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정, “고조선과 낙랑의 북한 문화유산” 이라는 논문을 봤습니다.
요 근래에 남한과 북한의 낙랑의 비정이 다른 점에 대해서 식민사관 때문이라는 식의 기사를 좀 봤던 터라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본 논문인데 의외로 재미가 있더군요.
논문의 전반적인 내용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북한의 연구는 억지다’ 정도가 될 거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1990년대 까지 그들이 주장하던 고조선과 낙랑의 연구 성과를 평양의 단군릉 개장을 기점으로 싸그리 무너뜨렸으며, 동시에 각종 억측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종래의 북한의 연구는 고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전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9세기는 산해경 혹은 관자의 연대를 따른 기년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고조선은 요령일대에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토기, 팽이형토기 그리고 지석묘를 표지유물로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기원전 9세기 후반에 가서 후기 고조선 문화가 등장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전기 고조선사회는 전형적인 고대노예제 사회로써 특히나 요동반도에 위치한 강상적석총과 루상적석총이 주목되는데 이 안에서는 화장된 인골과 함께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북한학계는 이른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으며 동시에 여기서 출토된 인골들을 순장된 인골로 보아 고조선을 노예제적 성격을 가진 국가로 분류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유적들이 제기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정확한 왕성을 지목하지는 못하나 요령일대를 그 중심지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9세기 후반의 후기 고조선 문화는 지석묘에서 토광 석곽묘로 그리고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의 표지유물의 변화를 보이며 동시에 세문鏡 같은 의기형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됩니다. 그리고 그 문화의 중심지는 요동에서 서북한 일대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런 중심지 규정에는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토성들이 지목되는데, 여기서는 전국시대 철기를 비롯하여 명도전 등이 발견되어 북한학계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도시문화의 성장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기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발전한 봉건화된 사회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여기 까지가 199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 주장하였던 고조선에 대한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낙랑군에 대한 연구도 그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인 서북한과 요동에 존재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도식화 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기 고조선 | 후기 고조선 | |
중심지 | 요령일대 | 요동~서북한 |
표지유물 | 비파형동검, 지석묘, 미송리식토기,팽이형토기 등 | 세형동검, 토광묘, 석관묘, 세문경 등 |
시대구분 | 고대 노예제 사회 | 고대 봉건화 된 사회(구체적으로 위만조선) |
그런데 이런 북한학계의 주장이 단군릉 개장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1. 단군릉
1993년 가을에 북한학계 단군신화를 전면적으로 역사로 인식하고 단군조선을 그 시초로 인정하게 됩니다. 북한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단군이란 실제적 인물이 존재했고 그는 평양에서 고조선을 개창하여 평양에서 죽어 묻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제시 되는 것이 단군릉인데 발굴조사 보고서를 본다면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크기는 동서 273cm 남북 276cm의 작은 석실봉토분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며 모줄임천장을 하고 있고 벽화의 내용은 옛 선인과 신비한 장군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발굴된 유물의 면면을 보면 일제시기에 대부분이 도굴당했지만 금동관, 금동허리띠장식, 고구려토기편 그리고 남녀 두사람의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유물이라기 보다는 식실분이 고구려 일대에 유입되는 5세기경의 묘지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골입니다. 북한은 이 인골의 E.S.R측정을 통해 1993년으로부터 5011년(오차 267년)을 얻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역산하면 기원전 3018년(오차 267년)이 산출됩니다. 이는 익히 알려진 일연의 기원전 2333년과 유사하며 특히나 기원전 29세기에 금동관을 쓸 대상은 고조선의 단군뿐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해당 단군릉에서 어째서 고구려의 묘제와 토기편이 나왔냐는 질문에는 고구려가 단군을 숭앙해 묘지를 재건축 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자의 반론 : 그러나 고구려의 재건축으로 보기에는 묘제가 터무니 없이 작다는 점이나 천손의식을 가진 고구려가 실제로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 의구심이 생깁니다.(혹자들은 삼국사기의 다물도란 이름을 걸고 넘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삼국사기를 다시 읽고 오시는걸 권 합니다.. ) 이런 의구심들은 본질적으로 북한에서 주장하는 ESR측정의 신뢰성에도 문제를 제기 하게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저 측정 결과는 나홀로 존재할 뿐 주변의 어떤 근거도 저 측정 결과를 뒷받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심은 이후로 북한학계가 제시하는 측정 결과 자체들이 너무나도 딱딱 떨어진 다는 점에서 더욱 커집니다.)
