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야기 -편집자 주
루이 16세 치하에서 대책없는 귀족들과 왕실 때문에 X꼬가 째지는 생활을 감내하던 백성들은 급기야 왕궁과 바스티유 감옥으로 진격하고, 어쩌다보니 성공(?)해버린 혁명의 운전대를 쥐게 된 자들 또한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않는다. 뭐만 했다하면 일이 꼬이는 루이 16세, 그리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뭐만 터지면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정치인들. 안 그래도 졸라 정신없는 상황 속 혼돈의 프랑스에서는 힘있는 놈, 힘있고 싶은 놈,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놈 등 별의 별 놈들로 인해 온갖 시바스러운 일들이 잔뜩 벌어지다가 결국은 왕 모가지는 날아간다. 왕이 없는 프랑스, 사자 없는 곳에 똥개들이 서로 아우성치고, 여러가지 전쟁과 전투가 벌어지며 영웅인 듯 아닌 듯한 인물들이 여럿 나타나는데...
13.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년 7월 28일)으로 불리는 쿠데타로 인해 끝을 맺는다. 로베스피에르는 쿠데타 전날에도 뜬금없이 의회에 나와 반혁명파의 숙청하겠다는 위협 발언을 했다. 예고 홈런도 아니고 예고 숙청이라니 아무래도 인간이 갈 때까지 간 상태였던 모양이다. 쿠데타는 한 순간이었으며 살아있었다면 한편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 에베르파까지 숙청한 로베스피에르는 코뮨의 도움도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졌다.(인과응보인가?)
쿠데타 직후 가담자 중 한 명인 공안위원회위원 바래르는 의회에 나가 조국을 위한 거사였음을 밝힌 뒤 남부 피레네 주에서 올라온 승전 소식을 보고하였다.(엥??) 전쟁의 승리를 같이 엮어 보고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쿠데타에서 멀어지게 해보려는 얄팍한 언론플레이였다. 정말 눈가리고 아웅인 얄팍한 언론플레이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철새정치의 선구자 베르트랑 바래르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그는 정치판에서는 철새종결자였다. 삼부회 때에는 미라보 후작 따까리 노릇하다 미라보가 사망하자 바이이를 따라다녔으며 바이이가 실각하자 남은 제헌의회 기간 동안 의장 노릇을 했다. 국민공회 때 다시 의원이 되었고 공포정치 때 공안위원회 위원이었다. 즉 이때는 권력의 가까이에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뻔뻔하게도 테르미도르 반동 때 쿠데타에 가담했다.
그러나 결국엔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공안위원회였는데 왜 처벌받지 않느냐는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사면받아 나폴레옹의 딸랑이 노릇을 한다. 그럼에도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앨바섬으로 유배가자 왕당파로 변절을 맹세한다. 나폴레옹이 앨바섬에서 탈출하자 얼른 나폴레옹의 딸랑이로 되돌아갔으며 나폴레옹이 백일 천하로 끝나자 자기도 다시 왕당파로 돌아가려다 거부당해 한참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헉헉 길다.)
쿠데타 이후 국민공회에 의해 자코뱅은 해산당하였으며, 공포정치로 숙청되었던 지롱드는 찌끄러기들이 다시 모여 재결성되었다. 또한 코뮨은 지속적으로 감시되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린 방토즈 법(3편에서 말한 반혁명파의 재산을 몰수해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기로 약속한 인기정책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집권시기에서조차 실행되진 않았지만 말이다.)에 여전히 미련을 가진 빈민이 많았기 때문에 코뮨의 반발이 언제 있을지 몰랐다. 요즘이라면 난리 났을 민간인 사찰을 대놓고 했다. 공포정치의 종식이라더니 지배층에게만 그렇고 민중에겐 그렇지도 않았다.(에휴~그럼 그렇지.)
