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이집트. 15:39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시대가 와도, 그 흐름을 비껴가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카이로 외곽의 서민 주거단지가 그랬다.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차륜형 차량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는 곳.
시간의 흐름은 인간만이 가장 존엄했던 시절에 멈춰 있었다. 카이로 시내를 걷는 옴닉은 그다지 시선를 끌만한 요소가 되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라면 필요 이상으로 주변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의 몸에 꽂히는 타인의 시선에 만족을 느끼는 옴닉이라면 한번쯤은 지나쳐 볼만 했다. 대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게 되는 곳이 고물상일지 아니면 자기 집 침대 위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이라처럼 굳어버린 주택단지 틈바구니의 작은 노상 찻집에, 제멋대로 삐친 덥수룩한 머리를 카우보이 햇으로 내리 누른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겨우 두 개가 놓인 테이블 중 하나에서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응당 빈 테이블에 앉아야 했건만, 그는 굳이 먼저 온 손님이 있는 자리를 택했다.
남자는 등받이에 한껏 몸을 파묻은 후, 낡은 테이블 위에 양발을 올려놓으려다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먼저 온 손님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주름이 파인 입가에 옅은 웃음을 드리웠다.
"이런 것 싫어하셨죠?"
"기억해 주니 다행이네."
세월의 흐름에 녹슨 목소리가 깊게 눌러 쓴 후드 아래로 새어 나왔다. 젊은 시절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추고 있던 검은 머리는 하얗게 세어 시간의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 머리카락이 아직 검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머리는 여전히 길구나. 게다가 그 멍청한 수염은 뭐야?"
"…"
"그리고 모자랑 벨트는 어떻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부사령관님이 맞군요. 혹시나 싶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네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오랜만이야. 제시."
"그렇습니다. 부사령관님."
제시 맥크리. 시대의 탕아에서 정의를 관철하는 고독한 용병으로 거듭난 남자. 그는 지금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 중 하나와 재회했다.
아나 아마리. 오버워치의 부사령관이자 파라의 어머니. 그리고 오버워치 설립 이후 가장 뛰어난 저격수였고 앞으로도 그 영예를 잃지 않을 사람이었다.
파라솔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던 노점 주인이 다가와 맥크리에게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물었다.
아무거나 달라고 대답한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단절되어 있었는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게 됐어."
"무슨 말씀을! 아름다운 숙녀분의 데이트 신청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미녀라면 조금 놀라긴 하겠지만요."
맥크리의 농담에 아나가 슬며시 웃었다.
노점 주인이 가져다 준 커피를 들이킨 맥크리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말했다.
"무슨 커피를 시켜도 모래가 씹히더군요. 그래서 사흘 전부터는 그냥 아무 거나 주문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모래 맛이니까요. 부사령관님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아니, 이제는 카페인을 조심해야 할 나이라서 말이지. 게다가 저격수한테 카페인 과용은 금물이야."
아나는 알고 있었다. 맥크리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횟수가 많아진다는 걸.
커피잔 손잡이를 붙잡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맥크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완전히 복귀하신 겁니까?"
"난 전장을 떠난 적이 없어, 제시."
"하긴. 며칠 전 헬릭스 세큐리티와 공동작전 펼칠 때 다녀가셨죠?"
"무슨 근거로?"
아나의 입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몇 놈 해치운 다음에 입구를 열려고 했거든요. 세상에, 제가 택한 이동경로에 있던 놈들이 전부 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더군요."
"그래서?"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그런 장난칠 사람이 부사령관님 밖에 더 있습니까? 그때 눈치 챘죠. 꼬맹이가 건넨 편지를 보고 확신했습니다."
아나가 보낸 편지에는 수신인에 '제시'라고 적혀 있었다. 맥크리를 제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오버워치 내에서는 아나가 유일했다.
아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 빙긋 웃었다. 노년의 저격수가 진심으로 웃는 게 얼마만인가?
"아무래도, 그 동안 자란 건 수염만이 아닌 것 같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아마 부사령관님께서 제 나이였을 때보다 훨씬 잘 나갈 겁니다."
아나는 온몸에 잔뜩 먼지와 땟국물을 묻히고 나타난 더벅머리 소년을 떠올렸다. 손가락, 정강이, 입가 할 것 없이 살아온 세월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총기가 어려 반짝이고 있었다. 아나는 그가 파괴와 살육에 물들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딸에게 바랐던 것처럼.
