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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1부 - 4. 폭풍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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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8
조회수 : 10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5/31 19: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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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살리타, 한자로 읽어 살례탑이라 부르는 이 장군이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에 대해서는 못 찾겠습니다. =_= 그 이름이 정확히 어떻게 될지도 의문이죠. 바투의 아들의 한자가 비슷해서 그처럼 사르탁이라 읽기도 합니다. 그를 합진과 함께 고려에 왔던 찰라 혹은 차라와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대몽항쟁 후기의 차라타이와의 연관 문제도 있습니다. 뭐 결론은 모른다는 쪽이 맞겠죠.

한편 합진은 카치운으로 읽는 경우가 있더군요. 칭기즈 칸 동생 중에 카치운이 있는데 (...) 에이 설마요.

이 대몽항쟁기의 몽고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습니다. 애초에 병력에 대한 얘기가 적기도 하고, 다른 전쟁들에 비해 투입된 병력이 너무 적은만큼 숨기고 싶어 하죠 (...) 교과서나 아무튼 이 항쟁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세계 최강 몽고군!"을 강조하고, 대몽항쟁기 동안 몽고가 금, 남송에 주력을 투입한 만큼 잘 해야 2군이라는 시선도 큽니다.

하지만 살리타가 권황제, 황제를 대리하여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고, 동진은 물론 고려 등 요동 방면을 완전히 잡기 위해 온 것이니만큼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최정예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떨이를 보낼 정도의 상황도 아니었고, 자기네 통일 다 한 후의 병력이 9만에 불과했던 상황에서 아시아를 쓸어버린 상황이니 3만을 결코 적다고 볼 수도 없죠. 그들도 세계 최강이었던 몽고군의 일원이었습니다. 뭐 사실 -_-; 이 3만 중에 거란, 여진병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 해 주는 사료가 없긴 합니다.

다만 이 살리타 이후의 원정들에서는 얘기가 조금 달라지죠. 그에 대해서는 그 때 얘기하겠습니다.

1. 항복과 학살
몽고가 쳐들어 오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고려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국경에서의 침략에 만성이 돼 있었죠. 서북면에는 우가하 등 여진의 잔당들이, 동북면에는 역시 포선만노의 동진이 심심하면 공격해 왔거든요. 거기다 이들이 공격해 올 때는 몽고군 옷을 입고 나댔기에 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평화일 뿐이었죠.

1231년 8월, 살리타는 병력을 셋으로 나눕니다. 1군은 적거(디주)와 당고(탕구), 포도(-_-)에게 주어 개경으로 길을 닦게 합니다. 이 중 포도는 처음 사신으로 왔던 포리대완과 동일인이 아닌가 하기도 합니다. 2군은 오야이(우예르), 왕영조에게 주어 삭주, 귀주 등 측면을 공략해 배후를 안정시키게 했죠. 자신은 3군을 이끌고 1군의 뒤를 따라 진격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저고여를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려에 쳐들어오게 되는 명분이 됐을 뿐이었죠.

몽고군이 맨 처음 노린 곳은 의주 함신진, 거기엔 부사 전한과 방수장군 조숙창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숙창은 거란군을 토벌한 조충의 아들이었습니다. 살리타는 함신진을 포위한 후 이렇게 외치게 합니다.

"우리는 몽고군이다. 너희는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무찔러 죽이리라"

좀 기니까 간단히 줄이면 "죽을래 살래"였죠. 이는 어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습니다. 몽고군은 일단 항복하면 살려주고 싸울 경우 본보기로 사람은 물론 가축조차도 모두 몰살시키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나타난 3만의 대군, 그들의 선택은 항복이었습니다. 특히 조숙창은 조충이 합진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을 말 하며 그들에게 적극 협조합니다. 그가 글을 삭주 선덕진에 보내 설득하자 그 곳도 항복했고, 몽고군은 그를 앞세워 각 성들에 항복을 요구하게 합니다. 아버지 조충이 영웅다운 대접을 못 받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쉬운 변절이었죠. 뭐 어쨌든 성의 군민은 별 해를 안 입은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될까요? 아니면 매국노라 욕 해야 될까요? 그나마 이 경우는 조금이나마 답을 내리는 게 쉽겠지만, 전쟁이 진행될수록 그 상황 판단은 어려워져만 갑니다.
한편 이 때 이미 거란 유민을 토벌할 때 항복했던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도 투항합니다.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홍다구입니다.