2. 황대성
이 외에 추가적인 유물로 제시되는 것은 평양시에 위치한 황대성입니다. 이 황대성은 기존에 고구려 혹은 고려의 유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왜냐면 황대성 자체가 특징적인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지만 그 석축 기법이 고려나 고구려의 토석혼축 기법이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군릉 개장 이후의 북한학계는 황대성 성터에서 발견된 지석묘 2기와 1기의 석관묘를 기초로 이 황대성이 단군조선의 왕검성이었음을 주장합니다. 1호 지석묘와 2호 지석묘가 각각 황대성의 성벽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지석묘보다 이른시기에 황대성이 쌓였을거라는 겁니다. 뒤 이어서 이번에는 버려져 끊어진 황대성의 성터 위에 존재하는 석곽을 이야기 하는데 해당 석곽을 또 E.S.R 측정한 결과 1995년 으로부터 4795년(오차 215년)이 나왔다고 합니다. 역산하면 기원전 2800년(오차 215년)이 나옵니다. 이는 또한 단군조선의 시기인데, 이 석곽의 위치가 어찌 되었든 성터의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또 다시 이 황대성이 이 석곽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결국 황대성의 연대를 기원전 27세기 보다 앞선 시기로 규정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북한학계는 황대성의 연원을 제시하고 그 규모로 보아 고조선의 왕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의 반론 : 문제는 황대성 자체입니다. 지석묘의 위치가 많이 걸리는 부분은 있으나 실제로 황대성 자체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해당 성곽이 고구려나 고려의 토석혼축 기법이 쓰였다는 점은 북한학계가 주장하는 연대기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다 정작 중요한 지석묘에 대한 연대측정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연대 측정의 결과는 오직 석곽묘에 한해서만 공개되었는데, 이 석곽묘의 위치는 폐성곽 즉, 이미 버려진 성터에 존재합니다. 이는 기존의 황대성의 연대를 석곽묘의 연대 측정을 기준으로 올려 보는 북한학계의 논리적 구조 자체에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단군릉의 사례처럼 ESR측정의 결과가 과연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집합식 지석묘
또 다르게 주목할 만한 유물로 평양근처의 성천군 용대리의 지석묘가 있습니다. 이 지석묘의 특징은 거대한 1기의 지석이 위치하고 그 지하에 여러개의 묘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북한학계의 발굴조사에 따르자면 이 지석묘는 집합식 지석묘로 해석되는데, 가운데에 2구의 인골이 존재하고 사방으로 11구역의 작은 묘실이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38구의 남녀노소의 유골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중앙 묘실에서는 청동기가 그리고 주변에서는 石釜등이 발견되어 묘장자 별 사용 물건이 달랐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 주장이 맞다면 이 지석묘의 매장자들은 중앙의 상급자를 기준으로 주변부에 순장을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수준이 낮은 사용 물건이 그들의 계급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더욱이 북한은 또 다시 E.S.R을 사용해 이들 인골의 연대가 모두 기원전 31세기의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기원전 31세기에 이정도의 순장 규모를 가진 존재는 고조선의 지도부 외에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덧 붙여서 말입니다.
저자의 반론 : 이 지석묘 발굴조사의 문제점은 해당 지석묘에 접한 다른 묘실들이 정말로 중앙 묘실에 딸린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부재하다는 점입니다. 기실 집합묘라는 이 지석묘의 발굴조사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밝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누락되어져 있다는 점은 뭔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4. 추가적인 지석묘 발굴사업
이 성천군 용대리의 지석묘 말고도 북한은 단군릉 개장 이후에 갑자기 평양 일대에서 수도 없이 많은 지석묘를 발굴조사 했습니다. 그 지석묘들의 특징은 모두 북방형 지석묘이며, 출토 유물로 팽이형토기와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등 고조선의 표지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순장 무덤이 발견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발견된 지석묘의 숫자가 모두 1만 4천기에 달한다고 합니다. (....)
저자의 반론 : 저자가 따로 반론을 달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별다른 반론이 필요 없을 정도군요...
5. 낙랑토성
낙랑군에 관련된 유물에 대해서도 북한학계는 종래의 해석을 수정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낙랑토성입니다. 평양시에 위치한 낙랑토성은 그 규모가 주변부에 위치한 토성과 다르게 큰편에 속합니다. 특히나 출토 유물로 ‘천추만세’ ‘낙랑예관’ 이라 쓰인 막새기와가 출토되었고, 이 외에도 건출자재 등이 출토되어 이 토성이 주변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 단위었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더욱이 해당 토성 주변에 위치한 무덤에서는 한국식 동검이 출토된 바가 있어 해당 토성이 본래 고조선의 유물이었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런데 북한학계는 또 다시 성벽 위에 위치한 지석묘를 근거로 이 낙랑토성이 실은 고조선의 유물이었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 위치한 묘제를 설명하는데, 해당 묘제들은 목곽무덤을 비롯한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목곽무덤은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토착적인 문화에 기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이 지역의 목곽무덤은 부장품으로 고조선을 계승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문제는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인데 북한학계는 이 두 묘제가 앞선 목곽무덤의 궁륭형 천장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면 낙랑토성은묘제가 보여주듯이 지속적으로 고조선의 유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이해되며 이는 자연스럽게 평양일대의 낙랑이 고조선의 候國임을 의미하게 됩니다.
