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과거의 역사를 믿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했고, 오랜 세월 내분은 심해져 갔다."
몽고 경기병 만구다이
"하늘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질 때까지. 그리고 새로운 적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린 결국 파멸의 끄트머리로 내몰렸고, 마침내 혼돈의 시대가 찾아 왔다."
워크 아니
대 몽 항 쟁
對 蒙 抗 爭
1부. 지옥문이 열리다
-----------------------------------------------------------
1. 요동의 혼란
"금나라 사람들이 재차 통첩하여 양곡을 빌려 줄 것을 요구하자, 국가에서는 변신을 시켜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1216년까지, 고려는 대륙의 격변하는 상황을 알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금이 혼란 속에 고려에 식량 등의 지원을 요청할 때도 반응은 이랬죠.
"아나 황제라 불러줬으면 됐지 뭘 또 달라고 난리야?"
하다 하다 지친 금나라에서 직접 의주에 들어와서 곡식을 사 갔는데, 이 때 고려의 상인들이 폭리를 취해 큰 이득을 올렸죠. 열 받은 금나라 장수가 이들을 붙잡아 갔는데 다 도망쳐 버립니다. -_-; 1216년 7월 금나라의 동경 총관부에서 사신을 보냈을 때에야 고려는 금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수도까지 함락됐던 금나라는 겨우 몽고와 강화를 맺고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금나라 내의 거란인들이었죠. 야율육가, 혹은 야율유가(엘루류게)가 요동에서 스스로를 요왕이라 하며 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곧바로 몽고에 항복했고, 이에 반발하여 야율사포(엘루시부)는 야율유가를 내쫓고 대요수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금에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포선만노는 따로 자립, 대진국을 세웁니다. 이후 그들이 동쪽으로 쫓겨나서 백두산 근처에 세운 게 동진국이죠.
참으로 막장으로 흘러가던 요동의 상황, 이 중 야율유가와 포선만노는 몽고에 복속하고, 금나라는 이들을 제어하지 못 했으며, 이들은 대요수국을 공격합니다. 대요수국은 이를 막지 못 하고 내분가지 겹쳐 야율사포가 암살당했으며, 몽고에 흡수되지 않은 최후의 거란인들은 쫓기고 쫓기다 대부영, 위화도로 비정되는 압록강의 섬에 있던 금군을 격파하고 주둔합니다. 겨우 살았지만, 이들에게는 갈 데가 없었죠. 결국 그들은 대규모로 남하합니다. 하필이면 고려였죠. 그 수는 모두 9만이었습니다.
+) 이 시기 기록은 다들 혼란스러워 하는 모양입니다. -_-a 일단 이 쪽이 맞는 것 같네요.
8월 14일, 여요전쟁 이후 근 200여년만에 거란의 대규모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을 이끄는 장수는 아아(鵝兒)와 걸노(乞奴).
2. 시작
당시 고려 행정구역
당시 북계 병마사 독고정은 참 황당한 서찰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후일에 황기(黃旗)를 세울 것이니, 너희는 와서 황제의 명령을 들으라. 오지 않으면 군사로 쳐들어갈 것이다"
누런 깃발, 황제를 자칭한 것이죠. 그러면서 양식을 요구했고, 독고정은 거부합니다. 뭐 어차피 안 주면 뺏을 기세로 보낸 거겠죠. 그들은 삽시간에 의주, 정주, 삭주, 창주 등 압록강변을 휩쓸어 물자를 약탈해 갑니다. 단지 병력뿐만 아니라 노약자, 여자, 어린애 등 온 가족들을 데리고 아예 고려 땅을 빼앗아 눌러 살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한편 삭주 분도장군 노인유는 이 때 부처에 빌기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사가 알리자 하는 말이 이거였죠.
"거란 사람도 역시 사람인데 사람을 차마 죽이기야 하겠느냐?"
그러다 적이 들어오자 곧바로 달아나 버립니다. -_-;
조정에서는 이들을 맞아 삼군을 편성하니 그 병력이 13000이었습니다. 17일에 병력을 소집해 21일에 출발, 이 때 거란군은 청천강 북쪽을 완전히 휩쓸고 있었죠.
당시 거란은 양수척을 길잡이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후백제의 후예로 아무리 해도 복속하지 않아서 청북으로 이주시킨 이들이었죠. 식민지 개척 때 죄수들 보내는 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구요. 이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자기들끼리 살았습니다. 헌데 이의민이 이들에게 가혹하게 공물을 징수했고, 이게 도화선이 돼 버렸죠. 이들 덕분에 거란군은 수월하게 진격했습니다.
+) 이 때 결론을 내리기 힘든 게 최충헌의 태도입니다. 당시 그는 변방에서 첩보가 오자 "어찌하여 이러한 사소한 일을 가지고 역기(驛騎)를 번거롭게 하고, 국가를 놀라게 하느냐"고 하고 그를 유배 보냈는데, 이에 변방의 장수들이 "적군이 두세 성을 함락시킨 뒤에 보고하자"고 해서 방비가 늦었다고 하거든요.
