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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1부 - 3. 지옥문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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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1
조회수 : 134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5/30 15: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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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은 확실히 능력 하나는 난 인간이었습니다. 이전의 무신 정권이 반란에 문관에 대한 증오를 참지 못 하고 결국 반란으로 끝난 걸 생각하면 일본 막부도 아니고 세습을 성공시켰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반증이죠. 연개소문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원인이 되었었습니다. 그 유명한 이규보를 비롯한 문관들도 포용했고, 나름대로 개혁을 했으며, 반란 하나는 정말 철저히 진압했죠. 하지만 그 막장 행각은 여전해서 연개소문 등을 띄웠던 과거 독재자들도 이들을 띄우진 못 했습니다. -_-; 대신 삼별초는 띄웠지만요.

비교하자면 역시 혹부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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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유민들이 쳐들어오든 말든,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든 말든 최충헌은 자기 권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거란 유민은 몽고의 힘을 빌렸지만 결국 없앴고, 정예병을 모두 개경, 정확히는 자기 집 수비에 돌렸기에 거란군도 결국 개경을 치진 못 했죠. 대신 반란만은 아주 철저히 막았습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와 최향 중 후계자로 선택된 건 장남 최우였습니다. 최충헌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불순한 모의를 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다. 너는 오늘부터 문병을 끊어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결코 부르지 않겠다"

최우의 승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걸 예측한 것이죠. 최우는 그렇게 했고, 조바심 난 반란자들은 최우에게 최충헌이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당연히 그들은 목이 달아났죠. 이렇게 최우는 무사히 승계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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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뽀글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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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는 한국사 사상 초유의 (뭐 삼국시대 초기엔 뭔 일이 일어났을지는 몰라도) -_-; 2대 세습에 성공합니다. 왕을 허수아비로 둔 막부의 세습, 최씨정권이 제대로 탄생한 것입니다. 이거 최우를 연기한 정재곤씨에겐 좀 죄송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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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227년 칭기즈 칸은 서하를 원정하다 세상을 뜹니다. 이렇게 몽고의 운명은 그 후계자에게 맡겨집니다. 

거란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운 조충은 1220년에, 김취려는 1234년에 각기 세상을 뜹니다. 이 둘이 남아 있다면 그나마 화려한 오프닝이겠습니다만, 본 게임은 이런 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세상을 뜬 가운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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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충헌 사후
1219년 9월, 천문을 보는 직위인 태사는 달이 형혹성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귀인이 죽을 것이다는 예측을 합니다. 이에 최충헌은 악공들을 불러 매일마다 음악을 들었지만, 죽음을 피할 순 없었죠. 그도 다 알고 위에서 말했듯 안정된 승계를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가 죽은 것에 대한 고려사 찬자의 평입니다.

"조정의 문무 백관을 모두 그가 농락하던 터여서 하루아침에 몸은 죽었어도 권세는 옮겨가지 않고 그 자손이 대를 이어 국권을 잡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이제현이 조충이 개선하는 길에 최충헌을 죽여야 했다고 할 정도였죠. -_-; 최우가 집권한 후에도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절대권력 최충헌이 죽었으니 반란은 당연한 거였죠.

최충헌이 죽자마자 10월에 의주의 한순, 다지가 난을 일으킵니다. 서북의 여러 성이 호응해서 세력이 커져갔지만, 이극서, 이적유, 그리고 김취려를 보내니 겨우 토벌됐죠. 

1220년 1월에는 최우가 그의 동생 최향을 귀양보냅니다. 차마 죽일 순 없었나 봐요. 2월에는 한순, 다지의 잔당이 동진에 붙어 세력을 떨치던 우가하를 타일러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4월에도 의주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1223년에는 추밀부사 오수기가 최유공, 김계봉과 난을 일으키려다 죽었고, 이 해에....... 왜구가 쳐들어옵니다. -_-; 그 쪽에서도  고려가 막장이 된 걸 알았나 봐요. 삼국시대 이후 최초로 일본에서 한국을 공격한 사례입니다. 이 해부터 우가하는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버리고 마구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의주에 있던 김희제가 이들을 막아내죠. 

1230년에는 유배돼 있던 최향이 난을 일으킵니다. 최우는 간단히 그걸 막아내죠. 

최우도 확실히 능력은 있었는지, 아니면 최충헌의 방식이 정말 정권을 지키기엔 좋았는지 왠만한 위기를 다 견뎌냅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 욕심을 많이 채웠죠. 그가 좋아했던 것은 격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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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서양의 폴로(polo)와 비슷해 보이는데요. 체스가 그랬듯 페르시아, 인도에서 시작돼 서양과 동양으로 각기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태왕사신기에도 이런 격구 장면이 보이죠. 말로 하키하듯이 공을 쳐서 상대의 골대에 집어넣는 것이요. 삼국은 물론 발해, 고려, 조선에서도 이어진 듯 합니다. 

최우는 이 격구를 정말 좋아해서 1229년에는 민가 100여호를 헐고 격구장을 만듭니다. 이 근처의 주민들은 집을 잃은 것은 물론이요 격구장에 먼지가 가득해 물을 떠 뿌리는 일에 동원되었죠. 

이런 가운데서 몽고는 계속 공물을 요구했고, 동진은 몽고에서 벗어나 고려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왜구는 심심하면 남부지방을 침략하고 있었습니다.

