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이승복 글이 있어 당시 1968년 한국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간단하게 요약해봅니다.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이 일어납니다. 보통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무장게릴라 31명이 박정희를 암살하기위해 청와대를 습격하려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지만 결국 한국군의 저항을 받아 침투한 31명중 29명이 사망하고 1명은 실종되었으며 김신조 한명이 투항하게 됩니다.
이때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자신을 막아서는 종로 경찰서장 최규석 총경을 살해하고 민간인이 타던 시내버스를 국군병력이 탄 버스로 오인 수류탄을 던져 민간인 사상자까지 발생합니다.
그리고 도주과정에서 무차별 난사로 인해 결혼예정이던 아가씨나 중학교 수위등의 일반 만긴인 피해도 발생합니다.
남한은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내래 청와대를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
라고 발언해서 온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을 하게 만들었다며 기자회견을 준비한 방첩대가 크게 까여 죽어지내고 중앙정보부가 권력을 잡게 됩니다.
이 사건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게 되고 예비군과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3사관학교,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이 생깁니다.
당시 군대 훈련이 엄청 빡세지고 무엇보다 당시 복무기간이 축소되던 중에 이 일로 [현역병들은 육군/해병대는 6개월 해군/공군은 3개월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어 버립니다.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인데요.
후에 이름을 바꾸고 개신교 목사가 된 김신조는 술집에서 오줌누다가 왠 청년에게 뒤통수를 맞고 "너 때문에 군대에서 개피봤다" 라며 욕설을 듣습니다. 그리고 김신조는 그냥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2.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년 1월 23일 북한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서 미합중국 해군의 정보수집함(AGER-2) 푸에블로 함이 북한 해군과 공군의 강제 공격을 받고 나포되었습니다.
김신조사건이 터진뒤 이틀만에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해군 함선을 나포한 사건이 터져버렸는데요.
교전중에 미군 1명이 사망했고 남은 82명의 미군이 북한에 포로로 잡혀버렸습니다.
미국은 무려 82명이나 포로로 잡혀서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인지라
결국 버처 함장 이하 푸에블로 함 승조원들은 공개적으로 세계 각국의 기자단 앞에서 북한 영해 침범과 북한에 대한 해적 행위를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했으며 미국 정부도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결국 196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에 승조원 82명과 전사자 시신 1구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됩니다.
이때 나포사건을 이끌었던 북한 고위층 장군들은 작전성공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잡아놓았던 미군 장병들이 본국으로 송환된 뒤 그 후폭풍을 막기 위해, 그리고 세습 체제에 방해가 되는 이유로 후에 군사파 숙청으로 대거 숙청됩니다.
북한은 나포한 푸에블로 함을 대동강변에 전시하고 안보공원으로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에 걸쳐 울진·삼척에 북한측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한 사건입니다.
1968년 11월 2일 밤 북한 유격대가 남한에 활동 거점을 구축하기 위하여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하였고 이들은 남한측의 군복·신사복·노동복등으로 위장한뒤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들고 마을로 쳐들어가 주민등를 집합시킵니다.
그리고 북한 책자를 나눠주며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고 주민들이 인민유격대에게 가입할것을 강요합니다.
주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머뭇거립니다. 예전 6.25전쟁때도 북한에 쌀을 받고 이름 한번 잘못적어 간첩으로 몰려 사살된 사례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주민들을 위협하겠다는 목적으로 전혀 무장하지 못하고 대항력도 지니지 못한 민간인을 향하여 대검으로 찌르거나 심지어는 늦게 도착한 주민을 돌로 머리를 쳐 무참히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릅니다.
삼척군 하장면의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 세사람이 난자당해 살해당합니다.
이에 군당국은 11월 4일 14시30분 보고를 받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합니다.
무장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형성. 강력한 화력을 이용하여 전면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고 결국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합니다.
남한측 피해 집계 :
소탕작전중 사망한 민간인 23명
작전중 전사한 군경(軍警) 38명
북한측 피해 집계 :
공비 113명 사살, 7명 생포
이때 이승복 어린이 피살사건이 터졌는데 소탕사건 와중, 무장공비의 일단이 군경과 예비군에 의해 포위되어 쫓기면서 그중 무장공비 5명이 이승복의 집에 쳐들어왔고 공비들은 아이들에게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화가난 무장공비 5명이 이승복의 멱살을 잡아 입을 벌린 후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합니다.
이때 발견한 이승복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무장공비들은 일가족 4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달아납니다. 당시 쫒기는 와중에 있던 무장공비 5명이 이승복이 설령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다 죽였을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때 칼을 36곳이나 맞고도 살아남은 형 이학관이 그때 이야기를 증언했고 이게 조선일보의 기사로 나면서 그 유명한 '공산당이 싫어요' 로 기사화되게 됩니다.
이승복의 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때 사건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하고 무장공비 120명 중에 한명이었던 김익풍씨가 2009년 이승복 41주기 기념식에서 이학관씨 부부에게 사죄를 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습격해서 박정희 목 따려고 하고 남쪽으로 침입해 민간인들 살해하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 함선 나포하고 이 모든 일이 1968년 한해에 모두 터졌는데 당시 남한 사람들의 충격은 엄청났을 거라고 봅니다. 특히 마지막 3번째는 북한 군이 직접 남쪽으로 들어와 민간인들을 살육한 사건이었으니... 자신들도 그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상당히 두려웠겠죠.
그 결과 남한은 반공이 국시가 되게 되며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해집니다.
또 이 사건들로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 강도가 세지고 똥군기가 대대적으로 확립되었는데
당시 말년병장이었던 분의 회고를 들어보면 제대 날짜 세면서 매일 개울가서 천렵하고 낚시하는데 갑자기 간첩이 넘어왔다고 하더니 삼킬로 짜리 모래주머니를 발에 채우고 매일 뛰게 시켜서 지옥 같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