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結論は、韓国は古代から全く進歩していなかったが、日本は独自の文化を発達させ、安定した統治と高い技術水準を生み出し続けてきた。江戸時代どころか、古代からすでに差は顕著であった。 소위 수차 "북봍"을 첨부하겠습니다 수차(물레방아)를 수백년 동안 결국 보급하지 못한 나라의 이야기. 농업 기술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차례 도입했지만 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1429년 세종 11년 12월 3일 일본의 수차가 뛰어나다는 보고 1430년 세종 12년 9월 27일 수차를 만들라고 하다 1431년 세종 13년 5월 17일 중국도 일본도 수차의 득을 보는데 우리나라에는 그것이 없다 1431년 세종 13년 11월 18일 일본과 중국 수차의 연구에 대한 기술(記述)이 드문드문 1431년 세종 13년 12월 25일 수차도입을 시도하다 1451년 문종원년 11월 18일 아무래도 수차의 도입에 실패 1488년 성종 19년 6월 24일 수차도입의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소식이 없다...) 1502년 연산군 8년 3월 4일 수차도입의 시도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식이 없다...) 1546년 명종원년 2월 1일 수차도입의 시도가 기록되어 있다. 류큐나 중국에서 배운 복건식(福建式) 수차인듯 하다 이후 100년간 수차에 대한 기술(記述)이 없다. 소멸한듯 하다. 1650년 효종원년 5월 15일 수차도입을 시도 그리고 30년 기술(記述) 없음 1679년 숙종 5년 3월 3일 수차를 만들게 했다는 기술(記述). 그리고 70년 기술(記述) 없음. 1740년 영조 16년 4월 5일 수차 따위 없어졌다.『孝宗大王嘗頒遼瀋水車之制於外方, 今無見存者』 1740년 영조 16년 11월 20일 또 수차를 만들게 했다는 기술(記述). 전혀 보급되지 않은 모양이다. 1764년 1763~1764년의 조선통신사의 일동장유가(日東壮遊歌)에 "요도의 급수용 수차의 감상" 그 구조의 교묘함을 배워서 만들고 싶다는 기술이 있다 1795년 정조 19년 2월 18일 수차의 제작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보급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1811년 순조 11년 3월 30일 "수차 따위가 필요합니까?"라고 되어 있어 전혀 보급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통신사를 그린 그림 등도 남아 있다. http://kokis.client.jp/noby/n45_tushinshi.html 이런걸 보면, 한국은 수차조차 만들지 못하면서, 외국에 파견된 정식 사절이 닭을 훔치고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하는 형편없는 나라라는걸 알 수 있다. 에도시대 이전부터 차이는 현저하다.
(중략) 결론은 한국은 고대부터 전혀 진보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켜 안정된 통치와 높은 기술수준을 만들어 나갔다. 에도 시대는커녕, 고대부터 이미 차이는 현저했다.
에도시대 쯤에는 이미 현저한 차이가 났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 쯤에 조선에서는 "일본의 종이는 우수하니까 우리 나라에도 도입하자"고 했지만 전혀 흉내낼수 없었다. 일본도(日本刀)도 수입해서 베끼려 했지만, 조선반도의 제철기술로는 전혀 흉내낼 수 없었고, 되려 수입한 칼을 유지할 수 조차 없었다. 뭐, 그렇다면 가마쿠라 시대쯤엔 현저한 차이가 났다고 할 수 있겠지. 이때부터 "우리나라에도 수차를!"이라며 몇번이나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기술을 수입했지만, 결국 성공못했지. 그 이전에 관해서는 한국이 성실하게 조사하지 않아 잘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