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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살펴본 환단고기의 문제점 (3)
게시물ID : history_210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3
조회수 : 124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6/01 23: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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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0.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1. 정치와 사회

2. 생산과 경제

3. 외교와 군사

4. 결           론



3. 외교와 군사


생산과 경제에 이어 아니 환단고기라는 자칭 사료가 철저하게 독자의 상상력을 기초로한 판단을 요구하는 서적이라 이번 편도 몇 안되는 환단고기의 언급을 토대로 유추를 해볼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살펴보면 볼수록 외교와 군사 역시 상당히 참담하기 그지없는게 사실입니다. 아니 단적으로 환국 문명에 있어 환단고기를 토대로 보자면 외교는 없습니다.


물론 연방국에서 조공 사절을 보내는 정도의 행위는 있으나 이 것은 어디까지나 플로리다 주지사가 재해 복구 비용을 청구하기 위해 외교 사절단을 미국에 보내는 정도의 행위일뿐이고,


실상 서구적이며 가장 근현대적인 개념의 정치 체계를 갖춘 환국 문명에 있어 그 문화적 바탕이 정 반대인 아시아 지역과의 외교는 개념 자체가 별개일뿐더러


그 들의 말대로 최상 6만년이라고 한다면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생존의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이며 지구는 마지막 빙하기인 뷔름 빙기 시절입니다.


대체 누구와 외교를 하겠습니까?


3천년 이라 한다 할지라도 동양에서 말하는 외교는 예를 기초로 한 즉 조공 관계에 따른 외교로, 너와 내가 다르며 동등한 관계임을 전제로한 서양의 외교에 동양이 본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아편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를 넘어서야 가능해집니다.


즉 서구적인 문화 바탕 아래에서 자생한 문명과 동양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문명, 과연 외교가 가능하기는 하겠습니까?


애초에 왜 이러한 문화적인 충격은 어떠한 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군사적인 문제 역시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고등학교때 우리가 배우는 것 중에 하나가 사회의 발전입니다. 


청동기 시절에는 군장 국가로 우리 역사에서는 고조선이 이에 해당됩니다. 철기 문명은 연맹 왕국으로 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등이 이에 해당되며 고대국가 즉 중앙집권국가는 율령의 반포와 관직의 정비등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에 따르자면 최소한 환국 문명은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올수가 있습니다.


생산과 경제에서도 언급했지만 대체 철기문명이 뭐가 잘못되어서 청동기로 단 하나의 흔적도 무엇도 없이 뿅 하고 회귀했는지는 참 신기할따름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철기 문명으로서 남북이 5만리 대략 2만 km 동서기  2만리 얼추 7,800km 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던 환국 문명의 군사력을 본다면 우선 환단고기에 따르자면 신농의 마지막 왕 유망과 치우와의 전쟁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 원인이 국정 협약을 위반해서 라고 합니다. 이 당시가 BC 2968년이라는데...일단 생각을 그만두겠습니다.


아무튼 이 당시 염제국의 제후이자 신농의 8대손인 유망이 국정협약을 위반하고 화병(華兵) 그러니까 중국인 병사라는 뜻이겠죠? 이 중국인 병사들을 동이식으로 훈련시키고 공상을 습격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치우는 갈로산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거기서 최초로 철기로 무장을 시켰다고 합니다. 


아래는 신시본기의 해당 부분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겹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대개 아홉 개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없었다. 대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마주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정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가 말하는 바의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보시다시피 별 다른 묘사가 없습니다. 그저 나가 싸웠다. 이겼다. 이 정도이나 몇가지 묘사를 통해 알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때에 공손헌원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르 보내 탁록에 쳐덜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헌원과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의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허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왕의 법력에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멱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중략)


칭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발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하고, 헌원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즉 그 이전까지는 철기 문명이었지만 철제 무기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볼수 있는 부분과 그리고 앞서 발췌는 미처 못했지만 동이족은 기마민족이었다는 묘사 등을 볼때 추측해볼수 있는 그 들의 모습은



중화민족은 신석기 문명이었고  치우 천왕 이전의 환국 문명은 석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기마 민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당시가 BC 2968 처음 전쟁이 벌어진 당시부터 10여년 정도가 지난 시기이니까..


네 생각을 그만두겠습니다.


그렇다고 환국 문명의 군사력이 대단한가 보자면 딱히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전국 시대 즈음 그러니까 에..BC 461년 사냥꾼 우화충이 반란군을 일으켜 수만의 군세로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는데, 토벌군도 가볍게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수도를 단 한번의 저항없이 포위하였는데 왕이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18개성에서 보내는 토벌군도 잘 막으며 36년간 수도를 지배하다가 홍수가 났는데 이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노려 1만의 병력으로 정벌하여 겨우 우화충을 잡을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기때문입니다.


