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060323193311423
매해 3월이 되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이 있다.
1943년 3월 16일, 라트비아에서는 독일 무장친위대의 자원부대가 창설됐다.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Lettish Volunteer SS Legion)는 2차대전 말미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적군에 맞서 싸운 부대로, 발트 3국 중 가장 큰 규모인 약 11만 명에 달했다. 히틀러의 후방부대를 자처했던 이들에게는 유대인 대학살에 동조했다는 딱지가 붙었고 역사는 이들을 전쟁범죄의 가해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라트비아 국민의 생각은 달랐다.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제공1986년 3월 16일, 라트비아 민족연합정당인 '라트비아의 힘'을 비롯한 우익단체들은 이들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를 기리는 행사를 시작했다. "무장친위대는 히틀러에 충성한 게 아니라 라트비아 독립과 공산주의(소련)를 막기 위해 존재했다"고 주장한 이 행사는 이후 매년 개최되면서 라트비아 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특히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무장친위대를 기리는 것은 신나치즘"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단체 '슈탑'의 드미트리 총무간사는 "이날(3월 16일)은 기념해야 할 이유가 없는 날이다.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는 명백히 나치 군대의 일원이었으며, 국제법정에서 그들이 독일인들의 전쟁범죄에 참가한 것이 판명됐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저지른 전쟁 범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며, 이것은 신나치주의를 기념하는 행사와 다름없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라트비아 우익단체들의 자원무장친위대 행사를 흑과 백으로만 갈라보기엔 복잡한 사연이 숨어있다.
2차대전에 휘말린 라트비아의 비운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 외무부장관은 폴란드를 중심으로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을 나눈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이를 바탕으로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대전이 시작됐다. 동시에 소련은 폴란드 동부였던 발트 3국을 영향권 아래 넣었고 1940년 6월,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발트 3국을 침공했다.
▲ 1941년 6월 라트비아에 진격한 독일군들, 그들을 해방군으로 여긴 라트비아 사람들이 환영하며 꽃을 전달하고 있다.
충돌 : 신나치즘 부활이냐, 애국열사 추모냐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는 어김없이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 추모 행사가 열렸다. 라트비아 정부가 3월 16일에는 어떠한 시위나 집회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100여 명의 시위대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바리케이드를 뚫고 리가 구시가지에 모여들었다.
'라트비아의 힘'을 비롯해 이날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돔 성당에서 전쟁용사들을 기리는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꽃을 하나씩 건넸다. 그들은 당시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거나 사망한 참전 용사들의 가족들이었다.
시위에 참석한 한 노인은 "나는 소련의 볼셰비즘에 저항하는 전쟁에 참여한 용사였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러시아는 라트비아를 점령했고, 점령자에 맞서 싸우기 위한 해방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 국기를 들고 집회에 참석한 핀란드계 에스토니아인 리스토씨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서 라트비아 사람들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이후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묻혀 있는 묘지로 자리를 옮겼다. 참배를 마친 참가자들은 오후 5시부터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앞을 행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위 참가자들의 행진이 예정된 오후 5시가 다가오자 박물관 앞 광장으로 라트비아 자원무장친위대 추모에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