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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민주화 혁명의 날이 다가오는군요...
게시물ID : history_207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이폰러브
추천 : 4
조회수 : 669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5/16 02:24:13
1980년 오월의 핏빛 상처, 5·18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5·1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집권세력에 대 항하여 최초로 무력항쟁을 전개한, 80년 광주의 그날 로 돌아가보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전대통령이 암살된 1979년 10·26사태 이후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 이 부상하였고, 12·12사건을 통해 군부의 재집권 야 욕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습니다. 5월 13일~14일에 걸쳐 서울·부산· 대구·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죠.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 들이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 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시위가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 했으나,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하 던 비상국무회의가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계 엄포고 10호를 17일 24시에 발효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배경과 맞물려 시작되었습니다 .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경과 계엄포고 10호에 따라 5월 18일 0시 5분경 광주지 역의 복적생과 총학생회 간부들이 예비 검속되는 등 숨막히는 광경이었죠. 1시경 광주일원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였습니다. 대학 직원은 물론 교수들 출입조차도 원천적으로 봉쇄되 었습니다.

계엄포고 10호에는 각 대학의 휴교령이 포함되어 있 었는데요.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 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습 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였으 며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진행했 는데요.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들은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을 시작했습니 다.

군인들은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 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는 등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는데요.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적극공세에 나섰습니다. 계엄 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 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이었 습니다. 결국 19일 시민과 학생의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일시적 소강상태를 보이던 19일 오전이 지나고, 분노 한 학생과 시민들은 군·경찰과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 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이는 시위가 단순한 학 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계기였습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는 산발적으로 계속 되었으며, 20일 오후 6시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 인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은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 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했습니다. 이들을 앞세 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요. 시위대는 전라남도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포위 하고 접전을 계속하였으며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 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정보도를 하지 않은 MBC와 노동청․세무서 등이 시위대에 의해 불에 타기도 했습 니다.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 되자 공수부대는 20일 밤 11시경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감행하였습니다.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 한 시민들은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 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합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 여 스스로 무장한 셈이었죠.

▲시민군의 전남도청 접수. 무장한 시민군 (사진 출 처 : 구글 이미지)

결국 시민봉기는 무력항쟁으로 전행되었고, 시민군 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는데요. 27일 새벽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 5천여 계엄군의 대대적인 무력진 압이 감행되었고, 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오전 5시 22 분 전원 연행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습 니다.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의 1995년 7월 18일 발표에 의하면 확인된 사망자는 193명인데 이 중 군 인이 23명, 경찰이 4명, 민간인이 166명이며, 부상은 852명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결과 광주에서 일어난 힘의 투쟁의 결과 신군부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는데요. 이들은 김대중과 주요 재야인 사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내란기도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결국 전두환은 8월 27일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에 의해 제 11대 대통령 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5·18민주화운동의 진압 방법에 대한 법적 논란이 제기되었는데요. 1994년 5 월 13일 5·18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은 전두환·노태 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하 였으나 1995년 7월 18일 불기소 처분을 받습니다.

그러나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들의 요구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로 부응하여 민주자유당 에 ‘5·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요. 결국 11월 30일 검찰은 12·12사건과 5·18사건의 특 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하였으며 전두 환 전대통령은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12월 3일 구속 수감 되었습니다. 이후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 태우 피고인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었는데요.

▲1996년 법정에 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재판 과정에서 전두환은 제5공화국 정부는 합헌정부 로서 내란정부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 였으며, 노태우는 이 사건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1997년 4 월 17일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며 5·18사건은 내 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다고 단정했습니다.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과 벌금 2205억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에 벌 금 2626억원 추징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 통령 당선에 즈음한 1997년 12월 22일, 이들은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의의와 평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준거가 된 이 사건은 발발 당시 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기 도 했는데요. 1988년 제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95년에 ‘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97년에는 5월 18일 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1980년 광주의 5월을 소재로 한 영화 ‘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어 전국에서 7백만의 관객을 모으기도 했는데요. 5·18민주화운동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 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의 하나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으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 년대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 대 민중운동으로 변화를 가져왔고, 사회운동의 목표 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 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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