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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명나라 장수, 오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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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2
조회수 : 272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5/14 18:32:44
작자: 미상
 
나는 현재의 역사뒤집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청사(淸史)의 오삼계에 관한 기록을 보면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래에서는 오삼계와 청나라에 관하여 탐색해보고자 한다.
 
먼저 얘기할 것은 청나라는 오삼계의 역사문제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가 쓰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미화하고 자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적(실패자)을 왜곡하고 추화했다. 오삼계는 바로 이런 대우를 받은 역사인물이다.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오삼계는 바로 청나라가 왜곡시키고, 추화시킨 와삼계이다.
 
청왕조는 오삼계를 이백년간 욕했다. 후인들은 오삼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따라서 욕했다. 청청부가 오삼계를 욕한 것은 그가 하마터면 강희왕조를 무너뜨릴 뻔했기 때문이고, 후인들이 오삼계를 욕한 것은 그가 청정부를 도와주었다고 오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정부는 오삼계가 산해관을 넘도록 요청했다고 떠벌리기를 좋아했다.
 
청왕조는 오삼계의 역사문제에서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왜곡했는가?
 
첫째, 산해관전투의 진상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청왕조는 왜 산해관전투의 관련자료를 없애버렸을까?
 
둘째, 오삼계는 언제 진정으로 청나라에 투항했는가?
 
셋째, 오삼계가 운남에서 거병한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넷째, 소위 "삼번의 난"의 오군(吳軍)과 청군(淸軍)의 진실한 전투상황은 어떠했는가? 강희왕조는 어떤 부끄러운 전투를 감추었는가?
 
다섯째, 오군이 실패한 주요원인은 무엇인가?
 
 
1. 산해관전투의 진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청왕조의 문건자료는 완벽하게 보존하고있다. 왜 유독 산해관전투에 관련한 자료만 소각해버렸을까? 청왕조는 도대체 세상사람들에게 무엇을 감추었을까? 우리가 검토해보기로 하자.
 
첫째, 청군은 왜 처음에 서협(西協) 즉, 밀운(密雲)으로 장성을 넘으려다가, 나중에 산해관으로 넘는 것으로 바꾸었을까?
 
둘째, 오삼계는 어떻게 청군의 계획을 알았을까? 그리고 청군과 공동으로 이자성(李自成)을 유인하여 산해관에서 공격하기로 결정했을까? 그후에 청군을 중협(中協, 喜峰口)를 통하여 장성을 넘어, 이자성의 후로를 막았으며, 이자성을 일망타진한다.
 
셋째, 도르곤은 구두로 오삼계에게 병력 1만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왜 시간을 계속 끌면서 이행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넷째, 오삼계가 처음에 설계한 산해관전투는 섬멸전이었다. 나중에 왜 황급히 격궤전(擊潰戰)으로 바뀌었는가?
 
다섯째, 청군이 산해관에 도착한 그날 저녁, 왜 깊은 밤에 포성이 끊이지 않았는가? 보병은 한밤중에 이동을 했는가? 그 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여섯째, 청군과 이자성군은 왜 일편석(一片石)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는가?
 
일곱째, 나중에 이자성은 왜 오삼계와 여러번 협상하여 공동으로 항청(抗淸)하는 문제를 논의했을까?
 
이상의 이런 역사문제는 청사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왕조가 고의로 숨긴 것이다.
 
오삼계와 청군은 수십년간 싸워왔다. 그리고 도르곤과는 옛날부터 적수였다. 하룻밤만에 어떻게 친밀한 파트너가 될 수 있겠는가? 적수간에는 왕왕 의심, 숙임수, 상호이용이 충만하다. 도르곤과 오삼계도 예외일 수는 없다. 산해관전투의 여러 의문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한다.
 
역사는 증명한다. 일찌기 오삼계와 도르곤이 접촉하기 전에, 도르곤은 이미 출발했다. 이때 도르곤이 내건 명분은 이자성을 소멸시켜 명나라가 내란을 평정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협 즉 밀운으로 장성을 넘기로 결정했다. 우회하여 북경으로 간 후, 이자성의 후로를 막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홍승주의 아이디어였다.
 
