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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고구려 초기 왕들이 성이 해씨로 나와있는 기록들...
게시물ID : history_206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ckk
추천 : 3
조회수 : 138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5/12 05:10:46
『삼국유사』권1 기이1 고구려
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稟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 乃夫婁王之異稱也]
 

중간에 보면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본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햇빛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로서 성을 삼았다] 이 때 나이 12세였으니 한 효원제 건소 2년 갑신(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왕이라 칭하였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제2대 유리왕()
누리() 또는 유류()라고도 한다. 동명왕의 아들이다. 임인년(기원전 19)에 즉위하여 36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해씨()이다.
 
     
 
제3대 대무신왕()
이름은 무휼()인데 미류()라고도 한다. 성은 해씨로 유리왕의 셋째아들이다. 무인년(18)에 즉위하여 26년 동안 다스렸다.
 
     

 

제4대 민중왕()
이름은 색주()이고 성은 해씨로,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갑진년(44)에 즉위하여 4년 동안 다스렸다.
 
    

 

등등 고구려 초창기 왕들은 해씨라는 글이 국내역사책이나 중국사서에 나와서 그렇죠,,

뭐 고구려 역사 중간에 고씨로 다시 바뀌면서 유리왕이 동명왕과 아예 다른 계열이 아닐가..이런론도있지만..

ps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02650001&cp_code=rp0703&index_id=rp07030265&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search_left_menu=2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태조왕 때에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지』권30오한선비동이전 고구려조에 실린 “본래는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차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하였다(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해씨에서 고씨로의 왕실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로써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일반적인 비문의 형식과는 달리 시조인 주몽 이외에도 유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과 유리의 남행할 때의 모습이 비슷하며,『동명왕편』에는 주몽과 유리왕이 모두 주술적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들을 들어 유리왕은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김용선, 1980) 

그렇기 때문에 유리왕 이후의 왕들은 유리왕에 대한 시조의식이 있었으나, 왕권이 약화되고 계루부의 태조왕이 즉위하여 주몽에 대한 시조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유리설화는 주몽설화의 부속적인 종결부로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이종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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