저자의 반론 : 문제는 이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전형적인 중국식이라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귀틀무덤에서는 중국거울이 출토되었고, 칠기에는 한자어가 쓰여있으며 특히나 그릇류에는 중국의 연호가 쓰여진 물건이 출토되었습니다. 더구나 남한의 학계에서는 목곽무덤의 연대를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귀특무덤의 연대를 기원전 1세기 초 ~ 기원후 2세기, 벽돌무덤을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3세기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북한학계에서 주장하는 고조선의 묘제라고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한연대들이죠.
6. 고조선 신화 재해석
위에서 언급된 몇가지의 유물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북한학계는 수정을 가했고 이를 기반으로 고조선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 합니다. 우선 고조선의 단군에 대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군신화를 실제성을 가진 신화로 이해하고 단군왕검을 실존 인물로 그리고 이 신화는 단군의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한 건국신화로 이해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명을 위해 근대에 쓰여진 것으로 잘 알려진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를 연구 사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단군신화에는 일연의 시대에 추가된 후대적 요소인 환인이나 제석천, 풍백우사운사 같은 불교나 도교적 요소가 들어 있어 그것 자체를 고대의 원형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서 남한의 학계에서는 이 단군신화를 역사성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써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곰과 호랑이를 곰 부족 호랑이 부족으로 이해하고 풍백우사운사를 농경사회로 이해하며 단군왕검을 제정일치 지도자로 이해하는 방식이지요. 거기에 더해서 북한의 주장과 다르게 단군왕검은 당시대에 요하일대에서 지도자를 의미하는 보통대명사로 이해하는 것도 있습니다.
7. 고조선의 시대구분
북한학계의 재해석은 이 뿐만이 아니라 고조선의 시대구분에도 미칩니다. 앞서 북한은 고조선의 시대를 유물의 분포에 따라서 전기와 후기로 나눈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전후만 3대 왕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 후기로 나누었던 고조선의 연대를 기원전 9세기로 봤던 종래의 인식에서 후조선이 기원전 14세기에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앞서 봤던 지석묘나 토성의 어마무시한 연대측정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따르면 주변에 고조선의 候國들이 생기며 대표적으로 부여나 고구려 진국 등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왕조인 만조선은 위만의 조선인데, 이 만조선의 멸망 이후에 드디어 고대 봉건적 사회가 돌입했다고 주장합니다. 종래에 위만조선시기에 고대 봉건적 사회가 등장했다고 말한 것 보다 늦어진 시기이지요. 다른 것들의 상한연대를 올리는 유별나게도 와중에 늦어진 이 봉건적 사회 돌입 시기는 바로 낙랑과 관계가 깊습니다. 위에서도 이미 설명한 바처럼 북한은 평양 주변의 낙랑을 최씨낙랑국으로 설명하면서 고조선의 후국중 하나로 이해합니다. 만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후국이었던 최씨낙랑국만이 그 유지를 이어 고조선의 유민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봉건적인 습속이 남아 고대 봉건적 사회로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시대 구분도 문제는 있습니다. 우선 말도 안되게 올려 잡은 기원전 14세기가 문제입니다. 북한이 고조선 유물의 상한연대를 올려 버려 근거로 삼고 있지만 애초에 그 유물의 상한연대가 문제인데다 사료상으로도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1990년대 초에 그들이 주장했던 요령일대의 고조선 유물들은 9세기가 상한연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별다른 근거도 없이 5세기 가량이 뛰어버리니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더하여 전후만의 3대 구분의 근거도 매우 빈약한데다(아마도 신채호의 3조선설을 채용한거 같은데 참 황당하죠) 낙랑을 비롯한 주변국들(심지어 한반도 남부의 진국 까지도)을 후국으로 설정한 근거가 전무합니다.
