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판 5분전
고구려 안장왕이 죽고 양원왕즉위과정에서 벌어진 추군과 세군의 싸움 즉 평양계와 국내계의 싸움은 2천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추군의 승리로 끝납니다.(545년) 여기에 때맞춰 북방초원에서는 기존 지배자 유연을 무너트리고 돌궐이 세력을 키워 초원을 통일하고 고구려의 북변으로 쳐들어옵니다. 여기에 고구려 수뇌부는 주력군을 북쪽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남쪽에서 급보가 날라옵니다.
나제동맹군이 북상하기 시작한 겁니다!
<고구려 수뇌부의 울림.jpg>
가뜩이나 내전으로 피폐해진 때에 북쪽과 남쪽으로 협공을 당한 고구려는 한정된 병력으로 지킬곳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만주냐? 한강유역이냐?.. 고민끝에 고구려는 북쪽을 지기키로 선택합니다. 그렇게 550년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잃고 551년 돌궐과의 백암성 전투의 승리로 북변을 지켜냅니다..
그리고 조금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557년 환도성에서 국내계가 반란을 일으킵니다.ㅡㅡ(간주리의 난)
물론 고구려는 곧장 이 난을 1500여년뒤의 어느 나라와 다르게 곧장 진압합니다만 2차례의 내전과 한강유역 손실은 고구려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고구려의 한축을 이루던 국내계가 빠진 고구려의 국정이 잘 돌아갈리가 만무했죠. 하지만 나쁜일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처럼 아직 마지막이 남아 있었습니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것입니다...
아니 3개로 나눠었던 게 2개로 나뉘어 봤자지.. 어짜피 남조(진)이 있지 않느냐.....하고싶은 고구려였지만 당시 진나라는 멸망할 냄새를 풀풀 풍기던 나라였고 북주 무제는 북제를 멸망시키자마자 곧장 군을 집결시켜 중원을 통일할 뜻을 표방합니다. 물론 578년 북주 무제가 급사하여 잠시 멈춰지긴 하지만 누가봐도 중원의 통일은 시간문제였습니다.
2.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수 없다("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에이브러햄 링컨
하지만 당시 고구려 왕이던 평원왕은 명군속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번개같이 마자 조공을 바쳐 요동군왕을 하사받으며 우호분위기를 쌓았고 왜국에 또한 사신을 보내어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리고 졸본으로 시조묘(추모왕)참배를 가서 국내계를 포섭하기 위해 애썼고 죄수를 사면하며 구휼에 힘썼습니다...................................만 뜻대로 잘풀릴 리가 있나
<공략 실패>
툭 찌르면 알아서 공략될줄 알았던, 미연시만 해본 히키코모리 평원왕의 망상처럼 현실 여자는(국내계 귀족들) 만만하지 않았고 되려 기존 공략 케릭터(평양계)의 우호도가 떨어지는 참사를 낳습니다.. 이런 정국을 타개하고자 평원왕은 미처 완공되지도 않은 장안성으로 서둘러 천도합니다.(586년) 막상 이사하고 와서 본 첫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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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중원 통일!](589년)
<평원왕의 심정>
멘탈을 수습하고 다시한번 공략집을 펼쳐든 평원왕은 자신의 매력수치가 낮다는 것을 깨닫고 발상을 전환! 덕질을 말리던 딸내미(평강공주) 강제 입덕시킨다음 모에 아이템으로 이용! 다시금 공략에 나서게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 게임은 평강공주가 국내계를 대표하는 온달과 혼인함으로서 끝맺음 됩니다. 이 혼인으로 왕실은 국내계와 중앙정계와 화합을 이루어 내고 이는 반세기의 내정불안정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3.대 신라 봉인작전!
천하에 중국의 수나라를 상대할 나라는 단 두나라! 돌궐과 고구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돌궐이 수문제의 이간책으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어 내전에 돌입합니다. 이제 남은 건 고구려. 수나라와 고구려와의 싸움은 피할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평원왕은 대가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550년때 처럼 북으로 수나라, 남으로 신라에게 쌈싸먹히면 고구려는 답이 없다.=>수나라와 싸우기 전에 신라를 봉인시켜 놓자! 라며 봉신연의에나 나올법한 신라 봉인작전 을 발동하려 하나.....죽습니다. 590년 평원왕 사망. 하지만 뒤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아버지 평원왕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있었고 아버지가 못다한 신라봉인작전에 돌입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단 백제.
안시켜도 관산성 전투 이후로 신라랑 죽기살기로 싸우는 중이고 덕분에 신라의 주력은 백제 전선에 포진된 상태.
뒤이어 일본.
그간의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2만 5천의 병사를 축자(위치 미상)라는 곳으로 주둔시켜 신라의 남변을 압박함
(591~595)
그리고 수나라.
수나라랑은 건국 직후인 581년 부터 꾸준히 사신을 보내어 외견상으로라도 우호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영양왕은 즉위하자마자 요동군공에,591년에는 고구려왕에 봉해지며 우호분위기를 만든다.
돌궐은?
