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열하일기 애기가 나와서 올려봅니다~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가 배워온 것과 전혀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 |
ⓒ시사IN 남문희 랴오양 박물관 안의 전시실 입구. 평양의 앞뒤를 바꿔 양평이라 불렀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랴오양 박물관에 걸려 있는 <요사> 지리지(왼쪽). 오른쪽 둘째 줄에 이곳이 옛 평양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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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망한 후 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22일 오전, 별 기대 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지금의 평양에서 한성이라는 명문이 찍힌 유물이 몇 차례 발견됐다고 한다. 고구려 당시 지명이 한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이라는 이름은 고려 공민왕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사> 지리지에서 ‘지금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라고 기록한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랴오양이라면 이후 고구려 수도는 어떻게 됐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100여 년 뒤인 평원왕 때 장안성으로 다시 천도했다. 복기대 교수는 2010년 논문에서 이 장안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복 교수는 이후 연구를 통해 종전의 추정을 수정한다. 장안성 역시 랴오양에 있었을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마침 명나라 때 지도를 보면, 랴오양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장안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구려가 당과 치른 마지막 혈전이 랴오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 | |
ⓒ시사IN 남문희 랴오양 박물관 안의 전시실 입구. 평양의 앞뒤를 바꿔 양평이라 불렀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랴오양 박물관에 걸려 있는 <요사> 지리지(왼쪽). 오른쪽 둘째 줄에 이곳이 옛 평양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