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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게시물ID : history_20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islescop
추천 : 11
조회수 : 96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5/19 23:38:02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고려 전기, 국보 제124호, 백색 대리석

강릉 한송사지는 지금은 사역 구분도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린 폐사지이나 고려시대까지는 상당한 사세를 자랑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사찰에는 지금까지 두 구의 대리석제 보살좌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보살좌상은 그 중의 하나로 다른 하나(오죽헌 박물관 소장품)에 비하면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 편이다. 사실 이 두 보살좌상은 형태나 크기 조각 등이 거의 같아 삼존불의 좌우협시 등 동일한 조형 의도 아래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14세기 고려 후기 학자인 이곡의 <<동유기>>에는 그가 한송사의 다른 이름인 문수당을 유람한 기록이 있다. 

"비 때문에 하루를 경포대에서 머물다가 강성(강릉)으로 나가 문수당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이 여기 땅 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14세기 무렵에도 문수당에는 문수와 보현의 두 보살석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연기설화(유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을 정도로 이 보살좌상들은 유명하였던 것 같다. 다소 허황된 연기설화의 존재는 보살좌상의 조영에 대한 기록과 기억의 미비를 뜻하는 것이다. 이는 당대인들이 인지하기 어려운 시점, 즉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 보살상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송사지 보살좌상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이후 고려 후기 강릉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관람하였던 유명한 작품이었고 이 때문에 이곡 역시 이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동유기>>에서 문수와 보현, 양 보살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 보살상과 오죽헌박물관에 소장된 다른 한 분의 보살상이 이곡이 보았던 문수와 보현보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찰터에 대한 조사 결과 두 보살을 받쳤던 것으로 생각되는 두 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대좌가 발견되었다. 현재 상태는 좋지 못하지만 이 역시 사자와 코끼리의 모습으로 문수와 보현, 두 분 보살과 관련된 것이다. 다만 현재의 모습으로는 이 보살상이 문수와 보현 중 어느 보살에 해당하는 지를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오죽헌 박물관 소장 보살상의 경우 오른 손이 결실되어 있는데 남아 있는 형태로 보아 연꽃 줄기를 들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듯하다. 이 경우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고려시대의 보현보살 도상과의 유사성이 주목된다. 또한, 이와는 약간 다른 형태이지만 두 손이 거의 맞닿아 있는 넬슨-앳킨스 미술관의 당나라 때의 문수보살 좌상의 예가 있어, 조심스럽게 문수보살일 가능성을 개진해 본다. 물론, 현재로서는 무리한 추정이다. ㅎㅎㅎ (춘천박물관의 재현된 대좌는 사자모양인데 결국 전시 담당자 역시 이를 문수보살로 추정한 듯하다) 

이 보살상은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소재인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대리석은 한반도에서는 거의 나지 않는 소재이다. 최근에는 강원 지역에서 일부 생산이 되고 있지만, 이처럼 근래에 생산되는 대리석들은 모두 최근에 조사된 것으로, 양질의 백색 대리석은 아직 산출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재료의 희소성 때문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품 역시 매우 희소하다. 

한송사지 보살좌상은 이마의 수정제 백호가 있었던 자리가 다소 심하게 훼손된 것과, 목이 부러져 다시 복원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 역시 매우 좋은 편이다. 더불어 충실하고 세밀한 세부 묘사가 돋보여, 통일신라 이후의 불교 조각의 흐름에 그다지 멀리 위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과도하게 큰 머리 비율과 신체가 풍만하게 표된 점 등은 고려 초기의 흐름이 이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이러한 풍만한 신체 표현을 송대 중국 조각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이 보살상에서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보살상이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이다. 이 보관은 천이나 가죽 등으로 만들어진 높은 보관으로 높이 튼 상투를 감싸고 있는 양식이다. 반면 뒷부분은 터져 있어서 고대 중국의 책幘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이러한 양식의 보관은 강원 지역의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에서도 확인된다. 이외에 시흥 소래산 마애상 및 낙단보 마애보살좌상 역시 비슷한 계열의 보관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보살상들은 모두 10세기에서 11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흥 소래산 마애상의 경우 시흥 지역의 초기 청자 요지의 중국인 장인 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도 하여, 특정 시기 중국을 통해 유입된 양식으로 판단되는 측면이 있다. 이 경우 송과의 교류에 의해 들어온 불교 미술 양식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식의 보관을 북방계의 거란 영향으로 도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보살좌상은 한송사가 폐사된 이후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이후 조선 후기에 발견되어 개인이 수습하여 보관하였던 것을, 일제강점기 인천 측후소 소장이었던 와다 유우지가 사들여 1911년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와다 유우지는 이 보살좌상을 동경제실박물관에 기증하여 한동안 동경제실박물관(동경 국립박물관)이 소장하였다. 

이후 1965년 맺어진 한일기본조약의 문화재협정으로 1966년 반환되었다. 반환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였다가,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관하여 현재까지 소장 중이다. (당시 같이 반출된 석수민묘 지석과 8대각경 석각 4매 등은 아직 반환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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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직촬과 마이브레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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