사람들이 가끔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국민공회 = 자코뱅 = 로베스피에르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국민공회 > 자코뱅 > 로베스피에르 정권이다. 국민공회는 그때 의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자코뱅은 국민공회의 여당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에 가입해있었다. 집권 자코뱅당 로베스피에르 내각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이 없어졌다고 국민공회가 없어지는 일은 없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에도 계속해서 프랑스를 통치해 나갔다. 다만 권력의 아성이었던 공안위원회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어 원래의 역할인 군사와 외교만 담당하게 되었다. 안보에 관한 것은 안전위원회에 이관되었다.
공포정치 시기에 시행되었던 것은 대부분 폐지되어 버렸다. 그중에서도 물가상한제는 전격적으로 철폐되었다. 공포정치 시기 말에 부자들이 하도 경제가 안좋다는 언론플레이를 하며(근데 경제가 좋았던 적이 있던가?) 징징 짜길래 로베스피에르도 부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임금을 제외한 물가상한선을 좀 높여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물가는 즉시 상한선까지 폭등하였다. 임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다른 물가만 갑자기 올랐으니 국민의 생활고가 어떻게 되겠는가? 로베스피에르의 인기는 여기서도 바닥을 쳤고 그가 몰락할 때 코뮨의 도움을 받지 못한 또 한 가지의 이유였다. 정치가의 인기는 참으로 즉물적이었다. 반대파들이야 그에게 역습을 가할 기회가 생겨 기뻤겠지만 말이다.
그랬던 전적이 있는 물가상한제를 이번엔 후폭풍에 대한 대책도 없이 전격적으로 철폐하고 본 것이다. 당연히 물가가 미친듯이 뛰었다. 생활 물가가 약 200퍼센트가 뛰었다고 계산하는 사람도 있고 약 800퍼센트가 뛰었다고 계산하는 사람도 있다. 간단히 말해 제대로 계산도 안될 만큼 폭등했다. 또다시 빈민들은 센강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물자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들은 인플레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ㅆㅂ)
기득권층을 위한 기득권층에 의한 정책에 분노한 민중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지만(1795년 4월 제르미날 봉기, 5월 프레리알 봉기) 지배층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를 번번히 진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국민공회의 인기는 바닥을 모르게 떨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 회기의 마지막에 그 끝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방데미에르의 봉기’였다.(1795년 10월 5일)
단두대
살벌하게 생겼다. 시험삼아 목 넣어 보신분? ㅎㄷㄷ
원래는 왕당파(?)의 반란으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 반란은 국민공회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국민공회는 앞서 말한 4월의 제르미날 봉기와 5월에 있었던 프레리알 봉기와 엮어서 자코뱅의 잔당들을 마저 숙청한 뒤 8월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선거 결과가 최악(?)이었다. 기존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의원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물갈이가 되었다. 선거에서 참패를 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민생을 등한시하고 노골적으로 기득권층만 챙겨주는 정책을 폈으니 말이다. 비상사태를 맞은 국민공회. 결코 해선 안될 짓을 저지른다.
국민공회가 참패라는 선거 결과를 받은 다음 달인 9월 국민공회는 갑자기 헌법을 개정한다.(물론 날치기로) 새로이 개정된 헌법의 내용 중에는 현직의원의 3분의 2 이상에게 다음 의회에서 반드시 의원 자리를 준다는 내용도 있었다.(방탄국회?) 왜 그런고 하니 ‘은퇴하고 나면 의원들이 먹고 살게 없어서 정치에 뜻을 둔 이들이 정치에 나서지 못하는 바 그런 이들을 돕기 위해서’란다. 장난하냣!!!
