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적 군대인 별기군에 대해서, 사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한말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별기군 자체가 오래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뚜렷한 후계 군사조직을
낳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이번에 대한제국군 관련해서 자료 수집하다가 별기군 관련 자료를 얻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별기군의 한계
가장 먼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의 개인적인 한계부터 살펴봐야 할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존재하였던 두개의 근대적 육군 훈련 기관 중 하나인 육군 호산학교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육군 호산 학교는 당시 일본 육군 사관학교가 서양식 체제를 도입하여 근대식 장교를 육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필요한 장교의 즉시 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기존 구식 장교와 하사관의 진급을 통한
장교 육성 기관이었습니다.
1880년에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는 호리모토는 1880년 이전에 호산학교를 다닌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는 아직 호산학교에서 정식적인 사격교육이 실행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이는 1880년에 무라타 츠네요시(村田經芳, 1838~1921)가 일본의 첫 근대 후장식 소총, 무라타 소총을
개발하기 이전까지 사격관련 교과과정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1874년부터 1866년까지 육군 호산학교는 프랑스식 교육과정이 도입되어 있었으며
수업기간은 8개월에서 1년 8개월까지 병과마다 상이 했습니다.
여기에 호리모토의 병과가 공병이었던 점을 미루어 볼떄 전투 및 사격에 관한 훈련에 대한 전문성이
미흡하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프랑스식 교육과정 시기 동안 육군 호산 학교는 교과과정과 교관의 지도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 였기 때문에 정규 훈련 및 수업을 수월하게 이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훈련 방식 또한 기본적인 사격훈련이나 집단 훈련은 일부 교육하였지만 기계체조와 체력 단련에
치중된 개인훈련에 집중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때 호리모토의 근대적 전투 수행 능력과 그것을 가르칠 교관으로서의 능력에
의문점이 생길 것입니다.
다음은 가장 기본적인 총기에 관련한 것입니다.
향간에서는 일본이 1880년에 개발한 무라타 소총이 조선으로 수출되어 별기군에 지급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 아직 막 개발된 신식소총은 일본군에도 전부 보급되지 않은 실정이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또한 제반상황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1884년에 고종이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접견하면서
다케조에가 무라타 소총 2정을 고종과 왕세자에게 바칠때, 고종이
“지난날 그 이름만 들었는데 오늘 실물을 보게 되었다. 응당 보물로 삼겠다.”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별기군에 무라타소총이 지급되었다는 것은 낭설일 것입니다.
이런 별기군은 서양에서 수입하거나 청이나 일본 혹은 서양국가에서 선물 받은
다양한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총기 부품과 탄약을 수입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잡다한 소총 종류 때문에 탄약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고장이 발생해도 자체적으로
수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별기군의 사격훈련은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고위관리나 고종이 왔을때 전시성으로 보여주는 정도였습니다.
이는 1880년에 독자적 소총을 개발한 일본이 제식소총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소총에 대한 연구와
개발을 추진하며 서양의 기초과학과 야금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과는 매우 상반적으로
조선 조정과 고종은 특유의 근시안적인 태도와 근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제식소총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고 서양의 기술 도입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비록 영선사가 청으로 파견되어 무기 제조를 배우려 했지만 조선의 재정은 유학생들의
체류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고 더불어 이런 노력에 대한 의지와 필요성 또한 부재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는 1910년 망국까지 대한제국이 스스로 제식소총을
생산하지 못했으며, 잡다한 소총을 운용한 것과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또한 훈련 장소 또한 고종이 이들을 개인적인 위신 증대와 안전을 위한 호위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성안에서 주로 훈련을 받았고 이는 야외훈련과 전투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근대적 군대라 한다면 전근대 처럼 개인의 특출한 무력을 육성하여 ‘영웅’과 같은 독보적
존재로 만들기 위한 혹독한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규격화’되어 있는 형태에서 조련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인은 이제 국가에 유용한, 그러나 위협적이지 않은 부속품으로서의
근대적 군인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별기군에 소속된 호리모토 개인의 부족과 조선 정부의 교관 수급의 안이함이 겹치면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고 이는 이들이 근대 군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실패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군복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사관생도로 선발된 양반자제들은 두루마기 위에
군복을 착용하는 등 근대적 군대와 괴리가 있었으며 이것은 이들이 군사훈련에 대한 절박함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양반 자제들로 구성된 사관생도들이 조선인 훈련교관 우범선(그의 죄과는 차치하고)
업신여기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근대적 군인의
육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에 어긋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동아시아에서 근대화가 가장 촉진되었던 일본의 사관생도에 대한 메이지의 발언을 보면
“이제부터 장교직에 대한 요구는, 평시에는 지식과 교육, 전시에는 예외적 용기 및 명민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보장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질을 보유하는 국민 각자는 군대의 최고 직책을 차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적 차별은 이제부터 군대 안에서 종식될 것이며, 각자는 자신의 배경에
관계없이 동일한 의무와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더욱 명확할 것입니다.
별기군의 실패는 누군가 의도하여 그렇게 된것이 아니라, 조선의 전반적 상황과 별기군이 가지고 있던
스스로의 한계 때문으로 봐야할 것이며 임오군란이 없었더 하더라도 별기군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