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시기의 로마교육은 ‘가정교육이 주로 행해졌을 것’ 으로 추정합니다.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건국사’에서 ‘루두스’라는 초등교육기관이 나오지만, 이것이 주된 교육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교육학에서는요.)
오히려 그리스와 같이 소피스트 같은 가정교사 또는 교복(교육노예!)이 학생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덕성교육을 담당하고, 아버지는 지적교육과 체육을 담당하는 쪽으로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부분은 추정한다, 본다 등으로 기술했는데, 사료가 불충분하여, 그런 것 입니다.플루타르코스영웅전에서 ‘대카토전’에서 가정교육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로마의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후로 로마교육은 그 형태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짐작하시는 바대로, 포에니전쟁입니다. 여러 차례 포에니전쟁을 통해 로마는 세력권을 넓히고, 굳건히 합니다. 그리고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로마는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패권자였고, 그에 따라 그리스 일대에 영향력을 미치게됩니다. 하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역투현상이 일어나게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헬레니즘시대의 그리스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다가 그리스교육의 영향을 받았냐면, 재미있게도, 노예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272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타렌툼을 점령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그리스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조리 노예로 팔리게 되었죠. 그런데 이들중의 일부는 교육을 상당히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고, 자연스레 그들은 교복(교육노예)을 담당합니다.
그 들은 그리스어로 된 ‘오디세이아’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그들에게 문학과 음악, 문법, 수사학을 가르쳤고, 후에 자유인으로 신분이 해방된 후에도 계속 교육에 종사합니다. 기원전 190년을 전후로 카르타고와 그리스세력이 결탁했지만, 포에니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돌아가고, 로마는 그리스자체를 부정하게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 2명을 로마에서 추방하고, 기원전 161년에는 로마원로원의 권고안으로 그리스 철학자와 수사학자는 로마 안에서 있을 수 없다는 칙령이 반포됩니다.
하지만, 한번 영향을 받은 것을 막기는 힘들었고, 원로원의 승인 없이 그리스문학을 가르치는 ‘문법학교’들이 성행하게 됩니다. 이를 막기에는 벅차다고 느꼈는지, 로마인들은 ‘라틴문법학교’를 내세웁니다.
즉 그리스의 학문과 라틴어 문학 그리고 수사학을 가르치는 하지만, 점차 비중을 라틴어쪽에 두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받았는가 살펴봅시다. 가정에서 글쓰기, 셈하기, 읽기를 배웁니다. 주로 부모와 교육노예가 이를 담당합니다. ‘루두스’라는 초등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이 가정에서의 교육이 주된 교육으로 주로 시민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12동판법을 공부하는 것을 거칩니다.
이러한 교육은 12~13세 까지 배우며, 상류층의 경우에는 '문법'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가서 ‘문법’을 배웁니다. 물론 돈내고요. 여기서 문법은 단순히 grammar가 아니라 포괄적인 문법입니다. 문학도 포함되어 있고, 수사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비평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16세가 되면 별 문제 없이 성실히 다녔다면 이 학교를 졸업하게됩니다.
요약을 하자면 일반 평민들은 가정에서의 교육과 ‘루두스’교육으로도 충분히 시민의 역할을 하고, 그보다 상류층은 더 많은 학습을 위해 문법학교를 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제 공화정의 관직을 받기위한 교육이 남아있습니다. 수사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이소크라테스’가 세운 수사학교가 모태입니다.
여기서는 이제 연설의 기술을 배워야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시작해서 각종 수사학자들의 수사학적 이론과, 기법 그리고 실제 웅변가들이 사용하는 제스쳐와 문장, 그들이 웅변하는 주제를 비릇한 모든 것을 교사 감독하에서 엄격하게 공부합니다. 그 훈련의 내용은 8가지 단계를 거칩니다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위에서 다루다시피 로마의 교육과 그리스교육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교육은 철학과 문학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라면, 로마의 교육은 실용적 목적에 맞춘 문법과 수사학교육이 중점적입니다. 물론 기초적인 시민으로서의 교육은 둘 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