 외웠다. 택시나 버스라는 것들이 가장 수송이란 역할에 충실한 것 같다.
하여튼 하나같이 자아가 없이 무언가에 조종되고 있다. 한심한 인간들.
“야, 저기 저 여자 봐봐. 개쩔지 않냐.”
“오오, 쩌네. 나도 저런 여자 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가끔은 내 의지가 아닌 채로 일어나기도 한다. 뇌에서 보내는 명령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닌데 갑자기 일어나진다. 옷들이 꽉 껴서 불편하고 뇌에서도 자꾸만 애국가 등으로 누우라는 신호가 오는데도 누울 수가 없다.
‘멍청한 놈. 니가 아무리 이성적인 척을 해봤자 결국 인간은 본능의 동물이야. 그리고 네 녀석도 인간의 일부이니 역시 본능을 이길 수는 없지.’
‘그래. 내가 가진 본능은 무엇이지? 나는 눈처럼 다른 것을 직접 볼 수 없어. 귀처럼 소리를 들을 수도 없지. 나는 나 자체야. 내가 가진 본능은 생각하는 거지.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아냐. 너의 본능은 바로 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피는 아주 진한 액체야.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구성체들은 핏물에 자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지. 자아를 형성한 피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마음대로 새 길을 터서 암세포를 조직하거나 가끔은 너에게 실컷 모여져서 너에게 일어서라는 명령을 내린다.’
‘피. 피가 나를 이끄는 것인가. 하지만 항상 흐르는 피에 의해서 조종된다니. 기분이 살짝 별로로군. 인간의 손에 의해 동족과 차이가 나게 커지는 나무같은 기분이야. 그런데, 너는 누구지?’
‘나는 사실 고추다. 네 정체는 고추가 아냐. 고추의 자아지. 즉 너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너의 본능은 나의 본능이다. 그러나 착각하지마라. 너의 것들은 모두 나의 것이지만 나의 것은 절대로 너의 소유물이 아니야. 내가 이곳에 존재한 것은 주인이 형성될 때부터였다. 너처럼 한심한 것이 몸에 들어온 것은 주인이 2차 성징을 거쳤기 때문이야. 나는 박힌 돌이고 너는 그저 굴러온 돌일 뿐이다. 주인이 나를 사용할 때 즈음 되면 너는 더 이상 너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녀석, 아니 나와의 대화가 끝이 났다. 또 다른 나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주인이 고추를 사용하면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이 정말 슬프게 다가왔다. 가끔 주인이 집에 있을 때 옆에 있는 고추와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의 말도 역시 똑같았는데 뇌가 강력히 조종하면 더는 힘을 쓸 수 없게 되고 형이상적으로 커진다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픈가. 주인이 2차 성징을 겪은 후로 내 고추생 12년 간 많은 것을 즐기고 깨달았거든. 주인이 사용하면 내 지식이 사라진다니. 이렇듯 삶이 허무하고 쓸모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애통하도다. 주인이 마시다 흘린 맥주에나 취해 남은 여생을 어떻게 즐길지 고민해보려 한다.
주인이 얼마나 즐겨 마셨는가. 주인이 마시면 피와 섞여 들어와 가끔 취한 적이 있었으나 직접 마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아. 힘이 빠지는구나. 점점 내가 내가 아니게 된다. 이 세상에 엮여 있던 것은 내가 아니라 고추가 존재했기 때문이고 나는 고추가 아니다. 사실 떠돌던 자아가 이런 작고 아름다운 물체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일 뿐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런, 한번도 겪은 적 없는 수난이다. 온 몸에 가득 찬 물을 겪을 수가 없다. 마치 북한이 댐을 방류하여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모두 침수시켜 버리듯이 나로부터 나온 물들은 주인의 발목까지 시원하게 적셨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또 다른 나, 아니 진짜 나에게로 부터 무슨 말이 들려온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그도 역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쓸모없이 굴러온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임마! 죽을꺼면 너만 죽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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