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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대정부 투쟁과 정의(feat. 마이클 샌델)
게시물ID : medical_209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
추천 : 3
조회수 : 79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20/09/02 09: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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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태풍 소식에 병원 앞 하상주차장을 통제하고 있네요. 아무래도 아주 한가한 하루가 될 것 같아서 한동안 로그인 안하고 눈팅만 하려고 하였으나 심심해서 또 글을 써 봅니다. 원래는 철학게시판에 쓰려고 하였으나 철학적 깊이도 철학게시판에 쓰기에는 낮고 글의 본질은 이번 투쟁 당사자 들과 나누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의료게시판에 남겨 봅니다.

 

취미가 철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아 철학책을 즐겨 보는 사람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철학책에 취미를 갖게 해준 첫번째 책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였습니다. 처음 볼 때는 아주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서술 형식이 특이하여 기억에 남고 철학이 상당히 재밌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어떤 철학적으로 애매한 사건에 대하여 각 철학 사조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형식이었죠. 그런 입장에서 한번 살펴 보기로 하였습니다.

 

1.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설명이 되는 철학이죠. 간단히 말하면 사회 각구성원의 행복을 계산하여 행복이 더 큰 것이 정의라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돌아다니면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면 a가 돌아다닌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행의 총합이 a가 돌아다니므로써 발생하는 행복을 넘어 선다면 a는 집에 연금시키는 것이 정의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맹점이 발생하는데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도 있고, 또한 행복을 질적이 아닌 양적으로만 계산하며, 주관적인 감정인 행복을 수량화 하는 등의 각종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리주의 입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이미 법제화 하고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방접종이라든지, 토지 수용 등 공리주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상입니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의료계 투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불편과 정부의 의료정책의 좌절로 인한 불편 그리고 의사들의 불편을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그냥 단순화해서 4대 요구사안 중 가장 첨예한 의대정원 확대만 살펴봅시다.

 

의사 숫자가 10년간 4천명이 늘어난다고 했을 때 의협의 주장대로 정부의 의도가 왜곡되어 대부분이 공공의료가 아닌 민간의료의 영역으로 넘어 올거라고 한다면 시민들이 느끼는 행복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의사들은 대략 13만명의 의사 중 4천명이 늘어나니까 약간 불행하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정부의 의도대로 적지 않은 숫자가 공공의료 혹은 의료공백지에서 근무한다고 한다면(지원자의 성향이나 교육에 따라) 시민들의 행복은 크게 증가할 겁니다. 도시에 사는 시민들이라고 할지라도, 고향에 계신 부모, 친척에 대한 안도감, 혹은 본인이 귀농, 귀촌 했을 경우의 안도감, 그리고 시골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당연히 행복할 것이고요.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지방인구의 도시 쏠림현상이 줄어들면서 식량안보확보 등 여러가지 잇점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의사들도 의료공백에 따른 부채감이 덜 할 것이고, 자신과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불행할 일도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정책 활용의 묘가 중요한 핵심이 될것이며, 잘못하면 약간 사회적인 불행이 늘어날 수도 있지만 잘 된다면 사회적인 행복이 아주 커질 수 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2.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상가나 시민들을 찾기는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자유를 추구하며 인신의 작은 구속도 거부합니다. 물론 책임은 따릅니다. 하지만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민주사회의 근간에 자리잡고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의 기본권의 사상적 기반이 되니까요. 아마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모든 권리의 바탕이 된다 하겠습니다.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논의는 시작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것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죠. 아예 의대정원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누구나 기본적인 조건(면허 아닌 자격시험)만 갖추면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혹은 더 근본주의적 자유주의라면 기본적인 조건 조차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로인해 의료사고가 발생한다면 사고를 낸 사람이 책임을 지면 그만이니까요.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의 자유는 신성한 것이기에 아무도 제한을 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투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죠.

 

3.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자유주의에 속하는 것이며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아닙니다. 대략 유럽식 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겠네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에서는 의료의 공공재성 강화에 더 높은 관심이 있습니다. 의료의 비배제성 강화에 관심이 많다는 소리죠. 그렇다면 지역적인 차이에 따라 배제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므로 아마 의사들 입장에서 말해주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4. 칸트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선한행위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내용이 아닌 형식을 중요시 합니다. 어떠한 행위를 했을 경우 행위의 내용보다는 그 행위를 하게 한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의료게시판이라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봤을 때 적선을 하면 선한행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적선을 함으로써 쾌감과 우쭐한 감정을 느낀다면, 혹은 선거에 나갈 것이라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서라면 칸트는 선한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용으로 봐서는 적선과 연민이라는 내용으로 선한행위로 보일지라도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행위는 무엇무엇이면 어떻게 하겠다는 가언명령이 아닌 인간이라면 무엇을 해야한다 라는 정언명령에 따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선을 하는 이유가 내가 가진것을 나누는 것이 사람이 할 도리라고 생각해서 했다면 선한 행동인것이죠.