몽고군은 남진을 계속해 철주에 다다릅니다. 이 곳에는 판관 이희적이 있었는데, 그 때까지도 전면 침공을 몰랐던 그는 우가하처럼 여진 찌끄레기들인가 해서 믿지도 않았습니다. 시간 끌기 싫었던 몽고군은 사로잡았던 낭장 문대를 시켜 외치게 합니다. 진짜 몽고군이니 항복하라구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 합니다.

"가짜 몽고군이다. 항복하지 말라."

이에 분노한 몽고군은 그를 죽이려 하다가 그냥 다시 외치게 했는데, 그 때도 이렇게 말 했죠.

"가짜 몽고군이다. 철주는 절대 항복하지 말라!"

그렇게 그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희적 역시 이런 그의 뜻에 부응해 항복하지 않고 항전을 결정합니다. 뜻밖의 저항에 부딪힌 몽고군, 철주가 어느 정도 버텼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준비가 부족했기에 비축해둔 양식이 떨어졌다고 하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틴 것으로 보입니다. 

몽고군의 방식을 아주 잘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성격이 그랬던 것인지 이희적은 성 내의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지른 후 장정들과 함께 자결합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가축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몽고에 의해 초토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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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항복을 거부하고 버티다 죽음을 맞느냐 항복해 노예가 되든 말든 목숨은 부지하느냐의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까지는 제 3의 선택, 버티고 이긴다는 선택지는 없어 보였습니다. 정주의 분도장군 김경손은 항전을 선택해 성이 함락됐고, 용주는 항복했습니다. 항복한 성은 그래도 살았지만, 항복을 선택하지 않은 이 성들에는 학살과 초토화가 뒤따랐죠. 도망간 자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미리 도망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황주와 봉주의 경우 적이 오기 전에 이미 수령들이 철도라는 섬으로 대피시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령들은 싸우느냐 항복하느냐 도망가느냐의 기로에 처하게 됩니다. 그 중 서경은 그 이름답게 다른 성에 비해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고, 몽고군은 무리하지 않고 이 성을 우회합니다. 

한편,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우는 급히 삼군을 편성합니다. 전국의 병력을 끌어모으느라 시간이 걸렸고, 여기에 자기 휘하의, 고려 최고 정예병인 도방 병력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죠.

2. 동선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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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을 이끌고 북상한 장수는 대장군 채송년, 그 정확한 병력은 찾을 수 없군요.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에 산적들이 합류했다는 점입니다. 마산의 산적이라 소개한 그들은 자기 무리 5000명과 함께 귀순했고, 최우는 크게 기뻐하며 이들에 상을 내리고 합류하게 합니다. 이어 관악산에 있는 산적들도 회유하니 그 55명 역시 합류합니다. 

외적의 침략에 맞서는 건 군관민 모두 해야 되는 것이다, 나라의 큰 위험 앞에 사사로운 건 따지지 말자 뭐 이런 교훈이 필요하다면, 적어도 1차 침략까지는 그런대로 잘 돼 가고 있었습니다. 몽고군의 악명이야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뭐 같은 정부든 산적이든 일단 힘을 합치고 봐야 됐으니까요.

다만 이 무리가 정말 5000명이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남은 이름이 없으니까요. 실제 전투에서도 활약한 사람은 딱 그 둘이었구요. (...) 뭐 그래도 이들의 의기는 폄하할 수 없겠죠.

삼군은 황주 동선역에 이르러 대치합니다. 해질 무렵, 첩자가 돌아와 적에게 변화가 없다고 하자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죠. 안장까지 풀고 휴식을 취하던 고려군, 이 때 산에서 어떤 사람이 외쳤다고 합니다. "오랑캐 군사가 왔다"구요.