8. 낙랑사 재해석
마지막으로 (드디어..) 북한학계의 고조선사 수정은 낙랑군에 미치게 되는데, 이 낙랑을 둘로 쪼개 버립니다. 바로 낙랑군과 낙랑국이지요. 이미 앞에서 조금 이야기 했습니다만 낙랑국은 최씨낙랑국으로 고구려 호동왕자와 자명고의 낙랑공주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최씨 낙랑국의 존재는 실제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는 미지의 존재입니다. (최근에 이 낙랑국을 낙랑군의 토착화의 결과로 이해하는 논문을 본적이 있습니다.) 유물이 없는건 둘째치고 그 영역으로 풀이되는 평안남도 일대가 낙랑군의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북한은 낙랑군을 북쪽으로 보내 버립니다. 그리고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반도 일대로 규정합니다. 이로써 북한은 평양에 낙랑국 그리고 요동반도에 낙랑군의 2낙랑 체제를 성립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 북한은 ‘한은 조선을 공격하여 만조선을 무너뜨리나 요동일대 밖에 차지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유민들은 낙랑이란 이름으로 평안남도 일대에서 거주하게 되었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합니다. 우선 낙랑 = 조선 이라는 설명은 앞서 이야기한 낙랑이 조선의 후국이라는 설명과 충돌합니다. 당장 낙랑의 위치를 평안도 일대로 규정하고 있는 북한학계는 낙랑과 조선의 중심지가 겹치는 현상부터 설명해야 하지요. 두 번째로, 한이 요동만을 차지했다면 왜 만조선이 멸망하였는가에 대한 설명도 부재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양일대에서 지속적으로 출토되는 중국의 유물유적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를 오직 고조선의 유물로만 해석하려 하지만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억지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식화 한번 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조선 | 후조선 | 만조선 | 낙랑국 | 낙랑군 | |
중심지 | 평양 | 평양 | 평양 | 서북한 | 요동반도 |
표지유물 | 지석묘 | 지석묘, 목곽무덤, 비파형동검, 미송리식토기, 팽이형토기 | 지석묘, 목곽무덤, 비파형동검, 세형동검,미송리식토기, 팽이형토기 | 귀틀무덤,벽돌무덤,세형동검 |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 |
시대구분 | 고대 노예제 | 고대 노예제 | 고대 노예제 | 고대 봉건적 사회 | |
특징 | 기원전 14세기 시작 | 위만의 조선, 한에 의해 멸망했으나 부수도인 요동일대만 상실하고 평양은 유지함(그런데 멸망?) | 조선의 후국. |
(아래는 잡설입니다.)
논문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은데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쓰다 보니 글 자체가 길어진거 같습니다.
북한학계에서 주장하는 2낙랑설은 그 기조가 일반적으로 민족성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에서 기반한다고 봅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하고 그 땅에 한사군이 성립했다면 그들에게는 민족적인 수치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억지로 유물도 없는 요동반도의 낙랑군을 설정해야만 했으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사군의 낙랑 마저도 낙랑국으로 이해하는 무리수를 두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북한학계의 고조선과 낙랑에 대한 이해는 단군릉을 기점으로 유물에 대한 억측과 무리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종래의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통째로 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면서도 말이지요. 이런 상황이니 사실상 북한학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논문의 저자는 이에 대해서 “북한학계의 주장은 단지 주장에 그칠 뿐이지 학문적으로 객관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직언을 마다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저 개인적으로 이런 북한의 과도한 민족주의적인 해석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거 같다는 불안감이 스믈스믈 기어나오는거 같습니다. 역사 커뮤계에서 유명한 유사사학은 둘째치고서라도 당장 이 글을 쓰게 만든 그 시사in과 세계일보의 기사, 그리고 종종 한겨례에서 쏫아지는 덕사마를 비롯한 유명한 재야사학자 분들의 인터뷰와 특집보도는 민족적 자긍심을 위해서라면 역사를 얼마든 왜곡해도 좋다 라는 그들의 이해가 담겨 나오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사를 접한 대다수의 대중들은 이러한 문제에 자연스럽게 무지하기에(모르는게 당연하지요 전공이나 관심분야가 아닌 이상) 현혹되게 되고 합리적인 해석 대신에 북한과 같은 무리한 해석을 따라가게 되는거 같습니다. 본인들이 그렇게 현혹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상태로 말이지요.
말이 길어 집니다만.. 저는 이런 현상이 한편으로는 역사라는 학문의 비전문성에 기인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비전문성이란 고대의 시민교육처럼 역사가 교양 혹은 특정 목적을 가지고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비전문적인 대중에게 쉽게 다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의 학문화가 대중성을 이끌었고 이런 대중성은 자연스럽게 비전문가의 疑似전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요? 역사는 자연스럽게 사회와 연관이 깊기에 이 의사전문가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고 봅니다. 그들은 역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왕왕 사용하고 이것이 현 북한학계나 남한학계의 일부 집단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대학시절에 읽었던 “조선력사”를 떠오르게 하는 논문이었습니다. 재밌네요.
출처 | 송호정,'고조선과 낙랑의 북한 문화유산', "한국고대사연구"25권, 한국고대사학회,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