홍승주(洪承疇)와 이자성은 여러해동안 싸운 적이 있으므로, 이자성의 전술을 잘 알았다. 홍승주는 이자성이 쉬운 길을 택하길 좋아하고 어려운 길을 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한번 부닥치면 궤멸할 것이다. 청군이 서협으로 장성을 넘어, 이자성의 후로를 막으면, 이자성이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했다. 청군은 이 계획에 따라 행동했고, 이미 부신(阜新)까지 진격했다.  
 
오삼계는 확실히 홍승주를 통하여 이 정보를 얻었다. 왜냐하면 홍승주는 이전에 오삼계의 상사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오삼계가 홍승주를 통하여 도르곤과도 연락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숭정제는 이미 죽었고, 그들이 공개적으로 접촉한다고 하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오삼계가 청군에 1만의 병력을 빌리는 일도 이로 인하여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1만이었다. 오삼계가 이자성을 이기지 못할까봐 걱정한 것일까? 이자성이 산해관을 공격하도록 유인한 것은 오삼계의 아이디어이다. 이기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면서, 그를 유인하여 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청군은 이자성군보다 훨씬 강하다. 그러나, 오삼계는 두려워한 적이 없다. 더더욱 오삼계는 5만의 백전노장인 정규군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든간에 오삼계는 이자성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1만을 빌리려고 했을까?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송산,금주전투이후, 홍승주는 친히 송산의 명군을 지휘하였고, 포로로 잡힌 인원이 삼천여명이다. 조대수(祖大壽)의 금주도 포위되어 명군 칠천여명이 청나라에 투항한다. 두 인원을 합치면 딱 1만명이다. 오삼계가 빌리려는 1만명과 들어맞는다.
 
강희왕조는 오삼계의 역사문제에 손을 댔다.
 
청왕조는 이 두 청나라에 투항한 명군들에 대하여, 조대수의 전가족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전부가 청군에 의하여 도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믿을만한가? 청왕조는 왜 이렇게 말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감추려는 것인가?
 
우리는 가장 멍청한 군사가, 정치가들이라도 다 알고 있다. 적군을 와해시키고 적군을 약화시키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포로를 우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청군은 멍청하지 않다. 만일 투항하는 병사들까지 죽여버리면, 다음에 누가 투항해 올 것인가?
 
도르곤이 가장 잘하는 방법은 한군이 한인을 죽이게 하는 것이다. 한군의 투항병들이 체두변발을 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그들은 오늘은 투항했지만, 내일은 창을 거꾸로 들 수도 있다. 오삼계의 외삼촌인 조대수는 세번 투항했다 세번 다시 돌아온다. 한병은 일단 체두변발하고 옷을 바꿔입으면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만날 면목이 없다. 이때 송금의 투항병들은 이미 체두변발을 하고 옷을 바꿔입었다. 겉으로는 만주인들과 같다. 일부 송산의 장수들은 체두변발을 거부하여 청군에 살해당한다.
 
분명히, 오삼계는 이들 부대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들 부대를 자신의 부하로 재편하고자 했다. 이 계쇡은 옛 상사인 홍승주와 친외삼촌인 조대수의 협조하에 쉽게 실현되었다. 도르곤이 이들 부대를 오삼계에게 넘겨서 지휘받게 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오삼계가 1만명을 빌리려고 했던 진정한 이유이다.
 
당연히 도르곤은 오삼계가 바라는대로 쉽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도르곤은 이를 기화로 오삼계를 회유하고 속이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산해관전투때 벌어진 사건의 내막이다.
 
오삼계와 도르곤은 상의해서 정한다. 도르곤이 중협(희봉구)로 장성을 넘어, 이자성의 퇴로를 차단한다. 양면에서 이자성을 협공하기로 한다. 그러나, 도르곤은 산해관으로 직접 밀고 들어온다. 이리하여 오삼계는 경각심을 갖게 된다.
 
바로 이때, 청군은 이자성군과 일편석에서 근접전을 벌인다. 사정은 아주 분명해진다. 도르곤은 일편석에서 이자성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한다. 이자성도 일편석에서 오삼계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한다. 그래서 청군과 이자성군이 일편석에서 근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오삼계군과 이자성군을 합쳐야 겨우 십일만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의 두 부대는 모두 고군(孤軍)이다. 원병이 올 수가 없었다. 황제가 해로로 양식을 그들에게 보내줄 수도 없었다.
 