그리고 이에 따라 ‘잘못 뽑힌’ 의원들의 선거를 다시 치르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국민공회가 압승을 거뒀다. 시민들은 이 황당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느냐 아니면 헌법 불복을 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ㅆㅂ 누가 이딴 결과에 승복하겠냐!?!! 이딴 결과에 승복하느니 헌법에 불복하고 만다. 국민을 우롱하는 저딴 망할 헌법. 국민이 우습냐? 저런 거에 승복하는 인간은 미쳤거나 노예 인증한 인간 뿐일 거다.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헌법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국민을 우롱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자 국민공회정부에서는 이들을 대뜸 모조리 왕당파로 몰아세워서는 시위를 반혁명반란으로 규정해 버린다. 그리곤 테르미도르의 반동 때 군대를 이끌었던 폴 바라스를 사령관으로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게 했다. 또다시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ㅡㅡ;;;) 시위대는 정부에 의해서 반란군으로 몰리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말로 반란군이 되었다.
그런데 쉽게 생각했던 반란이 생각 외로 커져버렸다. 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민중들이 가담하는 바람에 반란군이 정부군보다 무려 5배나 많아져 버렸다.(대략난감;;;) 게다가 ‘그래봤자 정규군도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무식하게 싸웠다가 병사가 3천까지 줄었다.
난감해진 바라스가 쩔쩔 매고 있는데 한 명의 또라이가 아니 천재 군인이 나타나 그를 도와주었다. 나폴레옹이 바라스를 대신해서 군대를 지휘해 시민들이 있는 도시 한가운데로 대포를 쏴 갈기는(그것도 산탄으로...)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이런 ****) 전투 이후의 파리에는 계엄령이 철폐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군대의 감시하에 놓였다.(공안정국?)
‘방데미에르의 봉기’의 진압
영웅이 좋다는 인간은 여기 와서 대포 한방만 맞고 나서 생각 좀 해보길...
한편 국민들에게 대포를 쏴댄 덕에 바라스는 새로운 정권에서 수반 자리를 차지했고, 나폴레옹은 총재정부의 국정원장과 기무사령관 자리를 동시에 꿰찼다. 국민들의 피로써 권력자들은 그들만의 행복한 축제를 벌였다. 나폴레옹이, 독재를 했지만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쿠데타를 했지만 국민들을 잘 살게 해주었다는 장군님도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면 여기 와서 산탄포 한번만 맞아본 뒤 생각해 보길 바란다.
방데미에르 봉기가 있은지 20일 후(10월 25일) 5명의 총재를 공동수반으로 총재정부가 들어섰다. 바라스는 그 총재 중에서도 중심적인 인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카르노라는 인물이 있긴 하였지만 그는 주로 업무만으로도 바빴다.) 날치기 헌법 개정을 비롯해 시작 전부터 막장을 예고하고 있었던 총재정부는 시작하자마자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고 막장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이제는 너무도 똥값이 되어버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부자들의 장롱에나 쌓여있는 아씨냐 국채를 갚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모라토리엄 선언해버렸던 그놈의 아씨냐를 이제야 느닷없이 정리하겠단다.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멀쩡한 사람들 자살하게 만들어 놓고는 이제서야! 이젠 부자들만이 아씨냐를 가지고 있는 지금에서야!! ***** 욕이 안나올 수가 없다.
아씨냐는 국가소유가 된 토지를 담보로 발행된 국채였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1편 참조) 이제 아씨냐를 가진 사람들에게 국유지를 나누어 준다고 했다. 결국 기득권층에 아씨냐가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국민의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다. 국민의 혈세로 재벌의 배때지를 채워주는 짓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이 정책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가장 소리 높여 비난한 사람은 역시나 그라쿠스 바뵈프였다. 하지만 이 호민관은 너무 나댔다. 그의 별명이기도 한 고대 로마시대에 살았던 선배들처럼 그도 이제 갈 때가 되었다. 다시 혁명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던 그는 1796년 5월 혁명이 국가시책인 정부에 의해 ‘내란음모예비죄’로 체포되었다.(이봐! 혁명이 국가시책이라면서? 말이 다르잖앗!!!) 그리고 다음 해인 1797년 5월 27일 단두대행을 한다. 힘 있는 기득권층한테 개기면 이렇게 된다.
