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중앙전산소에서의 만남 역시 거의 반쯤은 노는 분위기였다. 단지 이번에는 한시간 간격으로 나갔다는 점이 전과는 다른 점이랄까. 하지만, 난 별로 불만이 없었다 - 뭐, 오전 열시부터 오후 열시까지 보장된 데이트였으니까, 적어도 나에게는. 게다가 마침, 그날은 우리 학교 축제일이었다 - 그래서인지, 학관에서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져있는 잔디밭들과 공터에는 천막들이 빼곡이 들어차있어서, 마치 종로2가에서 3가 사이의 노점상을 방불케하였다. 그리고 이런 걸 놓치는 내가 아니다.
“누나, 오늘 축제인데 보러 안가요?” “응?” “보러 가요오~”
또 시작해보자, 내 어리광. 물론 기대는 하지마라, 내가 생각해도 조금 보기 안좋다. 거울보고 연습하며 어느정도 나아지긴 했어도, 그게 내 외모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한다.
“나 이거 아직 안끝냈는데...”
하면서 입을 삐죽 내미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자꾸만 그 빨간 입술에 시선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오해없길 바란다. 난 그저 보고 있는것일 뿐이다.
“배고파요, 가요.”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누나의 손목을 잡아끈다. ...아.
“...”
지금 내가 누나의 손을 잡고 있구나. 뒤늦은 자각에 얼굴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개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여긴 전산소다. 그것도 우리학교의 중앙전산소. 다시 말해, 지금 이 컴퓨터실에 50여명은 있다는 소린데. 아이고머니나. 지금이라도 손을 슥 풀까나. 아니 그런데 그러면 뒤늦게라도 뭔가 어색해지지 않을까나. 아 왜 내가 이런 짓을...
“아, 그럴까? 그러고보니 배고프네에~”
...응?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고, 이 사람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준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누나의 손이 너무나도 부드럽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은. 여자친구가 아닌,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은. 더 이상 손을 잡을 수 없다. 몇 초라도 더 잡고 있다간, 내 심장이 너무 뛰어 폭발해버릴 것만 같아서. 지금도 견디기가 힘들다. 진지하게, 이러다 죽겠다. 손을 살짝 놓고, 앞장서서 컴퓨터실을 나간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누나가 따라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난 인생 처음으로 겪고 있는, 올멀티한 저그 해처리에서 나오는 저글링마냥 쏟아져나오는 행복의 러쉬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 뒤에 따라오는 누나는 말이 없다. 이따금씩 쿡쿡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전부이다.
*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간다. 만약 인생이 이런 속도로 지나간다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모니터와 누나의 하얀 옆모습을 번갈아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열시다. 이건 사기다!
“...아아, 이.”
기지개를 펴고 문득 컴퓨터실을 보니, 이미 누나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누나는 뭐가 그렇게 열심인지 아직 컴퓨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자그마한 귀에 걸린 귀고리가 예쁘다고 생각하며 또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 누나와 눈이 마주친다. 뭐, 이젠 눈 마주치는 것정도는 익숙...
“...”
...하지 않구나.
“아, 벌써 열시네에- 성원이 버스 타야되잖아.”
그녀 역시 기지개를 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내 옆으로 터벅터벅 걸어온다.
“가자.”
하면서 초롱초롱한 눈을 세네번 깜박인다. 그래, 가자 - 하면서 나도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다. 밖에는 이제 어두컴컴해져서 띄엄띄엄 놓여진 가로등에서 비춰지는 하얀 불빛 이외에는 모두 심연에 가려져있다. 하긴, 당연한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입구를 나서는데
“...?”
툭, 툭. 머리 위로 뭔가 축축한 것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늘 위를 본다. 그리고 고개를 들은 나의 얼굴에도 축축한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 비가 오는구나 - 그러고보니 오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
“...”
난 비를 싫어한다. 우산이 있고없고는 별 상관없다. 일단 옷이 젖는게 너무나도 싫다. 부주의한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우의에 부츠까지 신지 않는 이상 우산을 쓰고 안쓰고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일단 바지단 반정도는 젖기 일쑤였고, 그리고 그런 현상은 어머니에게 ‘니가 빨래해봐라’와 비슷한 류의 꾸중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산이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 모든 사람들이 우의를 입고 돌아다닌다면 나도 거리낌없이 비닐옷을 덮어쓰고 당당하게 나갈텐데 말이지.
“...아.”
문득 망상에 빠져있는 나를 깨워주는 것은 옆에 있는 서연누님의 한 마디였다.
“우산이 없네에...”
아아, 그러십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두 개를 준비해오는건데 그랬나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 우산은 하나밖에 없다.
“아, 저 우산 있어요.”
하면서 가방에서 우산을 꺼낸다. 3단우산이라 그런지 두명이 쓰기에는 약간 버겁지만, 뭐 부족한 부분은 내가 희생하면 별 무리는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이런 환경이라면 누나랑 더 가까이서 걷는 기회일수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비가 고마운 존재인가?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누나는 조심스레 내가 편 우산 속으로 들어온다.
“어, 들어오라는 얘기 없었는데.” “이럴거야?”