이때 도르곤이 지휘하는 전투경험이 많은 14만 청군이 이미 영원에서 출발하여 급행군을 해서 산해관으로 밀고 내려왔다. 청군의 후방인 심양에는 도르곤의 군대를 지원해줄 병력이 최소 이십만이 있었다.
 
청군이 일단 이자성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바로 오삼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된다. 형세는 오삼계에게 아주 불리했다. 산해관을 지키고만 있는 것은 죽는 길이다. 오삼계군의 유일한 활로는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나가는 것이고, 그래야만 빠져나갈 희망이 있다.
 
오삼계군은 이자성군에게 격궤전을 시작하는 그날, 어떤 사람은 오삼계군의 가운데 청군이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군의 어떤 사병이 크게 고함을 지른다. 오랑캐병이 왔다. 이자성의 군대는 혼란에 빠지고, 이자성은 머리를 돌려 달아난다."
 
세상사람들과 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추정한다. 오삼계는 이때 이미 청나라에 투항했다. 청나라도 이를 영광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이런 추정을 그냥 묵인했다. 그러나, 오삼계 본인이 인정한 것은 그가 이저성을 동관까지 추격했다는 것뿐이다.
 
만일 사학가들을 추정대로라면, 산해관전투때의 여러가지 수수께끼는 해결되지 않는다. 만일, 오삼계가 이때 청나라에 투항했다면, 그는 이런 격궤전을 벌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원래 이미 함정에 빠진 이자성을 놀라서 도망치게 하고, 이자성에게 도망칠 기회를 갖게 해서, 자신의 부모와 가족 수십명을 죽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자성은 금방 알아차린다. 오삼계군내의 오랑캐병은 진정한 청나라병사가 아니라, 청나라병사의 옷을 입고, 체두변발을 하고있지만, 한어를 유창하게 하는 청나라병사라는 것을. 그들은 바로 송산, 금주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명군인 것이다. 그들은 원래 오삼계와 같은 군대에 있는 사람들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청나라군대는 3로로 나누어 오삼계의 군내에 섞여 있었다. 만일 서로 잘 몰랐다면, 수십년간 적대적이었던 두 군대가 회합후 짧은 몇시간만에 이렇게 잘 섞일 수는 없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함께 있게 할 수 있을가? 만일 진정한 만주병이라면, 언어교류상의 장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청군과 오삼계군은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오군과 이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송산, 금주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명군밖에 없다. 그들은 원래 오삼계군과 같은 군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량은 꼭 1만명이다. 청정부에서 '투항해온 이 두 부대는 모조리 도살했다"는 주장과 종합해보면 그 비밀은 더 말안해도 분명할 것이다.
 
오삼계군은 이자성군에게 격궤전을 발동한 후, 사십리를 추격해간다. 그 주요한 목적은 바로 도르곤의 포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자성은 금방 오삼계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장약기(張若麒)를 보내어 오삼계와 공동항청문제를 협의한다. 오삼계게 내놓은 조건은 "태자 이왕을 돌려보내고, 경성에서 속히 떠나며, 태자가 즉위한 후 병력을 해샨시킨다"는 조건이었다.
 
남명소조정은 오삼계를 계료왕에 봉했다. 그리고 그가 병력을 빌려 이자성을 패배시킨 것을 표창한다. 이것은 오삼계가 당시에 아직 청나라에 투항한 것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 청왕조는 이 시기의 역사를 굳이 왜곡시킨 것일까? 산해관전투의 진상을 숨기는 것이 청왕조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첫째, 도르곤은 오삼계가 요청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산해관을 넘었다. 명나라가 내란을 평정하는 것을 돕는다는 기치를 걸고 북경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말해왔다. 산해관전투의 진상은 그들의 이 사기극이 허위임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둘째, 오삼계는 성공적으로 송산, 금주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명군을 거두었다. 이것은 청나라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다.
 
셋째, 오삼계를 추화하여 악명이 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충관일노위홍안(沖冠一怒爲紅顔), 즉 진원원이라는 여인을 위하여 이자성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널리 퍼트린다. 오삼계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오삼계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할 수 없이 투항한 것이다...등등.
 
