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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게시물ID : history_209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
조회수 : 114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05/24 18: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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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임용한 저
pp157 ~~ pp167


……생산자인 농민은 굶주리고, 기생계급인 귀족들은 호위호식하는 모순이야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는 사유재산과 계급이 생긴 이래로 지속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도 지배층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척이라도 할때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층이 지배층이 될 수 있는 첫째 의무는 국방과 국가운영이다. 그런데 지배층은 요새로 도망치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너희도 알아서 도망치라고 한다. 군대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 논과 밭을 불태우고 섬이나 산성으로 강제이주를 시킨다. 그리고는 곡식이 부족하니 너희는 술도 마시지 말고, 쌀밥도 먹지 말고, 그 쌀을 세금 수송선에 실으라고 말한다.


 이것도 몽골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착한 백성들은 감내할 수 있다. 귀족들이 좀 더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늘 그래 왔던 것이니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든다. 이 이상한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략이 없다. 상대가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훌륭한 전략의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원나라는 지치기는 커녕 지금도 확장 일로에 있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그럼 강한 나라에는 무조건 굴복 하라는 말이냐?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벗 삼아 벌이는 저항은 위대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에서 벌어진 수 많은 저항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과 저항의 논리는 다르다.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 몽골군이 물러난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보장도 없는 전쟁, 사람들은 점차 궁금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대몽 항쟁 기간은 몽골군이 최초로 침공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여년으로 잡는다. 이 기간 내내 전쟁이 벌어진것은 아닌데, 몽골군은 한번 침공하면 평균 6 ~ 7개월을 정도 돌아다녔으므로 전쟁이 벌어진 기간만 계산하면 11년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몽골과의 30년 전쟁이 과장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임진왜란의 경우도 7년 전쟁이지만 일본군이 내륙을 전전한 기간은 첫 해 뿐이다. 더욱이 이 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밞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 그들의 탁월한 기동력과 약탈욕을 감안하면 대몽전쟁은 이 땅에서 벌어진 그 어떤 전쟁보다도 길고 고통스러운 전쟁이었다.


 다만 침공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일정한 형식과 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강화정부의 대몽전략이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 측의 이론에 따르면, 일정 기간 동안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정기간만! 지배층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비난하지도 말 것이다. 우리는 항구적으로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몇 년에 한번씩 가을에서 겨울 동안만 피난생활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이론을 한 꺼풀만 넘기면 대몽전략의 추악한 일면이 또다시 드러난다.


 그동안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귀족들은 강화에서 편하게 살았지만, 산성과 섬에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의 생활은 고통스러웠다' 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고통의 본질이 아니다. 산성과 섬으로 피난 할 수 있는 주민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군현 가까이에 산성은 많다. 아니, 군현마다 가까운 산성이 없는 곳이 없다. 충주의 충주산성, 단양의 적성, 통주의 동림성, 의주의 백마산성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략요충이 이런 곳에 있다. 이곳에 군현의 식량을 비축하고, 주민을 잠시 집단 이주 시킨다. 좋은 방법이지만 이런 성은 다 길가에 있다. 이곳에서 거주하려면 구주성 전투나 죽주산성 전투처럼 몽골군과의 전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피난의 대상이 된 성은 이런 성이 아니다. 산성에는 군현과 가까운 산성이 있고, 말 그대로 산악 깊숙이 자리잡은 피난용 산성이 있다. 피난용 산성으로 우리가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이 설악산의 권금성, 두타산의 두타산성, 월악산의 덕주산성 등이다.