폴 바라스
얼마나 많이 해 처먹었는지 별명이 ‘악덕의 지사’였다고 한다.
나중에 나폴레옹에게도 돈을 받아먹는 조건으로 권력을 내놓았다.
역사를 들여다 보면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비열했던 인간이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편안히 죽는가하면, 정의감이나 사명감에 찬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경우가 많다. 바뵈프의 삶 또한 그랬다. 대부분이 혁명은 있는 인텔리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초기의 혁명가들 중 혁명은 빈자들의 것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몇 안되는 혁명가로 평생 권력에 개기다가 죽었다.
이에 똑같은 사실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깨닫고 느끼는 바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역시 세상은 몸사리며 사는 게 최고야.”라며 소심해지는 작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차피 죽는 건데 나도 저렇게 한번 개기며 살아보자.”라며 도리어 똘끼를 충전하는 인간도 있다. 필자는 프랑스 혁명 당시 좌충우돌했던 프랑스인들의 모습을 전달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고 무엇을 배울지는 독자의 몫이다.
14.
어울리지 않게 심각하게 빠졌던 이야기를 되돌려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 가자. 바뵈프가 체포되기 2달 전인 1796년 3월 총재정부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재개한다.(이놈의 전쟁 이젠 지겹다.) 이탈리아 원정이었다. 춘추전국이었던 이탈리아에는 대프랑스동맹에 참가했던 샤르데냐 왕국, 양 시칠리아 왕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가 존재했지만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가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 전쟁의 목적은 그 오스트리아 세력을 밀어내는데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 원정은 국민공회 때에도 시도된 바 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한 이번 원정은 이전과는 달리 연전연승, 이탈리아 북부를 휩쓸고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허걱!) 원정의 직접적인 타겟이 되었던 샤르데냐는 항복하였고 오스트리아도 결국 GG를 쳤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은 교황령까지 쳐들어가서는 교황에게까지 삥을 뜯었다.(이젠 신도 안무서운 모양이다.) 1797년 10월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랑 화약을 맺고 대프랑스 동맹에서 탈퇴한다.(캄포포르미오 조약) 그리곤 이탈리아 북부를 프랑스랑 갈라먹는다.(아... 또다시 강대국의 횡포가... 이래서 힘없는 나라는 서럽고 또 서럽다.ㅜㅠ) 프랑스 쪽에선 갈라먹은 땅에서 위성국들을 만들어 괴뢰정권을 세웠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잇따라 승전보를 보냄으로써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 바로 1, 2년전 자신들에게 산탄포를 갈겨댄 인간이 누구였는데 프랑스인들 벌써 잊어버리고는 새로운 전쟁 영웅에 환호했다. 사람들은 나쁜 일을 빨리 잊는다고 한 마키아벨리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영웅이 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도 귀국할 생각을 안한다. 원정군을 데리고 이탈리아에 눌러앉아 자꾸만 뭉그적거린다. 총재정부에서 귀국을 독촉해도 아직 해야 할 게 많이 남았다며 자꾸만 차일피일한다. 왜 그랬을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사병화하여 군벌이 되어 있었다. 점령지에서는 거의 왕처럼 행세하고 있었으며 자기 말 한마디면 이탈리아에선 안되는 일이 없었다. 당신이라면 프랑스로 가고 싶겠는가?(권력의 달콤한 맛을 제대로 본 모양이다.)