결론적으로 산해관전투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이자성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게 북경에 진입한다. 청나라는 이자성이 원래 그들이 차지해야할 승리의 과실을 빼앗아갔다고 여겼다. 그래서 출병하여 이자성을 토벌하기로 결정한다. 홍승주는 이자성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청군에게 밀운으로 장성을 넘어, 이자성이 북경으로 돌아갈 퇴로를 차단할 것을 건의한다. 이는 주로 이자성의 도망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청군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미 부신까지 진군했다.
 
청군은 동시에 사람을 산해관으로 보내어 오삼계에게 투항할 것을 권한다. 동시에 이자성도 사람을 산해관으로 보내어 오삼계에게 투항할 것을 권한다. 이때의 오삼계는 쌍방이 쟁취하려는 중요인물이었다.
 
오삼계는 처음에 이자성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북경에서 소식이 전해온다. 오삼계의 부친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애첩 진원원도 유종민이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이자성의 사병이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이때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투항해서는 앞으로 희망이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청나라에서 보내온 사신과 이자성을 소멸시킬 것을 협의한다.
 
오삼계가 청군의 비밀사신으로부터 알게 된 것은 청군이 북경으로 진격하여 이자성을 소멸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에 흥미를 보였고, 청군과 합작하기로 결정한다.
 
이자성이 산해관을 공격하도록 유인하여, 도르곤이 중협을 통하여 장성을 넘어 이자성의 퇴로를 차단하여, 양면에서 이자성을 협공하기로 한다. 이 계획에 따라, 만일 이자성이 산해관으로 진격하면, 날개를 달았다고 하더라도 도망칠 수 없게 될 것이다. 합작조건으로 오삼계는 1만병력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고, 송산, 금주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명군을 지정한다.
 
이때의 오삼계는 청군의 입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여러번 청군이 입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매번 입관때바다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즉,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하고, 빼앗기만 하면 다시 관외로 돌아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오삼계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홍타이시(청태종)이 막 죽고 난 후, 정권이 도르곤의 수중에 장악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범문정등 청나라에 투항한 한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원을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인 범문정의 도움을 받아,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하고 빼앗는 것을 금지한다.
 
도르곤은 오삼계의 서신을 받은 후, 송산, 금주의 항청명군을 미낄 삼아 오삼계와 이자성이 서로 죽고 죽이도록 계획한다. 그들이 양패구상한 후, 청군이 영원에서 산해관으로 진격하여 오삼계, 이자성의 군을 일망타진하면 되는 것이다.
 
도르곤은 계획이 누설된 후, 다시 혈주를 마시고, 맹약을 하는 방식으로 오삼계를 안정시키고자 한다. 그후에 일편석에서 이자성의 퇴로를 차단하고 오, 이 양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 것이다.
 
도르곤은 계획에 따라 희봉구로 장성을 넘지 않았다. 이는 오삼계의 의심을 불러왔다. 청군과 이자성군이 일편석에서 조우전을 벌인 것은 도르곤이 일거에 오삼계, 이자성의 양군을 집어삼키겠다는 전략목표를 드러낸 것과 다름이 없다.
 
오삼계는 어쩔 수 없이 밤을 새워 공세를 개시한다. 도르곤에게 붙잡혀 있던 송산,금주의 명군도 구출해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지성의 군에 격궤전을 시작하는데, 주요 목적은 도르곤의 포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의도를 알고, 장약기를 오삼계에게 보내어 연합항청문제를 협의하게 한다. 다만, 이자성은 산해관을 공격하는 것이 오삼계의 계략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이 급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영평에서 오삼계의 부친 오양을 살해한 상태였다.
 
이자성은 북경으로 도망친 후, 다시 미친듯한 보복성도살을 시작한다. 북경 이호후통에서 오삼계의 모친과 일가족 36명을 살해한다.
오삼계군은 황태자를 찾지 못하여 여전히 고군(孤軍)이었다. 북경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자성을 추격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동관까지 이동한다. 이틀 후, 도르곤은 오삼계가 그에게 명나라의 내란을 평정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치를 내걸고 북경을 점령한다.
 
 
2. 오삼계는 언제 진정으로 청나라에 투항했는가?
 