 하지만 이런 산성이 없는 고을이 더 많다. 있다 해도 심산유곡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며칠씩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장기간 거주할 식량도 땔감도 없다. 평소에 식량을 비축해 놓을 수도 없으므로 들고 걸어가야 하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한 번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양은 잘 해야 1주일치가 고작이다. 미리미리 군현의 식량을 옮겨두고 이주를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인근 고을의 일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섬도 마찬가지다. 남해안과 서해안에 섬이 많은 것 가팆만 작은 섬은 몇 백명을 받기도 벅차다. 큰 섬도 내륙의 주민이 한꺼번에 몰리면 감당할 수 없다. 사람들을 수송할 배도 없다. 고려시대에 대형 전함은 50 ~ 100여명 정도를 태웠다. 고려 수군은 그런 전함을 100 ~ 300척 정도 보유했다. 이 배와 작은 배들을 해안 군현에 나누어 할당하고, 민간의 배까지 동원한다고 해도 한 번에 하나를 실어나를 수 있는 인원은 하루에 500명이 채 못 될 것이다. 1만 명의 주민이 좀 더 깊은 섬으로 가려면 20일이 걸린다. 물론 20일 내내 날씨가 좋다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결국 이론과 같은 소개 작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섬이나 산성으로 피하라는 명령은 식량이 떨어진 병사에게 식사를 충분히 한 뒤 기운을 내서 싸우라는 명령과 똑같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 수단에 불과하다.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섬에 들어가 장기거주 하는 사람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 관청과 주민 일부와 군대다. 식량을 섬에서 다 조달할 수 없으므로, 세금 걷듯이 외부에서 징발하기도 한다.


 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공을 당하자 여러 성의 사람들이 위도(葦島)로 들어가서 방어했다. 섬에는 10여 리쯤 되는 경작이 가능한 평지가 있었지만 조수의 피해를 우려해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방경이 둑을 쌓고 파종하게 하자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으로 여겼으나 가을에 곡식을 많이 수확해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는 또한 우물이 없어서 항상 육지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했는데 그 때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김방경이 빗물을 모아 두는 저수지를 만들자 그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이 기록이 말해주듯 위도는 여러 군현의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방파제를 쌓고 개간하기 전까지는 식량도 부족했고, 물은 바깥에서 조달해야 했다. 결국 국가의 행정기구와 소관 지역의 일부 백성과 군대가 정착한 것이다. 이처럼 관청과 일부 백성, 군대가 주둔하는 섬은 몽골군은 요격하는 군사기지도 되지만, 국가가 주변 군현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직접적 힘이며,들어온 백성은 인질이기도 하다.


 피난지에서의 장기거주가 불가능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먼 섬에 있는 정부에게는 세금을 내고, 가까운 섬에 있는 관청에게는 물자를 조달한다. 막상 몽골군이 닥치면 알아서 잠시 피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탁상공론이다. 몽골군의 평균 이동속도는 하루에 50km다 이것은 평균치고, 단기간에는 하루에 100km 이상도 가능하다. 반경 100km 이내의 몽골군의 이동 상황을 누가 탐지하고, 누가 알려주며, 누가 노인과 어린이를 끌고 식량을 메고, 그들보다 빨리 안전지대로 달려갈 수 있는가?


 피난, 소개전술, 청야작전이라는 것도 국가가 제대로 된 방어전선을 형성하고 방어거점을 마련해서 전투를 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몽골군은 이 땅을 자기 땅처럼 돌아다니고, 척후도, 경보장치도, 달아날 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이 오면 그들보다 빨리 몽골군이 오지 못할 곳으로 피난하라는 이야기는, 나는 모르겠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의 공문서식 표현에 불과하다.


 앞에서 한 말을 수정해야겠다. 대몽항쟁에는 이기기 위한 전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술 자체가 없다. 그들이 말한 전술이란,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몽골군의 2차 침공부터는 전쟁이 사라진다. 정부군도 없고, 전선도 없고, 하다 못해 조직적인 유격전술조차 없다. 당시의 기록이 조금만 더 충분하게 남아 있다면 누군가가 이 전쟁을 '전쟁 아닌 전쟁' 이라고 기록한 문서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닐까? 기록을 보면 간간히 전투도 있었고, 정부는 끊임없이 장수를 파견하지 않았는가? 맞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지역군이 단독으로 싸운 전투다. 최소한 주변 지역의 병사들이 소집되거나 합동 작전을 펼친 경우조차 없었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한 경우도 있다. 이때 파견하는 장수의 명칭이 산성방어별감, 산성수호별감, 방어사 등등이다. 명칭으로 보면 전형적인 유격전 지도방식 같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하면 지역군을 조직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전제가 있다.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끝까지 싸운 성은 구주성과 자주성 두 곳 뿐이다. 막상 몽골군이 왔을때 항전의지를 보이거나 버틸 수 있는 성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이런 형편은 정부측 사람들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수호별감을 파견했다고 해서 이들이 싸우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싸움을 기대한다면 군사요충에 여러 지역의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조직적인 전개가 있어야 한다. 박서의 구주성 전투도 여러 고을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여 이루어낸 성과다.


