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로 따로 쓸 것은 없고 블로그에 있는 이탈리아 여행기 일부 발췌해서 올립니다..ㄷㄷㄷ
역사에 관심이 많아요.
관심은 많은데, 아는 건 없고, 그런데 전공은 역사고 그래요..(서양사는 아닙니다)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ㄷㄷㄷㄷ
-------------------------------------------------
콜로세움 안에서 앞으로 갈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로마노를 바라보면 그 사이에 엄청나게 큰 개선문이 하나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지위를 자신이 획득하면서 황제에 올랐다.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던 로마는 당시 주변 민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로마제국의 지방에서 태어난 무장 출신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그는 로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1명의 황제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4두 정치였다. 그의 사두 정치는 동방과 서방에 각각 한 명의 정제(正帝 : Augustus)를 두고 그 밑에 각각 부제(副帝 : Caesar)를 두는 체제를 고안했다. 각각의 황제가 자신이 맡은 지역의 군사권을 갖고 방위를 담당하는 체제였다. 이 제도는 권력을 넷으로 나눈 것 같지만 군사적인 것이었을 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정치, 외교 등의 권리를 완벽하게 독점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는 이때 서방의 부제로 임명됐다.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또 다른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와 은퇴하자 콘스탄티누스 콜로루스는 정제에 자리에 올랐는데, 아쉽게 곧 병사한다. 이때 콘스탄티누스 콜로루스 휘하의 병사들이 그의 아들을 황제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다. 그는 바로 정제의 자리를 이어 받지 못하고 일단 부제에 지위에 오른다. 하지만 이때 로마는 초기 4황제와 그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다시 심한 혼란에 빠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정제에서 은퇴했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다른 황제들을 연이어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를 혼란을 극복한 것은 역시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를 내렸다는 막센티우스와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서방의 유일한 황제가 되며, 이후 동방의 황제였던 리키니우스까지 물리치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콜로세움 앞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바로 이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프랑스 학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가 앉아 개선문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난 그 옆에 모른 척 앉아 개선문을 감상했다. 그의 개선문에는 전시대의 황제인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델리우스 등 오현제 시대의 작품들을 일부 가져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금 잘 만들었다 싶은 것은 그 당시 것이었다. 오현제 시대는 로마제국 1,000년의 역사에서도 가장 전성기였고, 그 전성기에는 문화·예술도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제도를 정비한 재능 있는 황제임은 분명하지만, 혼란한 시대의 제국은 전성기 제국의 예술 역량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예술은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보며 새삼 느꼈다. 이렇게 조용히 감상 중인데, 프랑스 학생(?)들 중 일부가 날 힐끔힐끔 쳐다봤다. 처음엔 ‘괜히 나 혼자 느끼는 거겠지..’ 싶었는데, 아무래도 자기네 옆에 앉아 있으니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다시 일어나 개선문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팔라티노언덕으로 향했다.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로마노의 입구는 같다. 표 한 장을 사면 모두 관람할 수 있다. 일단 로마패스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로마의 대부분의 유적지는 들어갈 때 가방 검사를 하는데, 콜로세움에 들어갈 때는 아무 문제없었던 가방에서 계속 소리가 난 것이다. 나를 검사하던 여성 검침원은 짜증을 꾹 참는 표정을 하며 가방 검사를 마쳤다. 그런데 이번엔 몸에서 계속 소리가 났다. 휴대폰을 꺼내고 동전을 꺼냈는데도 소리가 났다. ‘아.. 이제 벨트 밖에 남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검침원도 ‘저 동양 남자가 벨트 푸는 것을 봐야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허둥지둥 가방의 짐을 보여주는 모습도 절대 ‘테러리스트’나 ‘IS’ 같아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벨트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급하게 손으로 나를 제지하더니 웃으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그렇게 무사히 검문을 마치고 들어가면 작은(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 비해) 개선문이 하나 보인다. 바로 티투스 개선문이다. 티투스(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기에는 풍부한 행정과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다. 로마가 네로 이후 많은 혼란을 겪었고 그것을 수습한 것이 티투스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인 것은 앞서도 언급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본격적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진격하던 시점에 유대 전쟁의 총 사령관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전쟁을 뒤로 미뤄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포기한 황제가 되긴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론도 그것을 좋게 봐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쟁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긴다. 이때 티투스의 나이는 겨우 30살이었다. 티투스는 이 전쟁을 잘(?) 마무리 했다. 이 전쟁으로 1,100,000명 이상이 죽고 97,000명 가량의 유대인이 포로가 되었으며, 유대는 ‘마사다 요새 항전’이라는 신화를 남겼다. 티투스 개선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81년에 만든 것이었다. 티투스는 네로나 마르쿠스 아우델리우스 같이 유명한 황제는 아니지만, 그의 제위기간에 일어난 큰 일로 앞으로도 이 글에 등장하게 된다.
출처 | 내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