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화 배정자(裵貞⼦)
⽥⼭貞⼦ 다야마 사다코 1870년~ 1952년 2월 2 7일) 경상남도 김해 출생,본명은 배분남(粉南),일본 외 교부,군부 스파이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 '조선 흑치마' 한국의 마 타하리?
고종한데 접근해 각종 정보를 빼내고 을사늑약 강제 체결때 막후에서 활약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 체포에 앞장. 여자들을 위안부로 끌고가 금품을 받아 챙김.
일본 밀정으로서 막후에서 활약.
배정자는 김해 밀양부 아전의 딸로 태어났다.아비 배지홍은 대원군 실각때 숙청 바람에 같이 휩쓸려 죽었다. 겨우 4세에 부친을 잃은 배정자는 노비가 된 모친 과 오갈데가 없어 돌아다니다가 밀양에 기생으로 도 팔려갔다.
기생집에서 도망 나와 양산 통도사로 들어간 배정 자는 다시 아버지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인 밀정과 (무역상)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중이던 김옥균을 만나 그의 소개로 15세에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다.
이토는 배정자를 수양딸처럼 자기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이름도 지어주고 밀정으로서 필요한 온갖 것들을 가르쳤다. 이토의 도움으로 24세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배정자는 고종한데 접근해 정보를 빼내고, 미인계 를 사용해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하며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때 막 후에서 활약하며,고종의 러시아 천거도 정보를 빼 내 방해하였다.
이토가 죽은 후는 만주로 건너가 일진회 옛잔당들 을 모아 만주 최대 친일단체인 보민회의 배후인물 로 활동하면서 일본 총영사관 직원으로,또는 일본의 군사 스파이 로 수많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는데 열 렬히 앞장 섰다. 귀국해서는 각종 첩보를 총독부에 제공해 그 공로 를 인정받아 땅도 증여받고 월급도 받으면서 한가 롭게 지냈다.
태평양 전쟁때는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백여명의 조선 여성들을 군인들을 위문한다는 구실로 남양 군도까지 데려간뒤 위안부 생활을 강요하고 거기에 따른 업자들의 금 품도 받아 챙겼다.
해방이후 몰래 숨어살던 79세의 배정자는 친일파 여성 6인중에 제일 먼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 만 반민특위 해산으로 얼마 안 있다 바로 석방되었다가 1952년 한국 전 쟁중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배정자의 화려한 남성편력과 자식 일본에서 조선 유학생 전재식을 만나 아들이 하나 있음(아들 전유화) 일본 제국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과 재 혼(딸 현송자) 현영운의 후배 박영철과 결혼 또 이혼 일본인 오하시(⼤橋) 은행원 최(崔)모 전라도 갑부 조(趙)모 대구 부호의 2세 정(鄭)모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 거 1924년 57세에 밀정생활 은퇴 뒤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
결론 평생 잘먹고 잘살앗으며 죽을때까지
그 후손도 잘먹고 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