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3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으며, 4월 김구·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이 남북협상을 추진하려 할 때 남한의 이승만의 협조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북한 김일성의 협조를 얻어내는가 하며 김구의 남북협상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 뒤 이승만 정권 때는 야당활동을 하며 독재와 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2]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대통령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13] 그러나 선거 결과는 낙선하였다. 1차 지명전에서 1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표를 받았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시영 · 조병옥 · 김성수 등과 반독재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승만정권과 계속 투쟁하였다. 1953년 성균관대학이 4년제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6년 강압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강제 사임하게 되었다. 1957년 성균관 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당하였다. 1959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서한을 발송했다.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이승만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어 출마하였다.[14]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9표를 얻어 낙선, 208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하였다.[14]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병중에 박정희의 방문을 받았으나 외면하였다.
그 외에 의성 김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15]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5월 10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B0%BD%EC%88%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