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江戶)시대 일본은 동시대 여타 국가들에 비해서도 상당한 수준급의 경제대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비교적 앞선 수준의 화폐경제와 상품경제가 작동하고 있었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상당히 활성화된 시장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사람들이 '바빠서' '패스트푸드'가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그 대표격이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시'
에도(지금의 도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간단하게 먹는 것을 원했습니다.
원래 스시는 오랜 기간동안 발효시키고 숙성시켜 먹는 고급요리였는데, 이를 간소화시킨 게 오늘날의 스시, 18세기 초 처음 생길 당시에는 '하야스시(빠른 스시)'라고 불렸던 스시입니다.
발효시킨 정통 스시와 비슷한 향과 맛을 내려고 식초나 겨자 등을 넣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에도에서 다양한 구경거리를 보고, 물건을 사고, 또 달이 훤히 뜬 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게를 구경하면서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많은 학설들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유력했던 것은 바로 '참근교대'(参勤交代)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수립된 에도막부 정권은 전국의 다이묘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1년마다 그들이 자신의 영지를 떠나 에도에 머무르게 하였고 그들의 처자식들은 아예 에도에 상주해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260개에 달하는 영지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신단을 거느리고 이동해야 했기에 그 규모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죠. 물론 그 비용은 모두 자기들이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유력한 다이묘의 경우 2000명이 넘는 가신단을 이끌고 에도를 왕래했습니다. 특히 사츠마의 경우 (비록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자였지만..) 거대한 가신단을 이끌고 큐슈에서 에도까지 왕래하였는데 한 번 가는데 50일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기적인 왕래는 당연히 잘 정비된 도로와 수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겠죠. 물론 그러한 도로는 처음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었지만, 참근교대가 정례화되면서 도로는 더욱 잘 정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여관 및 식당이 생기고 이들은 모두 '현금결제'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물론 다이묘와 가신단도 물건의 지불을 현금으로밖에 할 수 없었겠죠... 이동하는 길에 쌀포대를 계속 가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
그리고 에도에 가신들과 함께 머물게 되었던 다이묘들은 대단한 소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예품을 사들이고 연극공연을 관람하고 차와 비단 과 같은 사치품을 사들이는 큰 손들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가신들도 의식주를 모두 에도의 시장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수요'는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생산자들을 에도에 집결, 이는 에도의 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는 것이었고, 18세기에 이르면 에도는 인구 '100만'의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동시대 오사카, 교토는 인구 40만의 도시로 성장했고요.
한 연구에 따르면 인구 1만명 이상의 도시인구가 전체인구에서 자치하는 비율은 1600년에 일본 4.4%, 중국 4.0%였는데, 1820년에 이르면 일본 12.3%, 중국 3.8%였씁니다. 동시대 서유럽은 각각 7.8%, 12.3%였씁니다. (조선은 19세기 말에 서울 25만명, 전 인구 대비 도시화 수준은 2.5%)
참근교대는 일본 전국의 도로 인프라를 발전시키고 이러한 도로망을 따라 무역망을 촉진시키고 화폐경제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수요를 집중시키는 블랙홀을 만들어 나름대로의 규모의 시장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참근교대는 다이묘들의 재정을 갉아먹는 주 요인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여러 번으로 나누어져있던 일본의 지형을 경제적으로 통합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에도시대의 도시생활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정치적 파편화가 경제성장에 나름 기여했던 거 같기도 해요. 유력 다이묘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 영지를 개발하려고 했으며 무역을 활성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럽열강이 발전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유럽 각국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사실을 지목하듯이, 일본 또한 각 지방의 영주들이 경쟁적으로 자기 영지를 더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탈번'(번 밖으로의 이동, 내지 탈주)은 심각한 죄였고, 대개 극형으로 다스렸던 것입니다. 영주들은 영지의 소중한(?) 노동력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