허둥지둥하던 고려군에 몽고군 8000명이 들이닥쳤습니다. 다행히 완전히 밀리지만은 않아서 상장군 이자성, 장군 이승자, 노탄 등 5~6명이 참으로 악착같이 버텨내게 됩니다. 이 중 이자성은 화살에 맞고 노탄은 창에 찔려 중상을 입었죠. 그 틈을 타 겨우 삼군을 추스린 채송년은 전군을 몰아 반격을 가하고 몽고군은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몽고군의 후퇴는 후퇴가 아니죠.

잠깐 물러난 몽고군은 곧바로 우익을 찌릅니다. 여기서도 산원 이지무, 이인식 등 45명이 우군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막아냈습니다. 이 때 마산의 초적으로 합류한 두 명이 화살을 쏘니 시위소리 한 방에 한 명씩 쓰러졌고, 관군의 기세도 올랐죠. 

아무리 봐도 패배 전멸의 패턴을 밟을 것 같았던 동선역 전투는 고려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몽고군도 이것으로 고려의 중앙군과 만났다는 것, 고려군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 면에서 이 전투의 의의는 작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천하의 몽고군과 정면으로 붙었고, 그것도 기습을 당한 상태에서의 승리였으니까요.

다만 고려군이 이렇게 잘 싸웠던 이유는 왠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죠.

3. 결전 준비
10월, 몽고군 1군은 후퇴해 살리타와 합류합니다. 그들로서는 길을 여는 임무를 충분히 했고, 이제 고려 중앙군과 만났으니 힘을 합칠 때였죠. 살리타 역시 천천히 안주로 남하했습니다. 앞으로 몽고군이 어떤 작전을 펼칠 것인가가 문제였죠. 우선 살리타는 선주와 곽주를 함락시킵니다.

이 때 몽고의 항복 사신이 평주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는 사신은 가두고 편지만 조정에 알립니다. 여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죠.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함신진에 이르렀을 때 맞아 항복하는 자는 다 죽이지 않았다. 너의 나라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항복하면 마땅히 동진으로 향할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비로소 몽고 군사인 것을 믿었다."

왠지 이게 큰 것 같지만, 그렇게 잘 싸운 게 진짜 몽고군이 아닌 줄 알아서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 

진짜 몽고군의 침공을 알게 된 고려, 최우는 채송년만 믿으며 계속 군사를 모으고 있었고 고종은 승려 3만을 모아 3일 동안 밥 먹이며 몽고군이 물러나기를 기도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몽고군의 상황도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특히 살리타로서는 꽤나 머리가 아팠습니다. 2군이 성 하나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 하고 있었거든요. 동선역에서의 패배를 빼면 순조로웠던 계획이 다 틀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정주에서는 분도장군 김경손이 싸우다가 성은 함락된 일이 있었습니다. 성이 불 타는 동안 김경손은 숨어 있다가 12명의 병력만을 이끌고 도주합니다. 

이것까지만 보면 한국의 전쟁사에서 늘 나오는 장수의 도망인 것 같을 겁니다. 뭐 이런 상황에서 나와도 이상하진 않죠. 하지만 그에겐 몽고군에 대한 적개심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김경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함락된 성의 생존 병력들과 미리 도주한 수령과 병력들, 이 정주, 삭주, 위주, 태주의 수령들이 모두 성 하나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성은 여요전쟁의 성지 귀주성이었죠. 여기에 서북면 병마사가 있었습니다. 개죽음 당할 바에야 병력을 모아서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기껏 모인 병력들을 병마사가 달아나서 또 흩어지지 않았을까 할 겁니다. -_-; 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기억이 너무 크죠.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반기고 절대 항전 태세를 굳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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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헬름... 아니 귀주, 이 성을 지키던 서북면 병마사의 이름은 Boxer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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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가올 폭풍에 맞서게 됩니다. 오야이가 이끄는 제 2군 1만명은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며 마침내 귀주성에 다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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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이름이 스포일러죠?

출처 pgr21의 당시 닉네임 눈시BBver.2님의 글입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3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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