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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직후의 권력투쟁사 (1)
게시물ID : history_211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urelius
추천 : 4
조회수 : 143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6/06 14:13:24

최근 읽고 있는 책 중에 정말 재미있고도 유익한 책이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해서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고 메이지 유신과 근대 일본의 정치사를 쉽고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담론이 아닌, 그 시대 주역들의 인간관계와 갈등을 서술한 게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메이지 유신이 일사분란하게 처리된 근대화 프로젝트라고 인식합니다. 

가령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사심보다 공익을 앞세웠다던가 또는 반대로 조선이나 중국은 지배층끼리 분열하고 싸우기만 했다던가..

하지만 메이지 유신은 근대화와 제국주의로 향하는 획일적 운동인 것처럼 비춰집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사실 파고들면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 또한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세력이 반목하고 또는 협력하면서 합종연횡하고 국가의 정책도 처음부터 잘 설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을 일으킨 주역들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사츠마 번의 무사들, 그리고 초슈번의 무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매우 젊었습니다(20대~30대). 그리고 이들은 직접 전면에 나서기보다 (직접 나서면 괘씸해 보이기 때문에...)조정의 귀족들(공가)을 앞세워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원래는 아무 권력도 없던 이 '공가'들도 발언권을 얻게 됩니다. 사츠마가 지원한 이와쿠라 도모미, 그리고 쵸슈가 지원한 산죠 사네토미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산죠 사네토미이와쿠라 도모미



그런데 교토의 귀족들의 발언권이 너무 강해져도 곤란해지기 때문에, 사츠마의 오쿠보 도시미치는 '오사카 천도'를 건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제안은 부결되고 대신 '도쿄' 천도로 방향이 정해집니다. 


오쿠보 도시미치


아무래도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江戶)가 경제적으로보나, 정치적 위상으로 보나 보다 알맞은 장소였고 무엇보다 막부 잔당들이 동북지방에서 아직 활개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명분이 설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북경 천도나 고려의 서경천도와 비슷한 이유죠. 기존 수도의 기득권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군사적 정벌을 위한 본부로 삼기 위한 천도라는 맥락에서...


이 와중에 초슈의 실세 기도 다카요시는 판적봉환을 주장합니다. 판적봉환이란 다이묘들이 토지와 인구를 천황에게 반납하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직 동북지방 평정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갑자기 들고온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고 합니다. 


기도 다카요시


유신세력이 막부에 승리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 당시 기도는 교토에 없었고 따라서 그는 정치중앙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가져온 비책이 '판적봉환'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기도 본인의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천황주의자'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기도의 입장에서 판적봉환은 유신의 자연스러운 수순이니까요.


그런데 오쿠보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도 아니었고 천황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사츠마 번은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들이 지배하던 쵸슈 번과는 달리 현실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력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츠마의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는 도바-후시미 전투 직후 자신은 언제 쇼군이 되느냐라고 농담하기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다행히 오쿠보는 판적봉환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쿠보나 신정부의 다른 인사들에게 판적봉환을 반대할 명분은 별로 없었습니다. 애초에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이유가 '존왕양이'인 이상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줘야 하고 판적봉환은 원론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쿠보와 기도는 협력하여 쵸슈번주와 사츠마번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판적봉환을 실시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두 번이 자발적으로 판적봉환을 실행하자 다른 번들도 대세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다이묘들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기존 봉건적 질서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형식적으로 토지와 재산이 천황에 귀속되기는 했어도 다이묘들은 다시 원래 지방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기존의 유력자들을 없애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는 사가 번의 무사 '오쿠마 시게노부'를 등용합니다. 오쿠마는 쵸슈 출신이 아니었지만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젊은 인재였습니다. 사가번 자체가 막말 당시 일본에서 제일 앞선 과학기술을 보유한 번이었고 최신식 대포인 암스트롱포를 자체 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오쿠마는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버벡'을 스승으로 삼아서 서양사정에도 밝고 영어도 꽤 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에 띄게 된 것은 주일 영국 공사 파크스를 상대할 때였는데, 신정부 초기 외국인 살상과 기독교 탄압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그와 담판을 벌여 원만히 해결했던 것입니다. 