신나게 내전중이고 수나라 신경쓰느라 이상무
마지막으로 고구려 내부는?
593년 장안성 공사가 완료되어 인력동원에 문제 없음! 그리고 국내계는 오랜만의 정계진출로 인해 공을 세우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
이상으로 고구려는 오직 신라에만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그리고 신라입장에서는 모든 군사력이 백제와 왜국에 대한 방비에 쏠려 고구려를 막을 수 없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구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도 길었던 침묵을 끝내고 온달을 위시한 원정군을 꾸려 마침내 남쪽으로의 공격을 시작합니다!
<오래 기달렸지? 형왔다. 쳐맞을 준비해라^^> 4.남쪽으로 ㄱㄱㄱ 애시당초 단일 군사력으로는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던 신라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고구려에게 조낸 두들겨 맞습니다.(이때 아단성의 위치 비정문제가 좀 심각하게 얽혀 있지만 복잡해지므로 패스하고 아래에 간략하게 기술해 놓겠습니다..)
<마치 이런 느낌> 일본서기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신뢰성은 떨어지지만) 이때 신라는 죽령이북을 포기할 고민까지 하게 되는데 후일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대화에 따르면 이때 온달이 빼앗은 땅덩어리는 약 500리. 당시 고구려척에 대한 연구가 많이 혼재 되어 있지만 최소 100km~200km 즉 한강유역 전부를 빼앗겼다고 보면 됩니다.
이처럼 신라가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는 위에서 보셨듯이 고구려의 시나리오가 너무 완벽했던 탓도 있지만 신라가 대 고구려전선에 대해 방심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고구려는 550년 부터 신라쪽에 대한 군사적 움직임이 전무했고 그에 반비례하여 백제의 공세가 거세졌기 때문에 신라는 568년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사실상 한강이북 유역에서 철수. 완충지대로만 구축해 놓습니다. 더군다나 남쪽의 왜군으로 인해 중앙군이 서라벌에 묶인 탓도 컷지요. 이러한 승전보를 전해받은 고구려 조정은....
를 외치면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고.. 축자에 주둔한 왜군이 낚시임을 깨달은 신라 조정은 황급히 중앙군을 북으로 보냅니다. 여기에 아단성 전투에서 총사령관인 온달이 뜻하지 않게 전사하고 고구려는 후일 있을 수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군의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했기에 신라 중앙군과의 전면전을 회피하고 눈물을 머금고 철군합니다.
5.마무리
고구려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한강유역은 다시 신라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이어 604년 신라는 북한산주를 다시금 설치하고 고구려를 경계합니다. 하지만 온달의 원정은 고구려에게 원하던 결과를 가져왔으니 바로 남쪽의 안정입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고수 전쟁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고 온달의 고구려군에게 영혼까지 털린 신라는 이후 임진강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한체 수세적 방어에만 치중합니다.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공포는 이후 삼국통일전쟁 당시에도 알 수 있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던 당군의 식량을 공급하기위해 쌀셔틀로 임진강을 넘어야 했었는데 인솔자로 자원자가 없어 당시 70을 바라보던 김유신이 직접 나서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약간의 비약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만큼 신라에게 고구려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었고 온달의 원정 이후에도 계속된 고구려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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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뭔가 새벽에 작성하다 보니 사심이 조금(?)들어간 느낌이 나네요;;;
오타신고-건전한 비판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ps2-일단 아단성의 위치는 단양 온달산성으로 비정했습니다. 요즘 연구가들이 죄다 이쪽으로 몰고있더다구요. 설득력도 꽤나 있구요
ps3-온달의 원정시기에 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한가지는 "양원왕즉위하자 온달이 왕께 아뢰었다말."라는 기사로 인해 590년으로 보는 주장과 장안성 완공시기와 일본서기 축자주둔, 수나라와의 외교관계을 고려해 보았을때 593~594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본인은 후자를 바탕으로 본 글을 작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ps4-온달을 국내계 귀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평민출신 신진세력으로 볼것이냐 에 대한 논쟁도 현재 있습니다만 가뜩이나 고구려가 평양vs국내로 나뉘어진 마당에 화합을 도모하지 못할 망정 제 3세력을 등장시키는것은 도박성이 너무 짙고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며 전자로 인식하였습니다.
ps5-온달의 남하경로또한 임진강-한강-남한강 루트로 볼것이냐 아니면 철원-춘천-홍천-원주-단양의 지금의 중부고속도로와 같은 내륙루트로 볼 것이냐 대한 논쟁은 현재 학계에서도 팽팽한 상태입니다. 전자는 고구려군이 주력을 동원했다는 의견이고 후자는 소규모 부대를 보냈다는 주장인데 저는 당시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준비를 보았을때 대규모 남하로 추정했고 전자의 경로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이하 논문
온달을 통해본 6세기 고구려 귀족사회/박인호
온달전의 검토/이기백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의 남진과 대신라 영역향방/장창은
6~7세기 고구려남경 고찰/서영일
온달에 관한 연구-아단성과 아차성을 중심으로/김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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