일찌기 송산,금주전투이후 오삼계는 영원, 산해관으로 물러나서 지키고 숭정제가 그를 관녕사진도독으로 임명하였을 때, 청태종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오삼계에게 투항을 권한다. 예를 들어, 형인 오삼봉(吳三鳳), 외삼촌 조대수 등 일찌감치 청나라에 귀순한 명나라의 구관료장군들이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난다. 오삼계는 근본적으로 청나라에 투항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청군이 입관하기 전에 홍승주, 조대수를 산해관에 파견하여 투항을 권유한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오삼계는 청군을 이용하여 이자성군을 소멸시키고자 한다. 결과적으로는 도르곤에게 이용당한다. 오삼계와 도르곤 쌍방은 이미 신뢰감을 잃었다. 그러므로 도르곤이 집권한 기간동안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할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없었다.
 
다만, 남경의 남명소조정이 멸망한 후, 오삼계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오삼계는 동관에서 서진하여 관중으로 들어간다. 청정부는 그들의 지시를 받아서 갔다고 떠벌인다. 그러나 우리는 당통(唐通)이 청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서왕(平西王)"이라는 봉호는 만청이 당통에게 부여한 것이다. 당통이 청정부에 보낸 문서에 따르면, 당통이 이미 명을 받아 한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삼계가 한중에 나타난다. 그리고, "평서왕"이라는 봉호가 오삼계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통이 한중에 도착한 후 오삼계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더 이상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것은 청정부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의 한중에 두 명의 평서왕이 있다니. 자료를 보면 우리는 당통이 정부에 보낸 문서밖에 없다. 오삼계가 올린 문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때 오삼계는 근본적으로 청나라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보고서를 올리지 않은 것이다. 오삼계가 청정부에 올린 주절(奏折)은 십여년후 운남에 들어간 후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평서왕의 의미는 사천의 장헌충을 없애라는 것이다. 오삼계의 실력으로 장헌충을 없애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르곤은 다시 하오거(豪格)에게 사천으로 들어가서 장헌충을 소탕하라고 명령한다. 나중에 이국한(李國翰)을 사천총독에 임명한다. 그 목적은 분명히 오삼계가 사천으로 오군의 군사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오삼계가 한중으로 진격한 것은 청나라조정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오삼계가 한중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은 것이며, 청나라정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삼계는 한중에서 십여년을 머문다. 이 기간동안 청나라정부를 위하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순치15년 오삼계는 홍승주의 요청을 받아 운남으로 진군한다. 금방 서남의 항청세력은 모두 오삼계의 휘하에 들어온다. 오삼계의 세력은 크게 증대된다. 청나라조정은 오삼계로 하여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주유랑을 곤명으로 데려오도록 핍박한다. 주유랑이 곤명에 도착한 후, 오삼계는 명왕조의 관복을 입고 주유랑을 참배한다. 이를 보면 오삼계는 청왕조를 안중에 두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공공연히 청나라조정을 무시했고, 주유랑을 보좌하여 명나라를 수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유랑은 그가 우호적인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오삼계를 크게 욕한다.
 
오삼계가 주유랑을 도와서 명왕조를 회복하려한다는 소식이 퍼져나간다. 사방팔방의 옛 명나라관료들이 곤명으로 운집한다. 그러자 주유랑은 기고만장해졌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오삼계는 이 계획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주유랑을 청정부에 넘긴다. 그러나, 교활한 청정부는 주절을 돌려보낸다. 주유랑을 죽이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오삼계가 진정으로 투항한 것인지 가짜로 투항한 것인지를 시험해보려 한 것이다. 주유랑을 남겨둔다면 반드시 청정부와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없어서인지, 오삼계는 평화와 전쟁 중에서 평화를 선택한다. 곤명의 금전에 휘날리는 깃발에 쓰여진 네 글자, "천하태평"은 바로 이때의 오삼계의 마음을 대표한다.
 
주유랑을 죽인 후, 오삼계는 진정 청나라에 투항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정부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들은 부마를 미끼로, 오삼계에게 이미 결혼하고 처자식이 있는 큰아들 오응웅을 북경으로 보내어 인질로 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오삼계가 진정으로 청나라에 투항한 후의 첫번째 댓가이다.
 