오쿠마 시게노부


기도는 오쿠마를 대장대보와 민부대보에 앉혔습니다. 대장성은 국가경제 전반을 총괄하는 부처고 민부성은 토목, 조세, 통상들을 담당하는 부처였는데, 이는 사실상 오쿠마에게 국가건설 프로젝트를 완전히 맡긴 셈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대장성에 포진시킵니다. 물론 오쿠마 밑으로 말이죠. 그런데 당시 오쿠마의 나이 또한 31세에 불과했습니다.


31세의 오쿠마는 패기가 넘치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법이 없었고 독단적이었다고 하며 그리고 허영심도 많아 항상 백마를 타고 출근했다고 합니다. 백마를 타는 것은 과거 다이묘의 특권이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실무적인 지식을 무기 삼아 무자비하게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됩니다. 이는 즉 강력한 중앙집권화, 강력한 조세제도 등을 의미했으며 지방세력이나 농민들에게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대장성과 민부성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이는 물론 오쿠마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이 논의를 주도한 것은 사츠마의 오쿠보였습니다. 이제 40대가 되가는 그의 입장에서 애송이인 오쿠마가 날뛰는 게 아니꼬왔고 특히 그가 초슈 번의 힘을 믿고 "깝친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결국 대장성과 민부성을 분리하자는 논쟁은 사츠마 vs 초슈의 대립양상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립이 격화되자 불안해진 조정의 귀족들은 양측을 설득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때 조정귀족의 실세 이와쿠라 도모미와 산죠 사네토미가 각각 나서서 양 번을 설득하고 오쿠마가 민부성을 사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공석이 된 민부성의 자리는 오쿠보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쿠보는 오쿠마의 힘을 꺾기 위해 대장성의 주요 부서들을 민부성으로 이관시키고 특히 조세징수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에 오쿠마 또한 공부성을 신설하여 광산, 철도, 제철 등을 담당하도록 만들어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특히 오쿠마는 근대 산업에 대한 실무적 지식이 정치가인 오쿠보보다 월등히 뛰어났기에 오쿠보로서는 마땅히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오쿠보는 옅어져 가는 사츠마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묘책을 내놓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상경시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180cm 되는 키에 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고 인기 측면에서도 최대의 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정부 수립 직후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그런 그가 상경한다면 중앙정계의 분위기는 일거에 반전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


물론 기도는 사이고의 상경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반대만 한다면 이는 '번벌투쟁'으로 비춰질 수 있었고 신정부가 분열되고 와해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징병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었는데 징병제를 주장하고 주도했던 쵸슈의 책임자가 암살당했습니다. 그 대신 사츠마와 쵸슈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근위병이 만들어집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기도는 사이고의 상경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오쿠보는 사이고의 상경을 요구하는 천황의 칙명을 얻고 가고시마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가지 않았습니다. 사절단의 수장으로는 귀족 '이와쿠라 도모미'였고 동행인은 쵸슈 출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였습니다. 천황의 칙사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칙사는 당연히 고위귀족이 맡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야마가 아리토모는 약간 뜬금포이기도 합니다. 야마가타가 사이고의 친동생과 절친한 사이라는 것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 둘은 1870년 보불전쟁을 시찰하러 유럽에 파견된 최초의 군사사절단이었기 때문에 친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기도가 오쿠보를 감시하기 위해 일부러 야마가타를 붙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천황의 명을 받은 사이고는 상경합니다. 그러자 정치판을 새로 짤 필요성이 대두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오쿠보 세력은 기도를 참의에 앉히고자 했습니다. 참의란 태정관의 대신이며 관직으로는 매우 높은 직책인데(복수의 인원이 임명될 수 있음) 여기에 기도를 홀로 앉히려고 한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이 계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혼자 참의가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 때 홀로 책임을 독박쓰게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절충안으로 사이고와 함께 참의가 되는 것으로 합의를 봅니다.