이렇게 되자 총재정부는 똥줄이 탔다. 총재정부의 막장과 인기 없음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총재정부는 처음부터 공안정국으로 통치를 하였다. 그 공안정국을 일선에서 지휘하던 안기부장 나폴레옹이 지금 군대를 데리고 이탈리아에 가서는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이다. 1797년 선거가 되자 더욱 난감해졌다. 자신들의 지지도를 생각해 볼 때 선거의 패배가 뻔한데 손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폴레옹에게 독촉이 아니라 매달렸다. 27살짜리한테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한 끝에 나폴레옹이 보낸 군대를 이용해 관제선거를 하여 간신히 선거에 승리를 할 수 있었다.(이젠 이넘의 선거부정을 밥 먹듯이 하네.ㅡㅡ;;;) 이번에도 시위가 일어났지만 나폴레옹이 보낸 군대가 또다시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탈리아에서 뭉그적거리던 나폴레옹, 1797년 12월 결국 파리로 귀환한다. 영웅이 되어 귀환한 정치 군인과 총재들 사이에서 정치적 알력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이 때 이 정치적 알력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외무장관인 탈레랑 전(前)주교님이시다.(이때는 파문 당해서 성직자가 아니었다.ㅡㅡ;;;)
이 시기 자기 자신도 xyz사건이라는 사고를 쳐서 제 코가 석자건만 남의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시는 오지랖을 보여주신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내에 있어서 그 인기가 총재들에게 부담스러운 거라면(나폴레옹이랑 경쟁할 인기도 없으면서...) 나폴레옹이 외국으로 나가면 된다. 나폴레옹을 지휘관으로 하는 이집트 원정을 제안한 것이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나폴레옹은 무슨 배짱인지 받아들이고 1798년 7월 이집트 원정이 시작된다.
잠깐 나온 탈레랑과 xyz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대프랑스 동맹으로 프랑스가 곤경에 처하자 혈맹인 줄 알았던 미국이 프랑스를 돕지 않고 내빼는 바람에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이 후 미국은 프랑스 대신 영국과 수교하였는데 프랑스가 보복으로 미국 선박을 나포하기 시작하자 결국 두 손 들고 프랑스와 재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탈레랑이 상당한 양의 뇌물을 로비자금으로 미국의 특사 E.게리에게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뇌물요구에 게리는 크게 놀라 “안돼. 한 푼도 줄 수 없소!”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만 보면 게리란 인물은 매우 곧은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곧기는 개뿔. 게리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으로 게리맨더링이라는 기술을 선보인 선거부정의 선구자이시다.(참 훌륭한 건국의 아버지를 두신 미국ㅋㅋㅋ) 결국 화해의 모색은 깨지고 한때 혈맹이라던 미국과 프랑스는 또다시 한동안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E.게리
어메리칸 스톼일 민주주의의 아버지!
근데 이분도 M형 탈모가...(필자도 요즘 탈모의 위기를 느끼고 있어서 남의 일같지가 않다.)
15.
이집트원정으로 와 보자. 나름 기밀유지에 신경썼을 테지만 영국에선 프랑스의 이집트원정을 알아채고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처음에는 운이 좋게도 영국해군과 길이 엇갈리는 덕에 무사히 이집트에 상륙하여 이집트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뒤늦게 쫓아온 넬슨제독 지휘 하의 영국함대는 프랑스의 수송함대를 박살내버린다. 그로 인해 프랑스군은 이집트에 고립되어 버렸다. 이제 무조건 이집트 점령을 성공해야만 했다. 넬슨은 이때를 시작으로 평생 나폴레옹을 따라다니면서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는다. 넬슨은 그야말로 나폴레옹을 엿먹이기 위해 태어난 사나이였다. 오죽했으면 죽을 때조차 나폴레옹을 엿먹였다는 사실을 신께 감사드리며 죽었다고 한다.(나폴레옹한테 먼가 유감이라도?)
이집트에 갇혀버린 프랑스군, 일단 이집트를 점령하긴 했는데 오만 난감한 일에 마주했다. 우리는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을 생각하면 로제타석과 “수천 년의 역사가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라는 나폴레옹의 연설 같이 멋진 것만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론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머 전쟁이란게 다 그렇지.) 고향과는 다른 기후와 질병에 수송함대는 박살나서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은 끊기고, 밤만 되면 게릴라가 나타났다. 게다가 이집트의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선제공격을 하기위해 시리아로 갔지만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시리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카이로에 되돌아 왔을 때 총재정부의 인사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로운 총재는 시에예스 주교님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거물이었던 시에예스 주교님은 평소에 총재정부에 불만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오히려 총재자리에 나왔다. ‘먼가 왕창 사고를 치려고 작정한게 아닐까?’하고 짐작한 나폴레옹, ‘지금이 기회다’라고 느꼈다.