 

지금 의사들의 입장은 앞으로 어떤 사태가 예상되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을 한다는 입장이죠? 그러므로 칸트의 입장에서는 정의롭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의사라면 옆에 있는 환자가 우선이지 미래의 오지 않은 사태와 이익을 위해 움직여서는 선한 행동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죠. 또한 칸트는 인간 뿐 아니라 국제정세를 다루면서 국가에도 인격을 부과하여 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우리 정부의 정책목적은 주관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보편적인 삶의 질 향상을 표방하였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대체로 정의로운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정자의 이득보다는 시민들의 삶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커보이기 때문이죠(만약 인기를 위해서라면 이미 180석을 차지한 여당이 무난하게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정치를 했거나 이 시점에서 많은 국민들이 바라는 것처럼 의사들을 일벌백계하여 포퓰리즘으로 갔을 것으로 봅니다).-이 부분에서 상당한 반론이 예상되네요.

 

그리고 칸트는 모든 것을 수단과 목적으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노가다를 한다면 목적은 돈이 되고 수단은 우리의 노동력이 되겠죠. 가족들을 위해 쇼핑을 한다면 목적은 가족이 되고 수단은 돈이 될것이고요. 그렇게 봤을 때 칸트는 모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밖에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환자들의 안위를 수단으로 정책변경 투쟁을 하는 것은 결코 정의롭다고 칸트가 말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5. 공동체 주의

존 롤스를 비롯한 정의에 관한 최근의 가장 대세인 공동체 주의 입장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계약을 하자는 것입니다. 승자독식주의는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숫자가 소수여서 내가 승자가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선택하기는 힘들겠죠. 완전한 평등주의는 내가 능력이 출중하게 태어날 지도 모르는데 능력에 상관없이 똑같은 대접을 받기 싫을 테니 선택하기 힘들고요. 그러니까 그 사이 어딘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대정신에 따라 그 선택 위치는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성공을 위한 요인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능력이 없어서 굶어죽지는 않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지점이 아마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어딘가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인간은 사회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이므로 공동체가 인간에게 갖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여러 협상안을 모두 거부하고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만을 좇는다면 과연 그것만으로도 정의롭다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네요.

 

6. 플라톤

플라톤은 정의를 논하면서 영광과 자격을 고민합니다. 영광이 자격이 있는 자에게 가는 것이 정의니까요. 영광과 자격은 영광이 어떤 telos(목적-끝이라는 뜻, 마이클 샌델은 본질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것이 더 정확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본질을 갖는지가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료라는 것은 어떤 본질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지금 의료, 의학이 갖는 본질이 의사의 생계와 부의 창출에 있다고 할런지, 혹은 공공의 복리에 있다고 할런지에 따라 지금 투쟁에 대한 가치가 판단 되겠죠. 아마 어느쪽 한가지만 갖는다고 보기는 힘들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의사의 부의 창출과 공공 복리 중에 공공복리 쪽으로 치우쳐 있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7. 아담 스미스-이것은 마이클 샌델의 언급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생각 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주저 국부론에서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강한 어조로 특정 기술을 가지거나 공장(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를 돌리는 현대적인 공장이 아님, 협동작업장 개념)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뭉쳐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비판을 가합니다.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시장의 지배를 받아 자연스럽게 가격이 형성되는 것처럼 노동이나 서비스 시장도 시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노동자(의료 수요자)는 불특정 다수기 때문에 혹은 법적으로 금지되어(당시에는 사용자의 단결권은 인정 혹은 권유 되었던 반면 노동자의 단결권은 불법이었습니다.) 단결이 불가능 하지만 소수의 사용자(의료제공자)는 단결이 용이하여 착취가 이루어지기 쉬운 구조라고 비판 합니다. 그래서 단호한 어조로 사용자의 단결을 불법화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하죠.

 

물론 의료이용은 가격은 탄력적이지 않고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위의 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데는 논리적인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단지 의료 수요자에 비해 공급자가 단결하기 편하고 사용자 처럼 경우에 따라 사회적인 우위에 있는 점을 이용하여 투쟁하는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담 스미스는 분명하게 의사, 변호사 등의 사회적인 위치, 기술 습득의 난해성, 직업의 특수성등을 고려하여 어느정도의 특별잉여가치를 가져야 하는 당위성도 분명히 기술하였음도 있습니다.

 

 

 

 

 

하상주차장을 통제함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적지 않게 오면서 괜히 글을 쓰기 시작했나 싶기도 합니다. 글을 쭉 이어서 쓰지 못해서 생각했던것보다 쉽게 풀어내지 못한것 같아 아쉽습니다만 쓴 양을 보니 다시 쓰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왜곡해서 봅니다. 왜곡해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 여여하게, 진여하게, 타타타- 볼 수 있다면 부처라고 할 수 있겠죠. 저도 의사이긴 하지만 이번 투쟁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라 여여하게 보고 썼다고 말 할 수 없음을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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