하면서 입을 빼쭉 내민다, 다시. 아,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요. 이 순수한 동생을 늑대로 돌변하게 만들고 싶습니까요. 괜히 추가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말없이 옆으로 비켜서준다. 그리고 누나가 다 들어왔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길을 나선다.
“성원아 너 그렇게 나가있으면 비 다맞잖아~ 들어와아~”
누나가 내 팔을 잡아끈다. 정말 환장하겠다. 이러지 말아요, 누나. 이럴 거면 차라리 옷이 다 젖어버리는게 낫지... 그러고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밀착하고 걷는 적은 처음이구나. 오늘 정말 귀중한 경험들을 많이 한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손도 잡아보고, 한 우산에 같이 걷기도 하는구나. 예수님, 제가 쌓은 공덕이 이제 저에게 돌아오는 것이나이까.
“하하...”
하지만 난 누나의 잡아끔에도 불구하고 계속 밖으로 나간다. 이건 일종의 안전거리이기 때문에. 내 이성의 끈을 놓지않게 하기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이다. 하지만 비오는 밤 거리에서 단둘이 걸으며 이따금씩 좋아하는 사람의 샴푸향기를 맡는 것은, 그러한 안전장치조차 그 조임을 느슨하게 만들어버린다.
“...”
걸어가면서 딱히 말은 없었다. 일단 나는 이 좋은 경험을 어떻게든 음미해보자는 주의였고, 누나의 마음은 내 알 길이 없다. 여하튼, 이제 1분만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위로 올라가면 기숙사로 향하는 길이고, 아래로 가면 내가 탈 정류장이 나온다. 이대로라면 기숙사까지 모셔다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니면 최소한 기숙사까지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리고 싶었지만. 그런데 그러면 내가 여기서 출발하는 막차를 놓칠 것 같다.
‘뭐 별 상관없지 않나?’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리고 그렇다고 내가 있는 정류장으로 가기에는 내 마음이 허락지 않는다. 이거, 의외로 딜레마라는 생각이 든다.
“...아, 너는 내려가야하지?”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면서 뛸 준비를 한다. 날 보내고 자긴 비맞고 갈 요량이다. 가방을 손에 들고 뭔가 방어태세를 취한다. 난 사실, 여자친구와 같이 길을 걸어도 갈림길이 나오면 그냥 헤어지는 주의다. 만약 여자친구와 걷는 도중에 이런 일이 있다면, 난 아마 못이기는 척 내버려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을 그렇게 내버려두기에는,
“...”
제가 당신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렸어요.
“...”
우산을 잡고 있는 손을 들어, 그 사람의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웃어준다. 살짝 놀란 표정의 누나 얼굴이 보인다.
“저, 먼저 갈게요.” “어, 어? 어?”
상황파악이 들게 하면 안된다 - 라는 생각과 동시에 우산 속에서 뛰쳐나간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고 바로 달려간다.
“야, 왜그래! 너 다 젖어!!”
뒤에서 소리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못들은척 그냥 달려간다. 정류장까지는 뛰어가도 5분거리지만, 일단은 그냥 뛰고본다. TV에서 저번에, ‘걷거나 뛰거나 비맞는건 똑같다’라는 실험결과를 본 기억이 생각나지만, 그래도 뭐 상관없다. 일단 뛴다 - 그리고 가슴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아...”
그 사람한테 속칭 ‘작업’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난 이 사람하고 잘되보려는 노력을 사실상 거의 하지않고 있다. 그저 드는 생각은,
‘더 같이 있고 싶다’
이 느낌. 너무 강렬하긴 하지만, 느낌은 하나다. 더 같이, 조금만 더 같이.
“...”
기적적인 타이밍에 도착한 버스를 타면서, 문자를 뜻하는 진동을 느낀다. 열어서 확인해본다.
고맙다니요,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 하면서 핸드폰을 넣으려고 하는데, 한번 더 진동이 울린다. 어? 이번엔 어디지. 집에서 빨리 오라고 문자라도 보내는건가. 핸드폰을 열고, 확인해본다. ...
[걱정마요 내가 비 안오게 계속 기도할게요~ 헤헤]
아아. 정말... 가슴 속에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세정거장이나 지나쳐버린 지금이라도 버스를 세우고 뛰어내려서 기숙사까지 한달음에 내닫고 싶다. 그리고 들어가려는 그 사람을 붙잡고 그냥 말해버리고 싶다. 좋아한다고. 너무 좋아해버리게 되었다고.
“...”
하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막연한 느낌이 내 안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했다간,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핸드폰을 열고 그 문자를 보고 또본다. 날 위해 기도를 해준다...라...
“...”
기도는, 제가 하고 싶어요. 당신과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이런게 아니라. 당신이 웃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있게만, 그렇게만이라도. 이렇게 돌이킬 수 없게 된 내 자신이 몰래라도 볼 수 있도록.
“...”
눈을 감고 손을 모은다. 예수님, 고마워요. 그리고 부탁할게요. 저, 이런 행복 익숙하지 않잖아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이 불안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갈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더 큰거 바라지 않을게요, 그 사람이 날 좋아하도록 기도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쉽잖아요. 부탁이에요.
“...”
어느덧 Y대를 지나가는 버스가 연희동을 향해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제는 반응이없는 핸드폰을 붙잡고, 답장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그 움직이지 않는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의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