그런데 오쿠보는 동시에 중무성이라는 부처를 새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중무성이란 천황을 직접 보필하는 부처인데, 그는 사이고와 기도를 참의로 하고 자기는 천황과 직접 통하는 실세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권력욕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 오쿠보 다운 발상입니다. 그런데 뭔가 의도가 뻔했던 그의 시도는 실패합니다. 


갈곳이 없어진 그는 대신 대장경(대장성 장관)에 마지못해 취임합니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일부러 오쿠보를 대장경으로 추대하여 사이고에 대한 방패막이로 활용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대장성으로부터 민부성 독립을 추진한 오쿠보는 대장경이 되자 민부성을 폐지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다시 대장성으로 모으면서 여러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그 중 하나가 <폐번치현>인데 이 또한 정치적 난국의 타개책이었다고 합니다. 사이고는 상경한 이후 '인사개혁'에 몰두하였고 그의 표적은 대부분 기도가 등용한 쵸슈 세력이었는데 이에 기도가 반발하면서 다시 정국이 올스탑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이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절충안으로 <폐번치현>을 들고 왔던 것입니다. 인사개혁보다 더 크고 중대한 사안이었고 사이고나 기도는 폐번치현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논의는 폐번치현에 집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페번치현은 다이묘들의 특권을 정말 완전히 없애는 것이고 기존 봉건질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습니다. 이에 신정부가 사이고에게 반발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사이고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합니다. 특히 사이고는 육군 대장이자 원수였기에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정부는 회유책(부채상속)과 강경책(수틀리면 무력도 사용할 수 있다)을 병용하여 폐번치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 다음 이슈는 관제개혁이었는데 태정대신(지금으로 치면 총리)에는 귀족 '산죠 사네토미'를 앉히게 됩니다. 그는 초슈가 옹립한 귀족이긴 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사람이어서 사츠마는 그가 태정대신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러한 권력투쟁 양상이 외국으로 파견하는 사절단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이와쿠라 사절단> 말이죠. 



지금에서야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양문물을 배우기 위해 떠난 사절단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일본과 서구열강이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사절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초 이를 구상했던 것은 오쿠마 시게노부였고요.


서구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었고 영어도 가능한 오쿠마는 본래 소규모의 사절단을 기획했었는데,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오쿠보는 오쿠마를 싫어했었고 그가 주도권을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오쿠보는 귀족 이와쿠라 도모미를 앞세워 새로운 사절단을 구상하였고 사절단의 격이 높아짐에 따라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 다카요시를 이에 참여시키고자 했습니다. 오쿠보 입장에서 사이고는 사츠마 시절부터 죽마고우였지만 기도는 아니었기에 그가 자신의 부재중에 돌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물론 기도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 자신은 사실 서구에 직접 가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을 외국으로 보내고 사이고를 국내에 남기는 것은 정치적 계략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하지만 쵸슈 출신의 이노우에 가오루가 설득하고 설득한 끝에 기도도 이와쿠라 사절단에 합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토 히로부미도 데려기로 합니다. 이토는 일본 최초 영국 유학생이었기 때문이죠.  


그 대신 사이고에게 몇가지 사항에 대해 약조를 하라고 말합니다.


(1) 폐번치현의 사후 처릴 제외한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말 것.

(2) 행정기구 개편의 금지

(3) 주요 관직의 인사 동결 


사이고는 이에 대해 약조를 했습니다. 당초 이와쿠라 사절단은 본래 10개월의 여정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곧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정이 계획보다 길어지자 사이고는 독단적으로 정부를 굴려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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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과 사이고의 몰락, 그리고 오쿠보의 단독 정권은 추후 다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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