 
3. 오삼계가 운남에서 거병한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청정부는 오삼계가 운남에서 군사비를 너무 많이 써서, 청정부가 오삼계군을 더 이상 먹여살릴 수 없으니, 철번(撤藩)하겠다고 결정한다. 나중에 오삼계가 운남에서 사사로이 동광, 은광을 채굴하여 군비로 썼다고 질책한다. 청정부의 이런 상호 모순되는 말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사실, 오삼계가 산해관을 떠난 후, 아무도 그에게 군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오삼계의 군비는 계속 스스로 모았다. 누가 적대세력을 위하여 군비를 제공해주겠는가? 하물며 청정부는 철번이전에, 이미 분화와해의 방법으로 오군을 하나하나 운남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예를 들어, 감숙의 왕병번, 평량의 장용, 한중의 왕보신, 사천의 오지무, 귀주의 이본심등이 그들이다.
 
이때, 운남의 오군도 많지 않았다. 오군이 스스로 조달하는 군비도 다 쓰지 못했다. 오삼계는 남은 구리로 곤명금전을 만든다. 이를 보면 군비문제는 핑계임을 알 수 있다. 오삼계는 이때 나이가 67세였다. 일찌기 명리를 다툴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큰아들 오응웅이 북경에 인질로 잡혀 있지 않은가? 이때의 오삼계는 고향인 요동으로 가서 만년을 보낼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오삼계는 철번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데, 이는 그의 진심이었다.
 
기실, 오삼계가 운남에서 거병한 주요 책임은 나이어리고 광오한 강희제에 있다. 사학자들은 위대한 강희제를 치켜세우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기는 싫어한다.
 
강희제가 간과한 문제는 오삼계의 수하는 반청인사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삼계가 관리감독하는 한에는 억지로 청나라에 투항해 있지만, 오삼계가 떠나면 그들이 다를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강희제는 경솔하게 조정의 대신인 주국치를 운남총독으로 보낸다. 그는 오삼계의 부하를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오삼계가 운남을 떠나기 전에, 오응린, 오국귀, 고득첩, 하국상, 호국주등이 연합하여 주국치를 죽이고, 오삼계에게 반청의 기치를 들도록 핍박한다. 이 돌연한 사태에 오삼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오삼계는 봉쇄령을 내린다. 그 목적은 북경에 인질로 잡혀 있는 큰아들 오응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그 소식을 들은 후, 화가 난 나머지, 북경에 인질로 잡혀 있던 오삼계의 큰아들 오응웅, 큰손자 오세림등 전가족을 죽여버린다. 이 비보가 전해지자, 오삼계는 비통한 나머지, 청정부를 토벌하기로 결정한다.
 
그후, 강희제는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오삼계는 일찌감치 반란을 하려고 준비했다고 얘기한다.
 
 
4. 오삼계와 청군의 진정한 전투상황은 어떠한가? 강희제 및 청왕조는 어떤 낯부끄러운 전투를 숨겼을까?
 
오삼계가 운남에서 청정부를 토벌하기로 선서한 후, 일찌감치 청정부의 고압적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한민족과 기타 소수민족은 속속 호응한다. 분노의 화염은 금방 강남의 여러 성으로 번진다. 광망한 강희제는 일시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오삼계는 마보(馬寶)를 선봉으로 하여, 귀주를 거쳐 호남으로 들어가게 한다. 귀주총독 감문혼은 최고의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병마를 모집하여 오삼계군의 전진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오히려 부하에게 피살되고, 귀주군은 이본심의 지휘하에 모조리 오군에 귀순한다.
 
오삼계는 계속 호남으로 전진한다. 가는 곳의 지방관리들은 민중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오군을 영접한다.  오군은 금방 형양, 장사, 악양등지를 점령한다.
 
오군은 계속하여 북으로 진격하다가 무한에서 저지를 당한다. 오삼계는 고득첩, 하국상에게 명하여 강서 남창, 구강을 거쳐 북상하는 길을 뚫도록 한다. 오군은 강서 라자산에서 청군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웨러(岳樂), 라부(喇布)의 청군 2만인마를 소멸시키고, 남창, 구강을 점령한다.
 
웨러, 라부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파양호로 철수한다. 그 후에 동위국(董衛國), 시르겐(希爾根)이 이끄는 청군원병을 얻어, 회합후 합계 10만의 청군으로 남창, 덕안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오군의 한대임(韓大任)은 구강에서 장강을 넘다가 청군수군 양첩을 만나고, 한대임의 부대 3만여명은 장강의 물 속에 수장된다.
 