그 눈빛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올바른 것을 굳건히 지키려는 의지가 더해져 있었다. 아나는 한층 노련해진 옛 부하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나가 마치 장성한 아들을 보는 어머니와 같은 눈빛으로 자신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맥크리는 재결성된 오버워치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리슨 사령관은 사람이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작전에 필요한 게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리고 항상 분노에 차 있다고 해야 할까요? 바이저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흉흉한 눈을 하고 있을 겁니다."
"잭이…? 흐음… 고생이 많았지... 다른 친구들은 어떻지?"
"라인하르트 영감님은 취미가 많이 고상해졌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 출신 여가수한테 완전히 푹 빠졌어요. 윈스턴은 이제 나쁜 짓도 조금 할 줄 압니다. 작전 보수로 받은 돈이 차명계좌로 입금되는 걸 보고 있으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구나 싶더라고요."
맥크리는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그들의 근황을 전했다. 거의 모든 동료의 이야기를 전한 맥크리가, 한 명을 남겨놓고 말끝을 흐렸다. 그와 동시에 아나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사그라졌다.
"파라, 아니지. 파리하 말입니다."
"그 아인 어땠나...?"
"말씀도 마십시오. 부사령관님 젊었을 때랑 판박이예요. 거의 20년 만에 만난 사람을 보고도 반가운 기색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뭐, 쌀쌀맞은 만큼 일 하나는 기똥차게 하더군요."
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맥크리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슬픔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었다. 아나는 자신이 죽은 것으로 기록된 후, 딸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의 곁을 맴돌며 자신의 죽음이 딸을 옭아매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맥크리는 아나가 자신의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나는 오버워치가 해체되기 전, 파라를 다른 요원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딸이 그들을 본받아 항상 정의롭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파리하에게 언제까지 감추실 셈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그 애는 부사령관님의 그림자를 쫓고 있습니다. 헬릭스의 보안 책임자요? 오버워치의 일원이 될 수 없으니 자기 어머니처럼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자리에 선 겁니다."
"나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야."
"이제 사랑하는 딸을 그만 괴롭히십시오."
맥크리는 자신이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춘 데에는 파라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제시..."
"부사령관님의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만 실례했군요. 잊어주십쇼."
맥크리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가족의 일이다. 자신이 부사령관인 아나를 존경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과거의 그에게 아나와 파라는 가족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나였다.
"출발은 언제 하나?"
"내일 모레입니다. 볼스카야에 있는 타이탄 건조 능력을 가진 폐공장이 재가동되었다고 하더군요. 그쪽 인원과 함께 공장을 급습할 겁니다."
"제시, 기밀을 함부로 알려주면 어떻게 하나?"
"음… 역시 저는 아직 멀었나봅니다."
맥크리는 카우보이 햇을 벗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턱수염을 긁는 것을 본 아나가 일어설 채비를 했다.
"이제 가실 겁니까? 어디로 가실 거죠?"
맥크리의 질문에 아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먼지는 말이야… 그저 바람에 휩쓸릴 뿐이야. 가고 싶은 곳을 정하진 못하지. 대신 바람이 부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알려주기 싫다는 말을 거창하게 하시는군요."
맥크리가 테이블 위에 커피 값을 올려놓고 일어섰다. 아나 역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아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턱을 긁던 맥크리가 먼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피자 기억하십니까?"
"피자…?"
"그 왜, 본부가 습격당하기 며칠 전에 부사령관님이 만들어다 주신 그거 말입니다. 페파로니 대신 시금치가 올라가 있던."
"아, 자네는 그걸 먹다가 갑자기 뛰쳐나갔었지. 그렇게 맛이 없었나?"
아나의 질문에, 맥크리는 콧잔등을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맛없어서 뛰쳐나간 거 아닙니다. 누가 저 먹으라고 음식 만들어다 준 건 처음이었거든요. 천하의 제시 맥크리가 피자 먹다 질질 짰다고 하면 체면이 안 살지 않습니까."
아나는 한 동안 잊고 살았던 어머니로서의 미소를 보였다.
"다시 뵐 수 있는 겁니까?"
"자네들은 항상 바람을 몰고 다니지 않는가?"
아나는 천으로 감아 옆에 세워 두었던 기다란 물건을 집어 들어 어깨에 걸쳤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를 띈 얼굴로 마주 보았다.
이내 아나는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맥크리는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상관의 뒷모습에 거수경례를 붙였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부사령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