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86년 5월 25일 조선 경기도 양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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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7년 7월 19일 (61세)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종로구 혜화동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혜화동) |
국적 | 미 군정 조선 |
별칭 | 호는 몽양 |
학력 | 금릉 대학 철학과 중퇴 |
직업 | 독립운동가 |
종교 | 개신교 |
배우자 | 유씨, 진상하 |
자녀 | 슬하 4남 4녀 |
부모 | 아버지 여정현, 어머니 경주 이씨 |
친척 | 동생 여운홍, 사촌동생 여운일, 여동생 여윤숙, 6촌 동생 여운혁, 여운각 |
서명 |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1][2]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경기도 양근군(현재의 양평군) 출신이며, 호는몽양(夢陽)이다
여운형 선생님이 하신일이 너무 많아서 다 긁어 올수가 없어서 첫부분만 올립니다.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링크타고 들어가서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정말 평생동안 많은 일이 있으셨네요...ㅠㅠ
여운형 선생님은 광복이후 정~~~말 많은 정치테러를 겪으셨는데요.
그 테러일지만 가져와보면 수 차례라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은 자잘한 것들까지하면 수십차례이지 않았을까 합니다...ㅠㅠ
여운형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 차례 겪었다. 1929년 중국에 있을때 정치테러 2차례,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1947년 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다.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대표적인 예가 이종형의 대동신문)까지 존재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광신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을 비롯해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주 26] 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120]
여운형의 비서로 지낸 여운각은 '일상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집(계동)도 폭파되고, 여운형이 여러 번 테러를 당했었고.. 그리고, 자녀들도 미행이 붙는 등 수상한 것도 여러 번 있었고, 하루도 정말 안심할 그런 게 아니었다.'고 회상했다.[29]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
1947년 5월무렵,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는데,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존 하지는 그해 6월 28일자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121]
여운형이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정치테러 당한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를 후원하니, 월간지 '민족정신'이 배송되는데, 이번에는 이런 기념식 초대장도 왔길래 올려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합니다 by 학문남자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87469&s_no=187469&kind=search&search_table_name=bestofbest&page=1&keyfield=subject&keyword=%EB%AF%BC%EC%A1%B1%EB%AC%B8%EC%A0%9C+ 민족문제연구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 1 by bigprison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87024&s_no=187024&kind=search&search_table_name=bestofbest&page=1&keyfield=subject&keyword=%EB%AF%BC%EC%A1%B1%EB%AC%B8%EC%A0%9C+ 민족문제연구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 2 - 백지수표사건 by bigprison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87405&s_no=187405&kind=search&search_table_name=bestofbest&page=1&keyfield=subject&keyword=%EB%AF%BC%EC%A1%B1%EB%AC%B8%EC%A0%9C+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97%AC%EC%9A%B4%ED%98%95 여운형 선생의 사진들은 다 구글 검색으로 가져온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