2. 몽고와 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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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가 세운 원 제국의 역사에서 야율초재의 비중은 어마어마합니다. 금나라에 지배당한 거란 황족의 후예로서 그는 약탈밖에 몰랐던 몽고를 정주민족화, 혹은 중국화 시킨 인물이었죠. 그는 세금을 받는 것도 몰랐던 듣보잡 몽고인에게 세금 받는 법을 알려줬고, 이런저런 통치의 기본을 확립했습니다. 금을 칠 때도 무조건적인 학살보다는 그들의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게 했죠. 그가 없는 상황에서 몽고가 계속 성장했다면 유라시아에는 농경문명이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그걸 기반으로 한 대체역사물도 있구요. 반면 몽고가 요, 금에서 이런저런 기술을 흡수할 수 없었다면 그런 거대한 제국을 이루진 못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초원에서 약탈하던 실력으로는 남송부터 고려까지도 제대로 공격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뭐 이렇게 배운 세금 걷고 하는 기술이 아직 서툴러서 -_-; 무자비한 세금과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는 물론 곳곳에서 반항을 겪게 되는 이유가 됐지만요.

칭기즈 칸이 죽고 난 후 칸이 된 오고타이는 금나라에 대한 작전을 지속합니다. 황하 이남에서 버티던 금은 개봉부로 수도로 옮긴 후 여전히 30만의 대병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몽고군은 10만 정도였죠. 1232년, 툴루이가 이끄는 3만이 완안합달이 이끄는 금군 15만을 전멸시키며 금은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1233년 5월, 개봉이 함락되면서 금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죠. 

그 동안 만주에서는 포선만노의 동진국과 여진의 잔당 우가하, 가불애 등이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동진국은 이름을 동하국으로 바꾸면서 몽고를 배반, 고려에 협조를 구하고 있었죠. 한편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혼란이 지속되었고, 기껏 세운 미나모토씨의 대가 끊겼습니다. -_-; 겐지가 헤이케를 없애고 세운 가마쿠라 막부였지만 이후의 실권은 후지와라씨에서 호조 씨로 완전히 옮겨갑니다. 그나마 최우가 한 거라곤 일본에 항의해 왜구를 끊은 것 정도였죠. 그 이후에도 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고려 말이나 조선 중기에 비하면 피해가 없다시피 했죠.

몽고에서는 금을 치는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공물을 요구합니다. 대충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금, 은과 의복 + 말 2만 필 못 해도 말 1만 필
- 몽고 1백만 대군의 의복을 고려에서 만들어 줄 것
- 2만 매의 수달 가죽, 명주 3000필, 모시 2000필, 면화 1만근, 먹 천 개, 붓 200개, 종이 10만장, 자초 5근, 홍화, 남순, 주홍 각 50근, 자황, 광칠, 오동나무기름 각 10근 기타 등등등등
- 몽고 황제, 대왕, 모든 군주 등 남자 1천명과 대관 등에 귀녀를 보내고 고려 태자, 장수, 대왕의 자제들도 남녀 각 1천명씩 황제에게 보낼 것

... -_-;

이런 가운데서 동진에서는 칭기즈 칸의 서하 원정을 핑계로 몽고와 연락을 끊은 후 고려에 동맹을 청합니다. 고려에서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군사행동을 병행했죠. 한편 우가하는 고려에서는 몽고군의 옷을 입고, 만주에서는 고려군의 옷을 입고 마구 약탈을 하고 다녔습니다. 결국 1226년 김희제가 독단으로 압록강을 건너 우가하를 소탕하기에 이릅니다. 이 김희제는 다음 해에 역모에 휘말려 최우에게 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 사신 저고여 암살입니다.

1224년 1월, 저고여는 고려에 들어옵니다. 이번에도 공물을 바치라는 것이었지만 고려에서는 미온적으로 행동했고, 그는 아무데나 활을 쏘고 사람을 마구 때리고 다녔다 합니다. 이에 낭중 최홍이 역관문을 잠궈 버리죠. -_-; 김희제가 저고여를 이리저리 달래니 별 일은 없었죠. 그가 고려에 들어올 때 동진에서 이간책으로 "고려가 몽고를 배반했다"고 하기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해까지 저고여는 이런저런 꼬장만 부리며 나가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몽고의 사신은 계속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접대하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게 나갔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왕 앞에서 고려를 모욕하는가 하면 돌아가는 길에 명주와 삼베는 버리고 가는 길까지 일어났죠. 

그런 가운데 1225년 1월, 돌아가던 저고여가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동진의 포선만노가 계획한 것으로 적고 있고, 애초에 "도적이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누가 했을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우가하도 있고, 동진 역시 유력한 용의자죠. 특히 동진의 경우 몽고와 고려를 이간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고려도 몽고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전면전 벌일 생각도 없으면서 이랬을까 싶긴 합니다만... 

이 일로 몽고는 한동안 고려에 국교를 완전히 끊습니다. 당면한 금나라 원정에 온 힘을 쏟고 있었죠. 칭기즈 칸 사후, 툴루이가 임시로 통치하는 기간이 지나고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칸이 됩니다. 이렇게 몽고는 서방의 차가타이, 동방의 테무게 웃치긴(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중앙의 오고타이 칸의 삼두 체제가 이루어집니다. 

금이 멸망의 길로 가던 1231년, 오고타이는 북중국을 치던 4군 3만명을 요동으로 돌립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금의 잔당과 고려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합니다. 그들을 이끈 장수는 살리타, 그는 권황제로 이 지역을 점령한 후 황제의 대리로 통치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가불애를 토벌한 후 곧 압록강을 건넙니다.

고려에서는 아직껏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죠. 8월, 마침내 몽고의 1차 침략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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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고려는 전 세계를 불태우며 진격해 오던 자들과 드디어 맞붙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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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부를 나누겠습니다. 1부 제목이야 당연히... [지옥문이 열리다]겠죠.


출처 PGR21의 당시 닉네임 눈시BBver.2님의 글입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34725#1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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