문제는 거란군이 쳐들어온 게 13일, 그런데 삼군이 편성된 건 17일로 꽤나 빠른 수준이죠. 뭘까요 이건 -_-a 그냥 최충헌을 까려고 덧붙인 건지, 아니면 요동의 분쟁이 압록강에까지 번진 상황에서 신경을 안 쓴 걸 말 한 건지... 압록강에 여럿 있는 섬들이 누구의 땅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니까요. 고려사에는 13일로 돼 있지만 그 한참 전에 공격이 이미 시작된 것일 수도 있구요. 이렇게 볼 경우 제대로 된 보고가 들어온 게 13일이겠죠.
21일, 삼군의 병마사는 노원순, 오응부, 그리고 김취려였습니다. 그 때 거란군은 기세등등해서 항복하라는 글까지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청북 일대를 얼추 쓸었다 생각하자 남하를 시도했는데, 다행히 조양진에서 유성장과 이순로의 활약으로 청천강 도하는 막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번 사이 삼군이 도착했죠.
전투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노원순은 우선 피아의 강약을 확인하기 위해 삼군에서 100명의 별초군(특공대죠 뭐)을 뽑았고, 여기에 신기군 (기억하시죠?) 40명을 뽑아 총 540명을 편성해 교전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밀리던 고려군은 후군 낭장 정순우가 역공을 퍼부으면서 순식간에 승리합니다. 그는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깃발을 든 적을 죽였고, 이로 인해 적이 혼란스러워졌던 것이죠. 이 전투에서 82명을 죽이고 10명의 포로를 얻습니다.
이렇게 고려의 주력군이 도착하자 숨 죽이고 있던 병력들도 반격을 가합니다. 삼군은 연주(개천) 동쪽에서 적 1백을 목 베었고, 서북 열읍의 김공석, 현장 등도 각기 수백 명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으며, 서경의 병력도 조양(역시 개천)에서 1백 60여급을 목 벱니다. 이어 삼군은 귀주까지 진격, 200여 명을 참수하고 39명을 사로잡죠.
하지만 적은 아직도 많았기에 노원순은 원군을 청합니다. 그들은 창주부터 영변까지 흩어져서 약탈을 계속하고 있었죠. 삼군은 각개격파를 시도했고, 신리 싸움에서 190급, 조종수에서 760급 등의 전과를 올립니다. 흩어졌던 거란군은 다시 집결해야 했죠. 장소는 개평이었습니다.
3. 그저 시작일 뿐
김취려
삼군은 개평에서 거란군과 맞섭니다. 이 때 노원순과 김취려는 회의를 열죠.
노원순 : 저들이 우리보다 많고 우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데다 양식도 다 떨어졌으니 후퇴하자.
김취려 : 우리 군사가 여러 번 이겨 투지가 왕성하니 지금 공격한 다음에 생각하자.
김취려는 노원순을 설득하고 진격, 세 번 싸워 세 번 다 이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로 그의 맏아들이 전사하죠. 이 전투로 적 2천 4백을 베고 강에 빠져 죽은 적도 1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남은 적이 창주로 도망쳤는데 길가에 버려진 여자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1만 마리의 소가 울어대는 것 같았다"고 하죠. 낙오된 적은 이렇게 말 하며 빌었습니다.
"우리들이 귀국의 변방을 소란하게 한 것은 실로 죄가 있지만 부녀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제발 다 죽이지는 마소서. 저희들은 날을 정하여 스스로 돌아가겠습니다"
김취려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보내준 후 삼군에서 2천명씩을 추려 추격하게 합니다. 여기서 많은 물자와 말과 소를 노획했는데, 그 가축들은 모두 허리와 엉덩이가 찔려 불구가 돼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에서 쓰지 못 하게 한 것이었죠. 고려군은 이들을 청새진까지 추적해 크게 승리합니다. 이 전투로 적장 아아, 걸노가 모두 죽었다고도 하구요.
크게 승리한 삼군은 연주까지 후퇴합니다. 시작은 생각보다 쉽게 막았죠. 하지만, 문제는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이 다시 창주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었죠. 연주에 집결하러 이동하던 김취려의 후군도 박천에서 적의 기습을 받게 됩니다. 그는 노원순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노원순은 거부, 하지만 그는 혼자서도 적을 막는데 성공합니
다. 이쯤 되면 거란을 막은 건 거의 김취려 뿐이었죠. 노원순도 직접 술을 따라 주며 축하해 주었고, 여러 성의 백성들도 김취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했습니다.
"이번에 강적과 대치하여 싸울 적에 그 처지가 어려웠는데 개평ㆍ묵장ㆍ향산ㆍ원림의 싸움에서 후군이 매양 선봉이 되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무찔러서 우리 노약으로 하여금 생명을 보존하게 하니, 보답할 길이 없어 다만 축수할 뿐입니다"
여요전쟁을 얘기하며 한 영웅의 활약이 적을수록 그 전쟁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부터 김취려 개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심했죠. 거기다 그는 후군이었는데 앞뒤 안 가리고 모두 나서야 되는 상황이었죠. 아무리 적이 죽기살기로 밀고 들어온다고 해도 고려의 최고 요충지가 이 청북이었습니다. 200년 전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해 10월, 거란은 다시 대규모로 쳐들어 옵니다. 금시, 금산 왕자가 이끄는 본대였죠.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큰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고, 소규모 부대는 여러 차례 격퇴했죠.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마침 겨울도 오고 있었죠. 하지만, 그건 모두 작전일 뿐이었습니다.
