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19살.대학교1학년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다 1980년 5월19일 광주로 내려가 유족들을 안내하는 일을 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기를 회수해야 하는디
사람들이 총을 안 내옿으려고 한당께요.
얼매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디
무기를 내놓고 항복을 하냐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울 거라고요."
2-35
20살,양계장 직원 7남매 중 넷째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며 공수부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그는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공수부대가 총을 쏴서 사람들을 막 죽인당께요.
밖은 겁나게 위험헝께
절대밖으로는 나오지 마시오."
2-34
16살,고등학교 1학년
5월23일부터 도청에 들어가
부상자를 돌보고 유족들을 안내하던 중
어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계엄군이 또 들어온단다.
그러다 너 죽으면 어쩔려고 그러냐?"
"나,안 죽어.
군인들이 들어오면 손들고 항복하면 되지."
5월26일 17시10분,
도청의 시민군은 계엄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며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2-34는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인자부터는 밖에 못 나가가요.
나,그냥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
5월 27일 04시00분
계엄군의 경고방송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5월27일 04시10분
계엄군,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개시
5월 27일 05시10분
1시간 만에 진압작전 종료
"광주 시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폭도들은 섬멸되었습니다!"
형의 밤색바지를 입고 있던 2-36은 가슴에,
양복바지와 와이셔츠를 입고 있던 2-35는 목에,
교련복을 입고 있던 2-34는 얼굴과 배에 총상을 입고
도청에서 숨을 거두었다.
5.18항쟁 당시 165명 사망,
5.18항쟁 이후 약 376명 사망,
사망자들의 평균 연령 27.5세,
고등학생11명,
중학생6명,
초등학생2명
65명의 행방
불명
최초 발포 명령자 및 암매장 장소
불명
아직
끝나지 않은
끝낼 수 없는
5.18 광주
1979년 10월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권력의
공백상태가 발생하자,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정치군인들은
12월12일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전두환의 신군부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날로 거세지는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라남도 광주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에 광주시민들도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군부대에 맞서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빚어졌다.당시 정부와 언론들은 '광주사태','광주폭동'
등으로 표현하며 "국가 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으로 발표했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되었다.
1999년 5월10일 현재,사망자 166명,행방 불명자 54명,
상이 및 연행-구금자3,642명 등 총 3,872명의 인명피해가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987년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려는 이른바'6월항쟁'의
과정에서 1980년 광주의 진실이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13대 국회의 광주청문회를 거치며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신군부의 정권찬탈과정의 전모가
TV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1988년 노태우 대총령의 6공화국 정권은'광주사태'를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였다.
1993년 들어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
라고 밝히며 광주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하고,
당시 유죄판결을 받았던 598명의 전과를 말소,16명에 대한
지명수배를 해제했으며 81명을 특별사면했다.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관계자 사법처리 과정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수감 2년여 만인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광주에 투입괸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인물, 발포명령을
내린 인물, 당시 미국과 미군의 역활과 개입 여부,정확한 희생자의
규모 등 5.18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은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07년 1월 28일 경상 남도 합천군은 군민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황강변'새천년 생명의 숲'의 새로운 명칭을
'일해공원'으로 확정했다.일해 日海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아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주요사건 일지
1980년 5월17일(토요일,맑음)
24시00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광주시내의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며 학생들응 연행하기 시작했다.
5월18일(일요일,맑음)
9시40분
계엄군이 전남대생 50여명의 등교를 저지했다.
10시15분
전남대생들이 "계엄해제","휴교령 철폐"등의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이자 공수부대원들이 곤봉으로 진압, 이에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5시40분
유동삼거리에 공수부대가 출동하면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19시02분
계엄사령부는 광주의 통행금지시간을 저녁9시로 앞당겼다.
5월19일(월요일,오후부터 비)
3시00분
증파된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9시30분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에 맞서 누문동 파출소를 불태웠다.
10시00분
금남로에서 시민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14시40분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15시00분
광주 시내의 기관장과 유지들이 대책회의를 갖고,시위진압을 완화해달라며 계엄당국에 건의했다.
16시30분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명찬이 계엄군의 총에 부상을 입었다.
5월20일(화요일,오전에 약간의 비)
8시00분
광주시내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10시20분
가톡릭센터 앞에서 시위중이던 남녀30여명이 속옷차림으로 공수부대원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했다.
18시40분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20시10분
도청을 향하는 시위대들은 금남로,충장로,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했다.
21시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의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며 경찰 4명이 사망했다.
21시50분
광주의 실상을 왜곡보도하는 데 분노한 시위대가 광주MBC건물에 방화했다.
23시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2명이 사망했다.
5월21일(수요일,맑음)
0시35분
노동청 방면에서 시위대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2시18분
광주 전역의 시외전화가 단절되었다.
4시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2구를 리어카로 싣고 금남로로 향했다.
4시30분
시위대가 광주KBS건물에 방화했다.
8시00분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시위대가 20사단 병력과 충돌했다.
10시15분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들이 전면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10시15분
광주세무서 건물이 전소했다.
11시10분
대형헬기 1대가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12시59분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했다.
13시00분
도청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13시20분
금남로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14시15분
도지사는 경찰헬기를 타고 시위해산을 종용했다.
14시35분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과 장갑차 수십대를 탈취했다.
14시40분
시위대가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를 탈취했다.
15시48분
공수부대원들이 시내 빌딩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16시00분
화순,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전개했다.
16시43분
대학생들이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를 설치했다.
17시30분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다시 철수했다.
5월22일(목요일,맑음)
9시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10시30분
군용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며 경고전단을 살포했다.
11시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하고,도청 옥상에는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가 게양되었다.
13시30분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항의 수습안을 전달했다.
15시08분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5백여명이 광주에 도착했다.
15시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가 개회되었다.
17시40분
도청광장에 시체23구가 더 도착했다.
21시30분
박종훈 신임 국무총리가 "광주는 치안부대상태"라고 방송했다.
5월23일(금요일,맑고 한때 흐림)
10시00분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10시15분
학생수습위가 특공대를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했다.
11시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가 게시되었다
13시00분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 시민17명이 사망했다.
15시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되었다.
19시40분
최초 석방자 33명이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5월24일(토요일,오후에 비)
13시20분
공수부대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14시20분
송암동에서 전교사부대 간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했다.
14시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5월25일(일요일,비)
11시00분
김수환 추기경이 광주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메시지와 함께 구호대책비 1천만원을 광주시에 전달했다.
15시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17시00분
재야인사들이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1시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이 광주지역 범죄발생 예반, 식량공급, 청소문제들을 논의했다.
5월26일(월요일,아침 한때 비)
5시20분
계엄군이 화정동 쪽에서 농촌 진흥원 앞까지 진출했다.
8시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일명'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10시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14시00분
학생수습위원회가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했다.
15시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17시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이 외신가들에게 광주상황을 브리핑했다.
19시10분
계엄군의 공격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시민군은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시켰다.
24시00분
광주지역의 시내전화가 일제 두절되었다.
5월27일(화요일,맑음)
3시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4시00분
도청 주변이 완전포위되었고, 금남로에서는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4시10분
계엄군 특공대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을 개시했다.
5시10분
계엄군이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언을 종료했다.
6시00분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방송했다.
7시00분
공수부대가 20사단 병력에게 도청을 인계했다.
8시50분
광주지역의 시내전화가 다시 개통되었다.
발췌.지식채널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