보통 고대 전쟁의 가장 큰 자원은 인구라고 합니다. 즉 당시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거대한 문명의 규모 만큼이나 물산이나 인력의 수급은 매우 용이했을터일것이며 더욱이 병력의 규모를 생각해볼때 비록 무반을 낮게 여기기는 했으나 수도의 소규모 용병제를 기초로 한 징병제와 더불어 막대한 예비군(....)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이 조선 이상의 문명에서 영토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그 병력의 수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터이나 36년이나 수도를 강탈당하고도 초반의 18여개의 성의 토벌군 외에는 단 하나의 언급조차 없다는 것은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장 중국에서 환국 문명의 일개 연방국보다 작은 국가들에서 40만 생매장이나 10만이니 하는 병력이 막 굴러다는걸 생각해보더라도 군사력의 묘사는 납득이 참 안가는 이야기 이지요,


그리고 이만 하면 해군의 묘사도 나올법하지만 그런거 없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고 밖에 할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치우 이전에서도 수없이 공성전을 치루는 묘사가 있지만 무엇으로 공성전을 치루었는지는 알수가 없으니 당연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환국 문명은 심하게 뒤틀려 있는 문명입니다.


그 들은 연방제라고 하는 서구의 진보된 근 현대의 제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제국이라는 동양의 군주제 적인 명칭과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된 정치체제를 따르고 있지만 관직이나 율법조차 없는 원시적 연맹 왕국 수준의 정치체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따르는 것은 18c 유럽의 절대 왕권을 추종하고 있습니다.


환국 문명은 근 현대에 비견될 서구식의 철학과 인문학적 바탕을 요구하지만 그 들의 삶은 치우 천왕이 철기 문명을 개척하기 이전까지 청동기 문명 이하 였습니다. 


문명의 바탕은 멀리는 빙하기 부터 가깝게는 중석기 문명에 이르기까지가 전부입니다.


이 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극지방에서 이누이트들이 수렵이 아니라 농업을 해야하지만 소빙기 조차 이기지 못한 인류에게 이것은 무리한 일일뿐입니다.


아무리 일본이 멸망한다 할지라도 SOD TOKYO HOT 등 그 들의 삶이 사라지지 않듯이 신시배달국 이후의 분명 남아있어야 하지만 그 무엇도 없습니다. 기록만을 통해 추정해본다면 철기를 훨씬 뛰어넘어 산업화와 농업 생산력의 폭발적 증가를 요구하지만 현실은 기껏해야 석기 이하입니다.


일본의 학계가 한반도의 구석기 문명을 부정하고 감추었지만 함북 종성 동관진의 유적지를 비릇한 전기 중기 후기의 모든 유적지가 속출하듯이 환국 문명이 사실이라면 일본과 중국의 반달리즘으로는 말할수 없는 수없는 유적지가 있겠지만 단 하나의 환국 문명도 또 반드시 있어야 할 환국 문명의 기초가 될 석기 시대의 유적지도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수밀이 즉 수메르에서 나온 단 하나의 기록이나 흔적이라도 있을법하지만 무엇도 없습니다. 고도의 문명 만큼이나 남아있을 기록도 수없겠지만 그 무엇도 없습니다.


정말로 세계에서 스스로를 고립한 문명이라고 밖에 해석할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담은 환단고기는 무엇인가 보자면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독자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서적입니다.


조세, 물류, 관직, 정치, 문화 무엇하나 뒤틀리지 않은게 없습니다.


문화란에서 종교와 기타 이야기를 제한것은 대종교와 단군교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요, 국가의 정치 체제는 서구적인데 정작 문화는 비 서구적인 것을 근간으로 저술 당시의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작가가 도저히 손댈수 없거나 생각이 닿지 않는 부분은 작가 스스로가 철저하게 방목하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이니 민족주의이니 하는 근현대에서나 나올법한 개념 역시 별다른 바탕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사료 역시 크게 상관하지도 할 의도도 없다고 밖에 볼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기록 내지 창작된 환단고기 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작가의 이해 범주 밖의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 단 한줄도 언급되지 않아 환국 문명을 추론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습니다.


본 글도 초기에는 최대한 묘사된 바를 바탕으로 글을 쓰려 했지만 쓰는 사람의 주관을 최대한 끌어낼수 밖에 없는게 환단고기입니다.


즉 환단고기 그 자체의 내용을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사실상 제 3자의 입장에서 라던가, 타 사료를 인용해서와 같은 것은 크게 관용을 베푸시어 기록된 몇몇 부분들(...) 외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 사료라면 가질수 없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연결지어볼수 있겠지요,

출처 증산도 산 완역본과 기타 재판본들, 제 머리속 정도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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