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보는 이에 따라서 일본 입장에서 쓴 글일 수도 있습니다(이런걸 내재적 접근이라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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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본은 자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전'이라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끔찍한 상태로 말이죠.
도쿄는 불바다가 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인류 발명 중 가장 잔악한 무기인 핵무기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은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었고 민간인들조차 '반자이'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천하를 쟁취했던 대몽골제국의 침입도 막아낸(?) 신국神國(?)일본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인 매튜 페리의 내항 이래 근대화 100년, 서양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국가의 혼신을 다해 경주한 결과가 미국에 의한 초토화(total annihilation)였습니다.
덴노는 역사상 처음으로 '육성'으로 항복의 소식을 전했고 이때 일본인들은 덴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로부터 만세일계 동안 이어져온 살아있는 '신'이 인간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어쨌든 일본은 미국의 압도적인 힘 앞에 항목을 했습니다. 존 다우어의 말마따나 일본의 100년몽환은 미국의 군함으로 시작했고 미국의 군함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30일, 태평양전선의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일본에 도착하고 일본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쿄에 몇 없었던 성한 건물을 본부로 삼아 이른바 GHQ(General Head Quarters)라고 불리는 시대를 개막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군은 35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일본 본토에 파병하여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역사상 최초로 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통치한 것입니다.
미군이 본부로 삼았던 제일생명(다이이치세메이) 건물
군정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일본을 무장해제시키고 민주화시키는 것.
이를 위해 미군정은 즉시 일본의 지도부를 체포하고, 전범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맥아더는 히로히토 덴노와 만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신'이었던 덴노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보다 높은 사람이 누군지 명백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정치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더라도 이 사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죠.
미국은 점령기간 동안 어떻게 보면 가혹할 수도 있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물론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자승자박이지만...)
-일본국기 게양 금지
-일본국가 제창 금지
-검도, 가부키, 신토의 금지
-불온서적 검열 및 금지
-라디오, 신문, 방송, 출판, 우편물의 검열
이러한 조치로 인해 1948년 요코하마에서 한 남성은 국기를 게양한 죄로 6개월 중노동 형에 처해졌습니다. 몇몇 조치들에 대해서 일본인들도 순순히 응하고 백프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몇몇 조치들은 일본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검도를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보고 금지한 것은 일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개인 우편물도 철저하게 검열되었고, 신문과 라디오는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 점령군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나 출판은 모두 금지되었고 심지어 '검열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검열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연합국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 또한 금지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컨대 점령군 병사에 의한 강도나 살인, 구미 제국의 유색인종 차별, 근세 유럽의 식민지배에 대한 서술, 연합국 식민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방투쟁 등도 보도 금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인을 철저하게 새로 탄생시키 위해 국가주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을 강제합니다.
처음에 미국은 일본 정치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헌법 초안을 만들라고 요청하였으나 일본 정치인들이 가지고 오는 초안이 만족스럽지 않자 미군이 직접 작성안 초안을 제시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법학교수들과 정치인들이 모여 고민해서 만든 초안이 한칼에 리젝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미군의 미군이 제시한 초안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계속 내비쳤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부 정치인들은 이럴거면 뭐하러 우리보고 헌법을 만들라고 하냐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헌법의 선포는 어쨌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 정치인들의 수정을 거쳐 선포된 것이라는 모양새는 갖추었습니다.
신 헌법의 주요골자는 '상징천황제'와 '비무장화'였습니다. 즉 천황은 상징으로 만들고 일본은 방위의 수단으로도 전쟁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것입니다(특히 전쟁의 영구포기는 독일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던 것).
일본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주권을 부정하면서 미점령군은 정말 일본을 환골탈태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대만을 제외한 중국을 통일시켰고
같은 해 소련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공산권 세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요새로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재검토하면서 일본을 우호국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극동군사재판소의 전범재판은 졸속으로 진행되었고 히로히토 덴노에 대해서는 완전한 면죄부가 주어졌습니다.
게다가 전후 일본에서 공산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들에 대한 지지율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 게 허황된 상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으로서는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우익 정치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1945년 전범으로 기소된 자들이었죠. 그리고 그 정점에는 히로히토 덴노가 있었고요.
그래서 미국은 (물론 맥아더의 개인적 취향도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히로히토를 구해내려고 했습니다.
특히 도조 히데키가 재판장에서 '우리는 천황의 뜻에 반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제일 경악했던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전후 일본의 안정을 위해 히로히토를 꼭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도조는 미국 변호인단의 압박을 받은 후에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습니다. '천황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그리고 미국은 서둘러 점령정책을 끝내고 일본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을 강행하였고 여기에 이해관계가 있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 남북한 등은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샌프란스시코 조약의 졸속처리로 인해 지금 동아시아의 영토분쟁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도문제, 남중국해, 센카쿠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약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미국이 독도를 누구 소유로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이승만라인을 선포하여 독도를 선제적으로 점거, 실효지배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오해 금지. 이승만은 김일성 다음으로 한민족을 많이 죽인 독재자입니다)
일본의 전후처리는 굉장히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의 일본 점령기는 일본인을 개조하기는 커녕 일본인의 자존심만 짓밟았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평화를 유지하기는 커녕 동아시아 분쟁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우익은 국가를 어떻게든 '정상화'시켜야 한다, 즉 불가항력적 힘에 의해 잃어버렸던 '주권'과 '긍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보며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전쟁에 대한 기억은 거의 망각했습니다. 그리고 냉전이라는 상황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변덕을 방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미국 입장에서 이러한 '방종'은 허용범위 안에 있었고 또 지금도 그러한데, 이는 미국이 오늘날에도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점령국'이기 때문이죠.
반면 우리 입장에서 일본의 '방종'은 '방종'이 아니라 '광폭'이라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