10월 말, 거란의 소규모 병력이 노원순을 기습합니다. 김공석이 이를 쉽게 막아내면서 노원순은 안심하고 성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게 하죠. 하지만, 그 사이 거란군이 청천강을 도하합니다. 당황한 노원순이 이를 막으러 출진하지만 거란군 본대가 돌격해 오면서 큰 피해를 입고 말죠. 이 전투로 전사자만 1000명이 넘었고 장군 이양승 등이 전사합니다. 고려군의 주력을 대패시킨 거란군은 급히 진격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병력을 분산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성을 공격하지도 않고 곳곳을 약탈하면서 진격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 참화사, 묘덕사, 화원사 등이 불탔고, 노원순이 급히 저지했지만 두 차례나 패합니다. 그들은 어느새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서해도(황해도)까지 들어가고 있었죠. 조정에서는 원군을 보내 이를 저지하려 하지만 맞설 수 없었습니다. 12월 18일, 거란군은 황주를 약탈했고, 백주(황해도 백천), 염주(연안군)까지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이 때 조충이 염주에서 버티고 노원순의 군대 등 후방의 군대가 남하하면서 고립될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다시 후퇴합니다. 위험이 겨우 지나간 것이죠.
하지만 이것도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4. 최충헌
더 큰 문제는 최충헌의 태도였습니다. 10월부터 그는 정숙첨을 원수로, 조충을 부원수로 삼아 원군을 파견했습니다. 승려까지 모두 뽑은 대군이었지만 이 정숙첨이 낙하산이었죠. -_-; 거기다 최충헌은 정예병은 모두 자기 집을 지키게 하고 약한 병력만 정숙첨에게 딸려 주어습니다. 최충헌의 사병을 사열하니 몇 리에 이르렀다고 하고, 이 중에서 적을 치러 나가겠다고 한 자가 있으면 섬으로 유배시킵니다.
거기다 한 가지 어이 없는 짓을 벌이니, 사병을 늘여 세워놓고 연극을 한 것이죠. 그 부하들은 거란군으로 꾸며 그들을 생포한 것을 연극했고, 연기를 잘 하는 이에게는 큰 상을 주었습니다. 이 때 시어사 김주정이 제일 열심히 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죠. 피날레로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에서 선녀가 내려와 하례하는 듯한 연기를 하게 했습니다.
이 쪽은 이미 딴 세상이었던 것이죠.
안 그래도 낙하산인데 이런 상황까지 닥치니 정숙첨이 열심히 할 거라 기대할 순 없었죠. 그는 적을 치지 못 하고 후퇴만 반복했고, 그나마 조충만이 군율을 똑바로 세워서 군대 다웠을 뿐이죠. 결국 정숙첨은 짤리고 조충이 원수가 됩니다.
다음 해 2월, 거란군이 개경을 칠 것이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최충헌은 백관들까지 성 밖으로 내보내 지키게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 사병들은 열심히 그의 집을 호위했죠.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와 반역 사건이 벌어집니다. 흥왕, 경복, 왕륜 등의 여러 절의 승려들이 "거란군이 온다"고 하면서 혼란을 일으켰고, 문지기를 죽이고 최충헌의 집으로 쳐들어 갑니다. 하지만 그의 사병들을 이길 순 없었죠. 이 때 숙청된 중이 800명에 달합니다.
반란은 전주에서도 일어납니다. 처음에 개경으로 징집됐던 그들은 명령을 거부, 이에 따라 나주의 병력도 움직이지 못 하고 있었죠. 충청 안찰사가 겨우 이를 막아냈구요. 한편 현 평택인 진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했죠.
이쯤 되면 외부의 위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170년 무신정변 이후로 나라의 주인은 네 번, 이고까지 치면 다섯 번이나 바뀌어 왔습니다. 최충헌은 그래도 문신들도 적극 기용하고 안정적으로 전권을 틀어쥐면서 조금 다른 면모를 보였지만, 국가를 통치할 철학이 없는 상황에서 기댈 건 자기 힘 뿐이었죠. 그에게는 외적보다 내부의 반란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란과의 싸움에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순 없었죠.
위험한 상황을 몇 번 겪었지만, 확실히 나라가 망할 정도의 위기까지 가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때문에 최충헌이 더 안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최후의 거란인들이 몰고 온 건 고려의 운명은 물론 이제 막 정체성이 확립돼 가던 한민족의 생존조차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1216년 12월, 동진국이 몽고에 복속됩니다.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금나라는 이 동진국을 고려에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그건 고려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거란의 침략이 계속되는 동안, 변방에서 계속 싸우던 장수들은 또 다른 무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것은 북방과 중원을 휩쓸고 있던 몽고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