학술 연구와 나폴레옹의 멋진 연설 뒤에는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시달리는
프랑스 병사의 모습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 고국으로 도망가고
자기들만 남겨진 부하들은 2년을 더 버티다가 오스만 군에 항복하고 만다.
‘찬스’를 포착한 나폴레옹. 장군이 군대를 적국에 내버려두고 혼자서 본국으로 도망 아니 점잖게 귀국(1799년 10월)이라 말해주자. 어쨌건 프랑스로 허둥지둥 돌아온 나폴레옹은(도중에 넬슨 제독과 폭풍우에 쫓겨 죽을 고비를 넘겨 구사일생했지만) 탈레랑의 주선으로 시에예스를 만난다. 시에예스는 아니나 다를까 총재정부를 엎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이 총재정부를 엎어버리기로 작당한 그들은 행동을 준비했다.
나폴레옹은 장군들을 불러 모으고 탈레랑은 경찰청장관인 푸셰를 가담시켰다. 민중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경찰의 우두머리가 쿠데타에 가담한 것이다. (머 우리에겐 경찰이 권력의 주구노릇하는 모습이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왜 눈물이ㅠㅠ) 물론 총재정부는 입이 찢어져도 민중의 정부라 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나폴레옹이 귀국한 다음 달인 11월 10일 일어난다. 프랑스 혁명력으로는 브뤼메르 19일이었다. 이것이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이다.(브뤼메르 18일 쿠데타는 정작 브뤼메르 18일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다.) 의원들을 파리 근교로 끌고가서는 가두어 놓고 자기와 측근들을 신임총재로 뽑으라고 강요했다.(대머리 장군님 생각난다.)
그런데 하루종일 지나도 말을 안 듣자, 열받은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해서 말그대로 의회를 박살내 버린다. 전쟁을 하듯이 의원들을 공격해서는 의회를 없애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의원들을 뽑아서는 의회를 차린 다음 헌법까지 새로 만들어 버린다.
이 와중에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되 언제든지 그를 의회에서 탄핵할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그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대세가 나폴레옹에게 기운 것을 알자 깨갱하고 침묵. 이렇게 통령정부가 새로이 서고 나폴레옹은 무제한 연임이 가능한 제 1통령이 되어 그의 독재를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권력을 잡자 인기정책으로 대사면령을 내린다. 도망귀족, 왕당파, 반혁명파, 자코뱅당 등 프랑스에 대한 충성 맹세만 하면 모두 사면해 주기로 했다. 이 정책은 분열되었던 프랑스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하였다. 또 독재자란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최대한 의회를 존중해주는 척했다.
그러나 이것은 뜨거운 물에 개구리 삶기였다. 처음부터 갑자기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놀라서 뛰쳐나오지만 뜨겁지 않은 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삶아져 죽임을 당한다.
프랑스인이 뒤늦게 나폴레옹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그의 독재 체제가 너무도 강고해져 황제의 자리를 넘볼 정도가 되어 있었다. 우리도 이 사회의 사소한 부당함들을 계속해서 그냥 보아 넘기다가는 어느 순간 깨닫고 보면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
이른바 절대왕정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이렇게 나폴레옹의 독재로 종말을 맞았다.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필자의 솜씨 부족으로 다 표현하지 못해 아쉽다.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딱히 다르지 않았다. 우리와 비슷한 정치적, 사회적 모순과 고민을 안고 있었으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우리처럼 고민했다. 미라보, 당통, 나폴레옹, 바라스, 바래르 등 모두가 우리 시대에도 어디선가 본 인물들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