 간혹 야별초가 성의 군사를 지휘앟여 몽골군을 물리쳤던 사례도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파견 역시 전투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다. 전술이 없고, 전쟁은 알아서 하라고 지방민에게 떠넘겼다고 해서 정부 스스로 이를 공포하고 분리 독립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던 몽골군이 이 땅에 들어와 있는 기간보다는 없는 기간이 더 많았다. 정부는 이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또한 지방군의 조직이 관리되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 실제로 전란이 길어지면서 몽골에 투항하는 지역이 늘어났고, 몽골과 접경지대에 있던 군현과 토호들은 아예 몽골의 영토로 귀속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산성보호별감은 일반 행정을 계엄체제로 바꾼 형태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더욱 백성들은 섬이나 피난용 산성으로 자유롭게 도피할 수도 없었다. 30여년이라는 게엄 기간 동안 백성들은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성으로 이주하기도 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때면 국가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거대한 제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몽골군이 출현하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홀로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고, 산성으로 마을로 옮겨다니며 살았던 것은 국가라는 조직의 협력과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없다. 관리는 먼저 도망가고, 주민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누구는 깊은 산속이나 섬에 들어가서 산다고 하지만 그런 기회란 적고도 희귀하다. 백성들은 삶의 현장에서 혹은 마을과 산성에서 소나기를 만나듯 탐욕스런 몽골군을 만난다.


 하지만 강화도로 오면 이 모든 현상이 남의 나라 이야기다. 강도에서는 오늘도 술과 쌀밥이 부족함이 없다. 장마가 아무리 길어도 그들은 의연하다. 나라가 설마 망하기야 하겠는가? 몽골군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도 산성의 백성들처럼 도망쳐야 할지 싸워야 할지, 항복한다고 해도 아내와 딸을 빼앗기지 않을지, 노예로 끌려가지는 않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러게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몽골군이 오기 전에 우리처럼 섬이나 깊은 산중의 성으로 피신하라고.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이 얼마나 긍정적인 인식인가. 정말 "나라가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만 받을 뿐이지.











해당 글에서는 고려 백성이 피난하는것이 사실상 어려움에 대해서만 지적했는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피난을 설사 한다고 쳐도, 그것이 제대로 된 피난이냐는 것입니다. 


고려군이 중기 이후에 행한 전략 중에 이주 전략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어차피 몽골에 털려서 저들의 발판이 될 테니, 그전에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겁니다. '피난을 시켜준다' 면 정말 말로는 좋은 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닭이나 개를 두들겨 쳐서 쫒아내는 수준에 가깝습니다.




○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기를 싫어할까 염려하여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보다 먼저 최항이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주민들을 모두 몰아서 섬 안으로 들어가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워서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ㆍ아홉은 되었다. ─ 고려사절요 1256년


○ 송길유가 경상주도 수로 방호별감이 되어 각 고을의 인물을 검찰(檢察)하여 섬으로 들여보내는데, 영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때려 죽이고, 혹은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은 다음 별초를 시켜 양 끝을 잡고 끌어서 깊은 물 속에 던져 거의 죽게 되면 꺼내고 조금 깨어나면 다시 그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절요 1258년


○ 고주(高州)ㆍ화주(和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의주(宜州)ㆍ문주(文州) 등 15주의 사람들이 저도(猪島)에 옮겨가 사는데,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저도는 성이 크고 사람이 적어서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드디어 15주의 사람을 옮기어 죽도(竹島)를 지키게 하였다. 섬이 좁고 우물과 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옮기려 하지 않으니, 집평이 강제로 몰아서 들여 보냈다. 사람들이 많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옮긴 자는 10명 중에서 2, 3명뿐이었다. ─ 고려사절요 1258년