한대임의 부대가 전멸한 후, 웨러와 동위국은 계속하여 호남의 오군 하국상 부대를 공격한다. 오군의 호국주는 다시 고득첩을 기용한다. 고득첩은 적에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공격하고, 적이 준비를 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한다. 이렇게 하여 웨러, 동위국의 청군을 대파한다. 청군은 5만여명의 인마를 잃고 남창, 구강으로 도망친다. 이때부터 청군은 강남에서 수세로 몰리고,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한다.
 
이때 청군의 총사령관인 군기대신 모거(莫咯)은 서안에서 병력을 모아서 사천으로 진공한다. 오군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고득첩이 구강에서 병사함에 따라, 오삼계는 오군이 한대임과 같이 경거망동하는 일이 벌어질까봐, 호남, 강서의 오군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도록 지시한다.
 
오삼계는 사천으로 가서, 친히 서북 오군을 지휘한다. 이때 청군은 와르카군을 선봉으로 하여, 이미 사천의 보녕에 도착했다. 모거의 중군은 양평관으로 진입했고, 패륵 차니(察尼)는 후군으로 봉상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오삼계는 정문린으로 하여금 청군 와르카를 사천 보녕에서 막도록 하고, 감숙 고원의 왕병번, 오지기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약양을 점령하여 청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한다. 오응린에게는 한중으로 들어가, 왕보신의 군대로 하여금 반군에 가담하여 청군의 퇴로를 절단하도록 한다.
 
이렇게 되니, 모거, 와르카의 10만청군은 실제로 오군에 전략적으로 포위되었다. 군수조달은 이미 오군에 철저히 차단당한다. 오삼계는 동시에 광원지구의 민중들에게 견벽청야를 명한다. 그리하여 청군 와르카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병변을 통하여 스스로 궤멸한다. 왕보신은 이 기회를 틈타 와르카군의 궤멸한 잔병을 수습하고, 모거군을 한중으로 진격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도중에 모거군을 습격하니, 모거는 양평관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오군은 양평관을 포위공격하고, 모거군을 섬멸한다. 청군 총사령관 모거가 전사하고, 십만 청군은 전멸당한다.
 
광원,양평관의 대전이후, 오군은 2로로 나누어, 1로는 오삼계가 친히 지휘하여 한중에서 출발하여 운양, 균주를 거처 하남으로 진군하고, 1로는 왕보신이 이끌고 봉상, 평량방향으로 움직인다.
 
오삼계는 서로군이 계속하여 청군의 패륵 차니군을 추격섬멸한 후, 서진하여 평량에서 장용군을 섬멸시키고자 했다. 그 후에 다시 연안으로 진격하여 투하이, 패륵 차니, 와르카등의 청군의 잔여부대를 포위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군의 왕보신 부대는 패륵 차니군의 일부를 추격섬멸하고 보계에 도착한 후, 오삼계의 계획에 따라 평량으로 진군하여 장용의 청군을 먼저 섬멸시키지 않는다. 왕보신은 왕병번, 오지지와 헤어져서, 방향을 동으로 바꾸고 서안을 점령한다.
 
이때 오삼계는 운양에서 병이 났다. 전략배치가 왕보신에 의하여 흐트러짐에 따라, 오삼계는 오군에 잠시 군사행동을 멈추라고 지시한다.
 
패륵 차니, 와르카등의 청군 잔여부대가 서안으로 도망친 후, 청나라조정은 공황에 휩싸인다. 섬서, 산서, 하남, 하북등지의 지방관리들이 속속 북경으로 도망쳐 온다. 효장태후는 화가나서 신하들을 욕했다: "오삼계가 삼두육비냐? 너희가 놀라서 이 지경이 된 단 말이냐." 강희제는 다시 투하이를 군기대신으로 임명하고, 급히 난주의 청군으로 하여금 연안으로 이동하여 지키게 한다.
 
왕보신은 연이은 승리로 교만해진다. 청군의 신임 군기대신 투하이는 아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유인술로 적을 깊이 들어오게 한다. 왕보신부대를 서안을 떠나도록 유인하고, 장용의 군대로 하여금 서안을 급습하여 점령하도록 한다. 서안을 잃은 왕보신은 퇴로가 차단되고, 청군에 포위되자, 나중에 식량이 부족하고 물이 부족하여 전멸하게 된다.
 