전근대 이전의 시골이란 대단히 배타적인 곳이라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왕래를 거의 하지도 않고, 기반이 이 곳에 있으니 몽골군이 눈 앞에 오기전에는 쉽게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이들을 내버려두면 몽골군에게 양식이나 넘겨주게 될테니, 고려군은 수뇌부의 높은 전략을 이해못하는 이 무식한 백성들을 두들겨패서라도 고향에서 쫒아냅니다. 그렇게 두들겨패는 중에 맞아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국이 먼저니 그깟 희생은 신경 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항하며 버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이런 사람들의 목에 개목줄처럼 새끼줄을 꼬아서 채우고, 앞과 뒤의 사람들의 목에도 비슷하게 개목줄을 채워 굴비 엮듯이 엮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강에다 내 던져서 물귀신을 만들고, 아니면 거의 반죽음을 만들어 놓은 건져 올려 그래도 말을 안 들것이냐고 하여 끌고 갑니다. 혹여 어리석은 사람들이 도망치려 들 수도 있고 몽골군이 사용할수도 있으니, 그들의 터전은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적을 저지해본다' 는 선택지 같은건 없습니다.  


여기까진 강화도에서 대국을 살피는 높은 분들에 국방전략의 일환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섬으로 옮기니, 그 다음부터가 문제가 됩니다. 


수 많은 백성들은 내쫒기듯 왔고, 터전이 불타버렸으니 먹을 식량 따윈 없습니다. 하지만 좁은 섬에 이렇게 개처럼 끌려온 사람들만 수백명인데, 먹을게 있을리도 만무합니다.


 이들이 바라는것은 자신들을 끌고 온 사람들이 지원을 해주는 일이지만, 고려 조정은 여기에서 손을 놓습니다. 이제 이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약탈될 일도 없으니, 자신들도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손을 놓습니다. 그렇게 섬에 끌려온 수백명의 사람들은 돌아갈 방법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는 상태가 되어 천천히 매말라 굶어죽습니다. 끌려온 사람들의 90%가 말입니다. 이 정도라면 피난이 아니라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정도.


 이렇게 굶어죽는 피난민들이 여러 섬에서 몽골군을 성가시게 할떄, 조정에서는 





瑀營私第(우영사제) : 우가 제 집을 짓는데,

皆役都房及四領軍(개역도방급사령군) :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船輸舊京材木(선수구경재목) : 배로 옛 서울 송도의 재목을 실어 오고,

又取松柏(우취송백) : 또 소나무ㆍ잣나무들을 실어다

多植家園(다식가원) : 집의 동산에 심은 것이 매우 많았다.

人多溺死(인다닉사) : 때문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其園林廣袤(기원림광무) : 그 원림이 넓기가

無慮數十里(무려수십리) : 무려 수십 리였다.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崔怡(최이) : 최이가

於西山私伐氷藏之(어서산사벌빙장지) :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發民輸氷(발민수빙) :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

民甚苦之(민심고지) :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又移安養山柏樹(우이안양산백수) : 또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옮기어

植家園(식가원) : 집의 후원에 심었다.

安養山(안양산) : 안양산은

去江都(거강도) : 강도(江都)에서

數日程(수일정) : 여러 날 걸리는 거리인데

使門客(사문객) : 문객인

將軍朴承賁等督之(장군박승분등독지) : 장군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時方冱寒(시방호한) : 때는 추위가 한창이어서,

役徒有凍死者(역도유동사자) : 일꾼들 가운데 얼어 죽는 자도 있어

沿路郡縣棄家登山(연로군현기가등산) : 연로에 있는 군현(郡縣)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그

以避其擾(이피기요) : 소요를 피하였다.







자기 집 심시티 하기, 멀리 있는 나무 가져와서 자기 집에 심기, 자기 집에 얼음 넣으려고 한겨울에 백성들 내보내서 얼음 끌어오게 하기 등등... 
출처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5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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