왕보신은 패배후 포로로 잡힌다. 왕병번은 고원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오삼계는 투하이의 다음 진격목표는 고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담홍, 마웅도등을 한중에서 병력을 이끌게 하여 고원의 왕병번에 증원군을 보낸다. 동시에 고원의 오군에게 투하이의 청군을 어떻게 섬멸시킬 것인지 계획을 알려준다.
 
담홍, 마웅도의 오군은 한중에서 원병을 이끌고 우회하여 비밀리에 고원에 진입한다. 투하이는 오삼계가 파견한 원군이 많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원래의 계획대로 10여만의 청병으로 고원을 공격한다.
 
투하이의 청군이 막 고원에 접근했을 대, 오삼계의 계획에 따라, 마웅도, 오지지의 양군이 좌우 양로로 나누어 비밀리에 경원, 진원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낫과 같은 형태로 투하이의 퇴로를 차단한다. 투하이는 오삼계의 궤계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전군에 평량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한다.
 
오삼계의 원래 계획은 투하이가 평량으로 물러나면, 오지지, 마웅도의 양군이 계속 봉상, 장무로 공격하는 것이었따. 왕병번, 담홍의 양군은 기병,보병으로 청군을 추살하는 것이다. 투하이군은 혼란에 빠져 평량으로 물러나는 것이 안되겠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장무로 도망친다. 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죽인다. 고원, 평량에서 장무까지 계속하여 추격하며 죽인다.
 
투하이군이 대패하고, 10여만의 청군은 나중에 2만도 남지 않는다. 투하이, 장용, 조량동, 왕진보는 잔여병을 이끌고, 서안으로 도망쳐 온다. 이제 청군의 북방주력군은 기본적으로 오군에 모두 소멸된다. 오삼계는 아주 기쁘게 성도로 돌아가 황제에 오르고, 대주(大周)왕조를 건립한다.
 
(여기서 설명할 것은 오삼계가 황제에 오른 곳이 호남 형양이 아니라, 사천 성도라는 것이다. 호남 형양의 형산은 오삼계의 둘째손자 오세번이 계위한 곳이다. 오삼계가 돌연 중풍으로 송자에서 병사함에 따라, 오세번의 계위가 조금은 황급했다. 청나라정부는 이를 가지고 오삼계를 추화한다. 그래서 진실한 장소를 숨긴 것이다.)
 
오삼계가 성도에서 황제에 오른 후, 국호를 '주'로 한다. 등극대전이 끝난 후, 오삼계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친히 정벌하고, 대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오삼계는 송자에서 군대를 결집하여 북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거기서 중풍이 들어 사망한다. 오삼계의 유체는 강장을 따라 금사강으로 가고, 거기서 운남으로 모셔가서 금사강변에 안장한다.
 
 
5. 오삼계군이 실패한 주요원인은 무엇인가?
 
오삼계와 청왕조의 전쟁과정에서 청왕조는 실제상 이미 오삼계에 의하여 무너졌다. 오삼계는 승리의 함성 속에서 황제위에 오른다. 청정부가 얘기하는 것처럼 비바람에 흔들리는 와중에 황급히 황제위에 오른 것이 아니다.
 
오삼계이 병사는 오군으로 하여금  최고사령관을 잃게 하였다. 이때부터 아무도 오군의 방대한 부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된다. 오삼계의 사후에 부하들은 각자 알아서 싸우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청군과 년간 싸웠고, 마지막에는 청군에 각개격파당한다.
 
오삼계가 죽은 후 부하들은 신건수사 임흥주가 청군에 투항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명도 투항하지 않았다.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다. 천군의 한 장수는 청군에 투항하고자 했는데, 결국은 자신으 반청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청군이 곤명 오화산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오화산에 있던 궁녀, 시녀와 기타 수백명이 전부 자살한다. 한 명도 투항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들의 반청은 스스로 원한 것이지 오삼계가 핍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오삼계의 돌연한 병사가 오군이 실패한 주요원인이다. 만청이 강대하여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청왕조의 전체 역사에서 이처럼 천우신조로 다 진 전투를 승리로 마감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출처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4dwc&articleno=16153694&maxNo=16153770&minNo=15827399&maxDt=20120312190710&minDt=20080921230846&maxListNo=16155338&minListNo=16153872&maxListDt=20150210182103&minListDt=20120605213935&currentPage=2&beforePage=1&categoryId=556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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